CJ제일제당 오세아니아 법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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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제일제당 오세아니아 법인장입니다.
🍀 마케터를 위한 뉴스레터, 큐레터의 03월 26일 아티클이에요!
수년 전 네슬레 근무 당시, 일본 법인에서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분명 일본인 동료들과 함께하는 자리였는데, 어디선가 능숙한 한국어가 들려왔습니다. 처음에는 그 생경함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차유진이라는 이름의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죠.
당시 킷캣(KitKat) 사업부를 담당하던 그녀는 이미 조직 내에서 실력을 충분히 인정받으며, 상당히 넓은 영역의 실무를 아우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한국 사업까지 전방위로 지원하며 탄탄하게 입지를 다지고 있던 그녀였기에,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 국내 기업의 오세아니아 법인장이라는 도전을 선택했다는 소식은 꽤 의외의 결정으로 다가왔는데요.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과감하게 움직이게 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인터뷰를 통해 대화를 나누며 그 의문은 자연스레 풀렸습니다. 그녀의 행보는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습니다. 낯선 환경에서도 스스로의 한계를 규정짓지 않고 필사적으로 부딪히며, 본사의 정교한 전략을 현장의 거친 디테일과 조화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쏟아부은 시간의 결과였어요. 비즈니스의 실체를 직접 만들어가고자 묵묵히 견뎌온 고된 노력이 비로소 지금의 법인장이라는 모습으로 응집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현장에서 발로 뛰며 체득한 통찰은 곧 확고한 경영 철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녀는 이제 한식의 세계화가 단순히 '우리의 맛'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현지 소비자가 우리 제품을 그들의 식탁 위에서 마음껏 가지고 놀 수 있도록 '재해석할 권한'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하죠. 뚜렷한 방향성을 가지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개척해 온 차유진 법인장의 전략적인 통찰을 담담히 기록했습니다.
Q. 바이엘(Bayer)과 HP에서 재무 전문가로서 경력을 쌓으셨습니다. 시장의 변수가 많은 전략과 마케팅 분야로 직무를 확장하게 된 구체적인 계기가 무엇인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커리어 전환은 어떤 극적인 결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에요. 오히려 '임팩트'에 대한 호기심이 점진적으로 커진 결과였죠.
바이엘과 HP에서 재무를 담당하던 시절, 저는 제 자신을 단순히 '점수 기록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훌륭한 재무 팀은 단순한 관리자가 아니라 비즈니스의 진정한 '부조종사'라고 믿었거든요. 우리는 데이터를 통찰로 번역하고, 의사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방향을 제시하며, 리더들이 보이지 않는 위험과 기회를 내다볼 수 있도록 돕죠. 저는 이런 파트너십 역할을 아주 깊이 가치 있게 여겼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 안에 새로운 질문이 피어났어요.
"비즈니스를 가이드하는 걸 넘어, 내 손으로 직접 비즈니스를 만들어가는 기분은 어떨까?"
그 호기심은 저를 재무적인 렌즈를 넘어 비즈니스의 심장부 소비자의 선택, 시장의 흐름, 그리고 브랜드 내러티브가 살아 숨 쉬는 곳을 바라보게 만들었어요. 이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해 준 결정적인 순간은 놀랍게도 어머니로부터 왔어요. 제가 고위 임원들에게는 복잡한 재무적 결정들을 아주 잘 설명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께 제가 만드는 '임팩트'를 설명하려니 결코 쉽지가 않더라고요. 그때 저는 회사 밖의 평범한 사람들도 직접 느낄 수 있는 것, 즉 일상에 맞닿아 있는 실체가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건 결코 재무를 부정한 게 아니에요. 오히려 재무 분야에서 보낸 시간은 제게 가장 강력한 전략적 자산이 됐어요. 마케팅과 전략 분야로 넘어왔을 때, 저는 창의성을 통찰에 기반하게 하고, 비전을 숫자와 연결하며, 대담한 아이디어를 지속 가능한 성장으로 바꾸는 능력을 활용할 수 있었거든요.
재무는 저를 더 나은 전략가로 훈련시켜줬어요.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법, 당연하게 여겨지는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법, 그리고 높은 목표를 향하면서도 두 발은 현실에 단단히 딛고 있는 법을 가르쳐줬죠.
