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이 아닌 '18을 통한' 희생과 애도의 메시지

미키 17이 아닌 '18을 통한' 희생과 애도의 메시지

작성자 포도씨네

강포도의 영화 평론

미키 17이 아닌 '18을 통한' 희생과 애도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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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do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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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이 개봉한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당연하게도 영화에 대한 평이 이리저리 갈리고, 관객 수를 얼마나 유치했는지에 대한 분석과 전망이 줄짓고 있다. 홍수정 평론가가 “탁월한 이야기꾼이 몰려드는 관중 앞에서 점점 더 몸에 힘을 주는 모습을 볼 때 안타까움을 느낀다”라고 했는데,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는 대목이다.

 <미키 17>은 행성을 테라포밍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실험 쥐”처럼, 먼저 우주 밖으로, 행성 밖으로 나가 죽는 것이 임무인 ‘미키(로버트 패틴슨)’를 두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미키는 ‘익스펜더블’이라는 직책을 맡고 각종 생체 실험, 일종의 “고기 방패”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미키 17> 스틸컷

봉준호의 <미키 17>은 그런 미키의 직업으로부터 다양한 철학적 질문을 끌어낸다. 아무리 미키가 지구에서 큰 빚을 지고서 도망을 다니는 신세라도, 익스펜더블 임무를 미키가 자원한 것이라도 그 반복되는 죽음과 복제의 과정이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 경제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까?

미키의 죽음은 매우 자연스럽고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미키가 죽으면 죽을수록 테라포밍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더욱 커진다. 인류의 새로운 정착을 위해서 미키의 죽음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인류의 정착과 미키의 죽음은 자연스레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다. 미키가 죽어야, 인류가 산다. 그렇다고 미키가 죽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살아나기 때문이겠다.

그렇지만 의문이다. 미키의 기억을 드라이브에 저장하고, 육체만 다시 재생성한 뒤에 새로운 몸에 기억을 덧입힌다면 그것은 ‘미키 1’이라고 불리는 원형과 같다고 할 수 있을지 말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기억을 주입 당하고 새롭게 몸이 기계로부터 제면기 면 뽑히듯 뽑힌 내가 있다면, 그것은 정말 나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지구에 살던 시절 미키의 동업자였던 ‘티모(스티븐 연)’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티모는 지구에서 “마카롱이 햄버거를 넘어설 만큼 대박 날 사업 아이템”이라는 헛된 희망으로 미키와 사업을 펼쳤다가 단단히 망한다. 사업을 위해 졌던 빚은 수습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였다. 잔인하기로 악명 높은 빚쟁이 ‘다리우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미키와 함께 우주로 도망치지만 결국 다리우스의 부하에게 덜미를 잡힌다. 그러자 티모는 미키에게 간청하기에 이른다. “너는 죽어도 다시 살아날 목숨이니, 다리우스가 건넨 ‘잔인한 제안’을 도와달라”는 것이다. 지키지 못하면 티모는 죽은 목숨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한 번 의문을 가지게 된다. 어차피 살아날 목숨이라면 남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 그럴 수 있대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키의 죽음은 매우 가벼운 것이 된다. <미키 17>이 보여주는 아이러니다. 죽어야 하는 일을 맡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덕에 계속해서 다시 복제될 힘을 가졌기 때문에 남을 돕는 데에 자기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지에 대한 딜레마까지 얻어야 한다.

현실에서는 어떠한가.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역사에서 여러 희생과 참사를 목격했다. 최근 몇 년 간의 일을 보자면 세월호 참사에서부터 이태원 참사, 화성 아리셀 공장의 대형 화재 참사, 그리고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대부분 안전불감증과 행정의 빈틈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었다. 우리는 참사들을 계기로 미흡했던 구석을 고쳐볼 기회를 얻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앞으로의 일을 방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외양간을 고치는 계기가 됐던 그 희생자들의 죽음에 관한 가치를 논해야 한다.

미키는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특징이 있지만 현실에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은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작 중 미키의 생명과 존엄성은 그렇다 해도 훼손될 수 없듯, 우리와 함께 살아가던 이들의 희생은 아주 참담하고 슬픈 일이다. 그런 이들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희생의 뒷일은 얼마나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될 일인가. 바로 그 부분에서 애도와 반성을 통한 진보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드러나게 된다.