그래서 제 여정은 재무로부터의 '이탈'이 아니에요. 재무가 가능하게 해 준 모든 역량 위에 쌓아 올린, 아주 자연스러운 진화랍니다.
Q.네슬레 스위스 본사에서 그룹 전체의 글로벌 전략을 담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지역 법인으로 부임한 뒤, 본사 차원의 통합 전략이 현지 시장의 특수성 앞에서 예상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실질적인 사례가 있었나요?
스위스 본사에서 근무할 당시의 저는 글로벌 전략이 가진 효율성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었어요. 전 세계 어디서나 통용될 수 있는 정교한 전략적 가이드라인과 실행을 위한 툴킷을 개발하여 배포하는 게 제 업무였죠. 그때 현지 담당자들이 "우리 시장은 상황이 달라요"라고 항변하면, 솔직히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실행 의지가 부족한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답니다. 본사의 큰 그림이 늘 옳다고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일본 법인으로 건너가 킷캣 마케팅을 직접 실행하면서, 그들이 말한 '다름'의 진짜 의미를 뼈저리게 깨닫게 됐어요. 본사의 전략이 틀린 게 아니라, 현지의 복잡한 유통 구조나 아주 섬세한 소비자 취향 같은 '디테일'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전략이 결코 땅에 발을 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현장의 목소리는 단순한 핑계가 아니라, 전략을 성공시키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도 전략의 실행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제언이었던 거예요.
이 경험은 저에게 '균형'이라는 핵심 리더십 원칙을 깊이 심어주었습니다. 이제 저는 본사의 방향성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아요. 대신 본사의 큰 그림이 현지의 특수성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현지화의 든든한 배경이 될 수 있도록 세밀하게 조율하는 역할을 자처하죠.
그래서 저는 함께 일하는 인재들에게 본사와 현지 근무를 모두 경험해 보라고 꼭 권하곤 해요. 그래야만 책상 위의 전략적 사고와 거친 현장의 실행력을 동시에 갖춘, 입체적인 리더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거든요.

Q. 경영학 박사 학위라는 학술적 배경이 실전 리더십 현장에서는 때로 무거운 짐이나 제약이 되기도 합니다. 이론적인 완결성을 따지기보다 오직 비즈니스 적인 본능과 직관에만 의존해 승부수를 던져야 했던 순간은 없었나요?
흥미로운 질문이네요. 흔히들 학문과 실무가 서로 충돌한다고 생각하지만, 저에게 그 둘은 늘 한 몸으로 움직이는 '이인삼각' 같은 관계예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비유하자면 ‘비즈니스 감각이 어디로 갈지 결정하는 나침반이라면, 학문적 이론은 그 거친 망망대해를 건너게 해주는 견고한 함선’이라고 생각해요. 나침반만으로는 집어삼킬 듯한 파도를 이겨낼 수 없고, 아무리 거대한 함선이라도 나침반 없이는 표류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예를 들어, 제가 CJ푸드 오세아니아 법인장으로 부임해 가장 공들인 것은 단순한 영업 숫자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브랜드의 비전과 스토리를 현지에 제대로 심는 일이었어요. 제 직관은 당장의 매출보다 '신뢰라는 자본'을 먼저 쌓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죠. 하지만 이 직관을 조직원들과 파트너들에게 설득해 거대한 배를 움직이게 하려면, 단순한 느낌이 아닌 명확한 설계도가 필요했어요.
이때 거친 파도를 뚫고 나갈 항로의 지표가 되어준 것이 바로 '인지적 거리가 심리적 거리를 결정한다'는 경영학적 원리였어요. 쉽게 말해 낯선 상대에게는 마음의 문을 열기 어렵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통찰이죠. 우리 브랜드가 현지 소비자에게 낯선 이방인으로 머물러 있다면, 아무리 품질이 좋아도 그들의 일상으로 들어가는 항해를 시작할 수 없거든요.
저는 이 이론을 바탕으로 "Born in Korea, Made in Australia"라는 전략적 메시지를 설계했어요. '한국의 정통성'에 '현지의 신뢰'를 결합해 심리적 거리감을 좁힌 거죠. 덕분에 오세아니아라는 낯선 바다에서도 명성과 신뢰라는 항로를 빠르게 찾아낼 수 있었어요.
결국 저에게 이론은 제 야생적인 직관을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치환해 주는 가장 정교한 번역기예요. 이론이라는 든든한 배가 있었기에, 제 직관은 비로소 실질적인 전략이 되어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Q. 네슬레라는 견고한 시스템 안에서 커리어를 쌓아 오시다 CJ푸드 오세아니아의 경영을 맡게 되셨습니다. 브랜드의 무게감과 역할의 성격이 달라진 만큼, 부임 초기 90일 동안 마주했던 가장 실질적인 도전이나 고민은 무엇이었나요?
사실 저는 네슬레 시절부터 안정적인 관리자보다는 새로운 사업 모델을 세상에 내놓는 '사내 기업가' 역할을 즐겨왔어요. 그래서 CJ푸드 오세아니아에서 마주한 도전들도 저에게는 무척 흥미로운 과제였답니다. 당시 제가 내린 결론은, 우리 조직이 가진 독특한 '이중성'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성패를 가른다는 점이었어요.
CJ는 글로벌 무대에서는 거대한 자산과 시스템을 갖춘 기업이지만, 이곳 오세아니아 시장에서만큼은 철저한 '스타트업'의 자세가 필요했거든요. 본사의 인프라를 든든한 배경으로 삼되, 현장에서는 스타트업처럼 기민하게 움직여야만 했죠.
대신 저는 '줌 인, 줌 아웃' 전략을 택했어요. 전략을 짤 때는 경영자의 시각으로 시장을 넓게 조망하지만(Zoom-out), 실무에 병목 현상이 생기면 그 누구보다 깊게 파고들어 문제를 함께 해결했죠(Zoom-in).
이에 더해, 스타트업처럼 기민하게 움직이되 모두가 같은 방향을 향해 뛰도록 '전략 워크샵'을 진행했어요. 팀원 모두가 참가하는 전략 워크샵을 통해 함께 3년 후, 5년 후 우리가 어떤 회사가 되어 있을지 비전을 그리고, 그 단계에 다다르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 전략을 다 같이 만들었어요.
그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우리 모두 캡틴 쿡(Captain Cook, 호주 대륙을 발견하고 지도를 완성한 탐험가로, 불확실한 미래를 개척하는 정신의 상징)처럼 미지의 시장과 소비자를 탐구하고 새로운 비즈니스를 개척하는 탐험가가 되자'는 공감대랍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대기업의 체계'와 '스타트업의 속도'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었어요.

Q. 한국어와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까지 4개 국어를 구사하십니다. 하지만 리더로서의 영향력은 때로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무엇을 말하지 않느냐'에서 나오기도 하는데요. 여러 문화권을 거치며 리더가 경계해야 할 소통의 금기나 태도에 대해 배운 점이 있으신가요?
에린 마이어의 저서 <컬처 맵(The Culture Map)>을 보면, 커뮤니케이션 양식에 따라 세상은 '고맥락'과 '저맥락' 사회로 나뉘어요. 제 커리어는 바로 이 두 세계를 끊임없이 오가는 여정이었죠.
우선 한국과 일본은 대표적인 고맥락 사회예요. 여기서 리더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맥락 없는 직설'이랍니다. 한국의 '눈치'나 일본의 '공기'를 읽지 못한 채 사실 관계만 무심하게 던지는 건, 그 내용이 아무리 옳아도 상대에게 무례하거나 미숙한 소통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거든요.
프랑스도 흥미로워요. 서구권이지만 '뉘앙스'가 지배하는 고맥락 사회죠. 프랑스에서 지나치게 단순하고 건조한 화법은 자칫 세련미가 부족한 것으로 비치어, 오히려 리더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수 있어요.
반면, 호주는 한국, 일본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아주 전형적인 저맥락 사회예요. 이곳에서 가장 피해야 할 것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라'는 식의 모호한 표현이에요. 호주 동료들은 리더의 의중이 무엇인지 가감 없이 전달되는, 직관적이고 명확한 소통을 선호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한국과 일본, 프랑스에서는 '공기'를 읽는 데 집중하고, 호주에서는 '단어'를 고르는 데 온 힘을 쏟아요. 이것이 제가 4개 국어를 거치며 배운 진짜 언어, 바로 ‘침묵의 무게를 다루는 기술’이랍니다.