<미키 17> 스틸컷

<미키 17>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애도하는 자’의 유무에도 있다. 그래서 영화에서 계속해서 ‘죽는’ 인물은 누구인가. 미키가 있다. 그리고 영화 초반부에 사고로 목숨을 잃는 ‘제니퍼’가 있다. 재미있는 점은 미키와 제니퍼 모두에게 연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연인이 있다는 점이 재미있는 게 아니라, 죽어버렸거나 죽어야만 하는 이들에게 연인이 있다는 것은 그들의 죽음에 깊이 아파하고 슬퍼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으로 연결된다. 즉, 애도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미키 17>에는 죽음에 슬퍼하는 이들이 많이 없다는 점이 독특하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사실 그 정도는 아니다) 미키에게 “죽는 것은 어떤 기분이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죽음을 단순히 무용담 건너 듣듯 대하는 태도들이 인상적이다. 진정으로 미키의 죽음에 아파하고 공감하고, 제니퍼의 사고에 슬퍼하는 이들은 그들의 연인인 ‘나샤(나오미 애키)’와 ‘카이(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가 있다. 영화 중반부에서 카이 또한 미키에게 ‘죽는 기분’을 묻거나 미키를 성적으로 대하는 부분에서 그 사실이 살짝 뒤틀리긴 하지만, 카이의 제니퍼를 향한 애도는 어쨌든 가 닿는 지점이 있다.

그리고 외계생명체 ‘크리퍼’가 있다. 크리퍼 종족은 한 개체만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모두가 서식지 밖으로 나와 자신들 모두를 희생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서로를 지키고 기억하고 잃지 않으려는 간절함이 묻어나오는 몇 안 되는 상징물이다.

이렇게 <미키 17>에는 죽는 이들과 그것으로 인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슬퍼하는, 애도할 줄 아는 인물들이 존재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애도할 줄 아는 존재들이 영화 종반부에서 인류와 크리퍼 간의 갈등 상황에서 중재 역할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우주선 내의 위계질서를 지배하고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이 종반부에서는 무력함도 모자라 사실상 전무한 존재감을 띠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미키 17>의 핵심으로 생각하는 ‘미키 18’이 있다. 미키 18은 주인공인 미키의 그다음 복제체면서도 17번뿐 아니라 그 전의 모든 미키들이 겪은 죽음에 대한 부당함에 대해 분노한다. 미키 17은 어수룩하고 둔한 성격에 이전 개체에 대한 애도나 깊은 공감이 부족할 수 있었겠지만 미키 18은 그들에게 공감하고 분노한다는 점이 상징적이다. 그렇기에 미키 18이 영화 종반부에서 미키 17을 살려둔 채로 자신이 자폭하기를 결심했을 것이다. 미키 18이 살아남아 미키 17이 제거되고 계속해서 미키가 복제 실험체로서 남게 된다면, 인류에게는 미래를 향한 진보가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미키 19, 즉 미래를 향한 진보가 아니다. 미키 17, 과거의 죽음과 희생에 다시 한번 주목한다는 것이다.

<미키 17> 스틸컷

그리하여 <미키 17>은 죽음과 애도에 대한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외계생명체인 크리퍼에게도 다른 개체를 동정하고 박애하는 마음이 깃들었듯, 인류에게도 그것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많은 관객이 미키의 실험 쥐 같은 모습에 측은지심을 느꼈겠다고 생각한다. 인간 또한 타인을 동정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가 단순히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봉 감독이 인류 전체에게 동정과 연민 그리고 애도에 대한 감정을 제고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을 것이라 짐작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영화가 흔치 않은 해피엔딩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처럼 애도하고, 반성하면서 희생된 이들에 대한 기림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이 가득한 세상이라면 우리 인류에게도 희망이 있을 것이라는 감독의 작은 바람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미키 17>은 단순 미키 17에만 관심이 쏟아지는 원맨쇼 작품이 아니라, 미키 18에도 마찬가지로 주목해야만 하는 작품일 것이다. 미키 18이 영화 종반부에서 해낸 결단, 그리고 그 결단 속에 숨은 의미와 상징을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상업과 예술 그 사이 언저리에 서서 자신만의 철학과 해학을 담아낸 봉 감독의 그 행보를 응원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