Q. 호주를 여성 리더로서 활동하기에 '신선한'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표현 이면에는 일본이나 스위스처럼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문화를 가진 이전 근무지에서, 리더로 인정받기 위해 본연의 모습과는 다른 '가면'을 써야 했던 경험이 투영되어 있는 것일까요?
우선 각 국가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스위스는 1971년에야 연방 여성 참정권이 인정됐고, 일부 주는 1990년에 이르러서야 여성이 투표할 수 있었을 만큼 보수적인 면이 있죠. 일본의 가부장적인 조직 문화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고요. 실제로 그곳들에서 일할 때는 동료 여성 리더를 만나는 것 자체가 정말 드문 일이었답니다.
당시 그 사회들은 여성 리더에게 '세련된 부드러움'을 일종의 미덕으로 요구하는 무언의 압박이 있었어요. 강한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분위기를 유연하게 만드는 윤활유 역할을 기대하곤 했죠. 그래서 저는 저만의 생존 방식으로 스스로 '잠수함'이 되기로 했어요.
예전 상사가 지어준 제 별명이기도 한데, 겉으로는 물 위에서 조용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물밑에서는 목표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기어코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뜻이에요. 리더로서 성과를 내기 위해 제 추진력을 수면 아래로 숨겨야만 했던 셈이죠.
제가 호주를 '신선하다'고 느낀 건, 더 이상 잠수함인 척 연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이곳은 정계와 재계는 물론 군에서도 여성 리더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활약하는 사회거든요. 여기서는 제가 가진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굳이 분리해서 보여줄 필요가 없죠. 제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도 온전히 리더로서 존중받는다는 느낌이 정말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Q. '모자이크 공동체'라는 철학은 이상적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조각들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부딪히며 갈등을 빚기 마련입니다. 호주에서 다양한 국적의 대내외 구성원들과 일하며, 모든 것을 하나로 녹여내는 기존의 '멜팅 팟' 방식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웠던 문화적 충돌이나 까다로운 사례가 있었나요?
사실 가장 큰 갈등은 외부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내부'의 고정관념에서 시작되곤 해요. 한국 식품 기업이다 보니 우리 팀원들 마음속엔 "한국의 맛이 정답"이라는 무의식적인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거든요. "이게 진짜 정통의 맛인데 왜 몰라주지?"라며 현지 반응에 답답함을 느끼는 식이었죠.
하지만 호주처럼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모자이크 사회에서 이런 일방통행은 결코 통하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직원들에게 늘 이렇게 말하곤 한답니다. "우리가 먼저 그들의 문화를 맛봐야, 그들도 비로소 우리 만두를 맛볼 마음이 생긴다"고요. 서로 다른 모양의 조각들이 정교하게 맞물려야 비로소 하나의 완성된 그림이 되는 모자이크처럼 말이에요.
얼마 전 저희 팀에 합류한 인도 출신 인턴과의 에피소드가 좋은 예가 될 것 같아요. 그 친구가 인도 음식을 싸 오면 저는 일부러 팀원들과 함께 도시락을 나눠 먹으며 질문을 던졌어요. 생소한 향신료와 매운맛에 대해 배우고 즐기는 시간을 가진 거죠. 우리가 먼저 그들의 문화에 호기심을 갖고 존중을 보일 때, 비로소 상대에게 우리 음식을 설명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가 생긴다는 걸 팀원들이 몸소 체험하길 바랐거든요.
모든 것을 하나로 녹여 개별적인 색깔을 없애 버리는 '용광로(Melting Pot)' 방식이었다면 그 인턴의 고유함은 사라졌을 거예요. 하지만 모자이크 방식이었기에, 우리는 그 친구의 색깔을 통해 우리 시장을 더 넓게 바라보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답니다. 결국 '다름'은 부딪혀야 할 모서리가 아니라, 우리라는 그림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소중한 조각인 셈이죠.

Q. '다시다'나 '비비고'처럼 한국을 상징하는 헤리티지 브랜드를 운영하다 보면 '국가대표'라는 자부심이 때로는 냉정한 비즈니스 판단을 방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국민적인 사랑을 받지만, 글로벌 시장의 생리에는 맞지 않는 제품을 과감히 보류하거나 전략을 전면 수정해야 했던 순간이 있었나요?
저는 '한국의 식문화'와 '현지 소비자의 니즈' 사이에서 가장 완벽한 교집합을 찾는 데 모든 전략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어요. 자부심에 매몰되기보다, 우리 문화가 현지 맥락에서 어떻게 기능할지를 냉정하게 따져보는 과정이 꼭 필요하거든요.
예를 들어, 호주가 다문화 사회라는 점을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했어요. 이곳은 중국계 이민자들의 영향으로 이미 딤섬이나 교자 형태의 음식에 무척 익숙하거든요. 그래서 생소한 메뉴를 무작정 밀어붙이기보다, 그들에게 친숙한 제형인 '만두'를 첫 번째 주자로 내세웠죠. 현지의 신선한 재료와 조리의 편의성을 강조해 진입 장벽을 낮추는 전략을 택한 거예요. 김치 역시 단순히 '전통의 맛'이라고만 내세우지 않았어요. 대신 최근 호주 소비자들이 가장 열광하는 키워드인 '장 건강'과 '웰빙'으로 접근했더니 반응이 훨씬 뜨거웠답니다.
반면, '냉동 김밥' 같은 제품은 현지인들에게 아직 생소한 카테고리일 수 있어요.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조급함 때문에 성급히 '실패'라고 결론짓지 않는 거예요. 낯선 문화가 현지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시간을 충분히 주는 거죠.
저는 단기적인 매출에 일희일비하며 제품을 쉽게 포기하기보다, 시장에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던지고 그 반응을 배우며 '문화적 저변'을 넓히는 긴 호흡의 승부를 하려고 해요. 결국 비즈니스의 성공은 현지인의 삶 속에 우리 문화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녹아드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으니까요.

Q. 호주 소비자들은 식문화에 있어 매우 개방적이고 모험적인 성향을 보입니다. 혹시 한국의 전통적인 조리법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제품을 즐기는 현지인들을 보며, 기존의 현지화 전략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게 만들었던 결정적인 장면이 있었나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한 호주 인플루언서의 영상을 봤을 때였어요. 그분이 우리의 미니 물만두를 바삭하게 구워 샌드위치 빵 사이에 가득 채워 넣더니, 호주식 아침 식사인 '브레키 샌드위치'로 만들어 드시더라고요!
한국인인 저에게 물만두는 국에 넣거나 간장에 찍어 먹는 촉촉한 음식이지, 토스트 사이에 들어가는 속재료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처음엔 당황했지만 곧 무릎을 쳤죠. 그분들은 물만두를 토스트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한입 크기의 고단백 토핑'으로 재해석한 것이었으니까요. 호주인들에게 중요한 건 한국의 전통 조리법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적인 식사 문화에 얼마나 간편하고 맛있게 녹아드느냐였던 거죠.
이 경험은 저에게 정말 큰 교훈을 주었답니다. 진정한 현지화란 우리가 먹는 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요. 오히려 소비자가 우리 제품을 그들의 식탁 위에서 마음껏 가지고 놀 수 있도록 '재해석할 권한'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 핵심이었죠.
만두가 샌드위치가 되든 샐러드 토핑이 되든, 소비자가 즐겁다면 그것이 곧 정답이라고 생각해요. 결국 우리의 역할은 정해진 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제품이 현지인의 삶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도록 무대를 열어주는 것이니까요.

Q. 울워스(Woolworths)나 콴타스(Qantas) 같은 호주 대형 리테일러 및 기업들과 파트너십을 맺는 과정에서, 초기 입점 제안이 거절되거나 시장성에 대한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던 구체적인 사례가 있었나요? 또한, 그런 비즈니스적 난관을 어떤 전략으로 극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현지 대형 리테일 바이어들과의 첫 만남은 꽤 높은 벽이었어요. 당시 그들이 준 피드백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차가운 반응이었죠. 호주 시장에 진입하기에는 현지 소비자들이 한국 음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되었다는 냉정한 판단이었고, 우리 제품의 시장성에 대한 의구심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어 참 막막했답니다.
하지만 저는 이를 단순한 거절로 여기기보다, 그들을 설득할 확실한 근거가 아직 부족하다는 신호로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두 번째 미팅에서는 감성과 이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전략을 완전히 새로 짰죠.
이러한 다각적인 노력 덕분에 바이어는 의구심을 거두고 우리를 진정한 파트너로 인정하게 됐어요. 재미있게도 지금은 한류가 대중화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역전됐죠. 이제는 바이어들이 먼저 한국 식품을 찾고 제안하는 상황이 됐거든요. 초기의 어려움을 정공법으로 돌파해 신뢰를 쌓은 덕분에, 이제 우리는 단순한 공급자가 아닌 시장을 함께 키워 나가는 든든한 파트너로 자리 잡았습니다.
Q. 연구자 출신 경영자로서 데이터를 매우 중시하시지만, 데이터는 결국 과거의 기록이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세아니아 식문화의 미래를 예측하고 결정해야 하는 순간, 차가운 숫자와 리더로서의 뜨거운 직관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으시나요?
사실 저에게 식품 산업의 미래를 완벽하게 꿰뚫어 보는 신적인 예지력 같은 건 없어요. 다만 저는 '직관'을 조금 다르게 정의한답니다. 직관은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르는 타고난 감각이 아니라, 수많은 데이터와 현장 경험이 쌓여 만들어지는 '패턴 인식 능력'이자 숫자 사이의 맥락을 읽어내는 '해석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여러 국가에 거주하며 다양한 식문화를 겪다 보니, 우리 제품을 한국인의 시각이 아닌 철저한 '외부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훈련이 자연스럽게 됐죠. 데이터를 결코 무시하지 않되, 제 경험이라는 필터를 통해 숫자가 직접 말해주지 않는 소비자의 세밀한 라이프스타일을 읽어내려 노력한답니다.
이 직관이 발휘된 실질적인 사례가 바로 호주에서의 '김치 마케팅'이었어요. 한국의 상식대로라면 당연히 '깊게 발효된 맛'을 강조했겠지만, 저는 현지 소비자들이 김치를 밥반찬이 아닌 '샐러드처럼' 즐기는 모습에 주목했습니다.
여기서 제 직관이 발동했어요. 이들에게는 푹 익은 신맛보다 '아삭한 식감이 살아있는 신선함'이 훨씬 강력한 소구 포인트가 되겠다고 판단했죠. 그래서 우리는 과감하게 'Fresh'를 핵심 메시지로 잡았습니다. 동시에 현지인들이 김치의 영양학적 가치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는 점을 포착해, 저명한 현지 과학자의 인터뷰를 빌려 특정 유산균의 효능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며 신뢰를 더했고요.
결국 저에게 데이터와 직관은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에요. 직관(샐러드 같은 아삭함)으로 방향을 잡고, 과학(유산균 데이터)으로 확신을 주는 하나의 연결된 프로세스인 셈이죠. 직관이 나침반이라면 데이터는 지도와 같아서, 이 두 가지가 함께할 때 비로소 미래를 향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항해를 할 수 있답니다.

Q. 고베, 브베, 서울, 그리고 시드니까지. 쉼 없는 이동과 도전은 이력을 만들어주었지만, 한 개인으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 감내해야 했던 가장 큰 개인적인 희생이나 결단은 무엇이었나요?
가장 마음 아픈 부분은 역시 가족과 함께 충분히 보내지 못했던 시간들이에요.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전문가라는 타이틀은 겉보기엔 근사할지 모르지만, 그 이면에는 가족들의 엄청난 인내와 배려가 켜켜이 쌓여 있거든요.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시절, 저는 가족들에게 늘 미안한 '시간 도둑'이었답니다. 가족들과 휴가를 가서도 저는 늘 구석에서 노트북을 켜고 논문을 리뷰해야 했고, 심지어 심한 입덧을 참아가며 학술대회에 보낼 원고를 쓰기도 했죠. 본인 역시 대기업의 재무 담당 리더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남편은, 그 힘든 시간 동안 한 살 배기 딸을 묵묵히 돌봐줬어요.
제 논문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주셨던 은퇴한 직장 상사분들도 깊이 기억에 남아요. 현직에서 물러나셨음에도 수십 년간 쌓아온 경영의 지혜를 아낌없이 나눠주셨거든요. 그분들의 통찰은 단순히 논문의 소재를 넘어, 현재 제가 조직을 이끄는 데 필요한 '살아있는 지침서'가 되어주고 있답니다.
결국 제 커리어의 성취는 결코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에요. 박사 학위라는 결실도 저를 아껴주신 분들의 지혜와 경험으로 채워진 셈이죠. 이처럼 저의 성취는 주변들의 희생과 배려라는 토양 위에서 비로소 꽃 피울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Q. 한식이 파스타처럼 전 세계인의 일상식이 되기를 꿈꾸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파스타의 대중화 과정을 보면 본래의 모습이 단순화되거나 변형된 측면도 분명 존재하는데요. 글로벌 일상식으로 자리 잡기 위해 한식 고유의 정통성이 옅어지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것을 '변형'이 아닌 '문화적 진화'라고 부르고 싶어요. 우리가 벤치마킹하는 파스타의 역사만 봐도 그 답이 명확해지거든요.
사실 오늘날 전 세계 어디서나 사랑받는 '미트볼 스파게티'는 이탈리아 본토 음식이 아니랍니다. 19세기말 미국으로 건너간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현지의 풍부한 육류를 활용해 탄생시킨 '이탈로-아메리칸' 식문화의 결정체죠. 정통을 고수하는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생소한 조합이었겠지만, 이 과감한 '변주' 덕분에 파스타는 특정 민족의 음식을 넘어 인류의 일상식이 될 수 있었어요.
우리 한식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빨간 고춧가루 김치'를 불변의 전통이라 믿지만, 사실 이건 17세기 전후 고추가 유입된 이후에 생겨난 혁신적인 변화였답니다. 그전까지 수천 년 동안 우리 조상들이 먹던 김치는 고추가 들어가지 않은 백김치나 동치미 형태였죠. 즉, 우리가 지금 '정통'이라 부르는 것도 사실 당대의 외래 식재료를 수용한 파격적인 퓨전의 결과물인 셈이에요.
음식은 박물관에 박제된 유물이 아니에요. 살아있는 사람들의 입맛과 라이프스타일 속에서 끊임없이 변주돼야 강력한 생명력을 유지하죠.
호주의 아보카도 토스트에 김치가 올라가고, 만두가 샌드위치의 속재료가 되는 것을 저는 기쁘게 환영해요. 한식이 글로벌 식탁에서 현지의 재료와 자유롭게 섞이는 과정은 정체성을 잃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전 세계인의 일상 속에 더 깊고 강한 뿌리를 내리는 위대한 여정이라고 확신해요.

Q. 언젠가 오세아니아에서의 여정을 마치시는 날, 재무제표의 숫자나 화려한 성과 지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조직의 DNA 속에 깊이 새겨두고 싶은 차유진님만의 '레거시'는 무엇인가요?
제가 이곳을 떠날 때 남기고 싶은 단 하나의 유산은 재무제표에 적힌 숫자가 아니에요. 대신 우리 구성원들이 스스로의 한계를 깨고 그 지평을 넓혀본 경험, 즉 확장된 자신감을 꼭 남겨주고 싶어요.
사실 CJ는 이미 세계적인 대기업이지만, 지난 몇 년간 오세아니아에서 우리는 마치 스타트업처럼 정말 숨 가쁘게 달려왔거든요. 아주 작은 팀으로 시작해 공장 운영을 궤도에 올리고 거친 현지 시장을 하나씩 개척해 나갔죠. 이 치열한 과정 속에서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구성원이 각자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함께 성장했다고 믿어요.
훗날 공식 보고서에는 기록되지 않겠지만, 저는 우리 조직의 DNA에 3가지 정신이 선명하게 남아 있기를 바라요. 첫째는 가보지 않은 길을 두려워하지 않는 프런티어 정신이고, 둘째는 최고가 아니라면 최초가 되겠다는 도전 의식이며, 마지막은 오직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가치를 만들자는 단단한 자부심이에요.
저는 먼 훗날 직원들이 저를 단순히 매출을 많이 올린 법인장으로 기억하기보다 "그분 덕분에 내가 더 큰 일을 꿈꿀 수 있게 됐고, 우리가 함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지"라고 회상해 주길 원해요. 그 과정에서 얻은 뜨거운 자신감이야말로 제가 이 조직에 남길 수 있는 가장 값진 자산이라고 확신하거든요.
※ 오늘의 큐터뷰는 조인후 작가님이 작성하고, 큐레터가 편집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