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계엄 시리즈 📢 9~10번째 계엄 (4·19 혁명) - (2)

대한민국 계엄 시리즈 📢 9~10번째 계엄 (4·19 혁명) - (2)

작성자 팜팜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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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계엄 시리즈 📢 9~10번째 계엄 (4·19 혁명)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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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니커 여러분! 저번 시간에 이어서 4·19 혁명 시기에 발생했던 계엄에 대해 마저 알아보도록 해요. 저번에 다뤘던 내용은 다음과 같아요. (이전 글이 궁금하다면? 👉 보러 가기)

그치만~ 분명 학교에서 4대 대통령은 윤보선 대통령이라고 배웠을 텐데 말이죵,,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출처=MS TODAY 박지영 기자

✊ 부정선거 규탄한다 - 3·15 마산 의거

1960년 3월 15일에 치러진 4대 대선 및 5대 부선은 4할 사전투표, 대리투표, 민주당 참관인 방해 등 다양한 부정행위를 동반했어요. 선거 결과 이승만은 단독 후보로 대통령에, 이기붕은 득표율 79%로 부통령에 당선됐죠.

출처=https://ko.wikipedia.org/wiki/3%C2%B715_%EB%B6%80%EC%A0%95%EC%84%A0%EA%B1%B0
출처=https://ko.wikipedia.org/wiki/3%C2%B715_%EB%B6%80%EC%A0%95%EC%84%A0%EA%B1%B0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아니 많이요. 직전 부통령 선거에서 장면 후보가 이기붕 후보보다 더 많은 표를 받았고, 이후에 자유당(이승만이 속한 당)에 대한 민심은 나락으로 떨어지기만 했는데 이기붕이 79%나 되는 표를 얻었다? 이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죠. 전국 각지에서 시민들이 불만을 나타냈고, 특히 마산에서 가장 강렬한 시위가 발생했어요. (애초에 민주당 마산시당은 오전 10시 30분부터 부정 선거로 인한 선거 포기를 선언했으니까 말이죠. 민주당 경남도당보다 3시간, 민주당 중앙 당사보다 6시간이나 빠른 시간이에요.) 왜 하필 마산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대표적으로 다음 세 가지를 이유로 꼽아요:

  • ✊🔥 노동운동 엘리트: 마산은 식민지 시기부터 노동 운동을 했고, 1950년대에도 일본 무역 중단 여파로 인한 경제적인 피해가 컸기 때문에 부두 노조 결성 등 노동 운동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어요.

  • 🏫 엄~~청 많은 학교: 1960년 마산에는 7개의 고등학교가 있었어요. 인구 대비 학교 수가 많아서 다른 지역에서 마산으로 등교하는 학생들도 많았죠. 고등교육을 배운 수많은 학생들은 민주주의와 괴리된 현실에 불만이 많았어요.

  • 🫱💵🫲 돈으로 산 정치인: 한 자유당 의원이 마산에서 입지가 큰 회사의 운영권을 대가로 민주당의 의원을 끌어들였어요. 이거 완전 정경유착 아닌가요?

결국 오후 2시경, 민주당 마산시당 당사 앞에 모인 시민들이 "3·15 부정선거를 규탄한다!"라는 구호를 외쳤고,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그 숫자는 1,500여 명에 이르게 되었어요.

출처=https://www.hmap.co.kr/post/view.php?no=6793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는 마산 시민. 출처=https://archives.kdemo.or.kr/contents/view/16

경찰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이들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상부에 전달했을까요? 아니죠. 경찰은 시위대를 강제 진압했어요. 이 과정에서 부상자 발생은 물론이고 민주당 간부가 연행되는 일도 발생했어요.

시위를 위해 모인 시민들의 숫자는 어느덧 5천여 명이 모였고 변변찮은 무기가 없었던 이들은 돌멩이라도 주워서 파출소, 자유당 마산시당으로 달려가 던졌어요.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위협을 막으며 말이죠. 그런데 저녁 8시부터는 경찰들이 진압의 수준을 넘어 사격을 이어가기 시작했어요. 이 과정에서 학생이 쓰러지는 사건도 발생했죠. 이미 인파는 1만여 명에 이르렀어요. 이들은 경찰이 시위대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불이 켜진 건물을 향해 불을 꺼달라고 소리쳤고, 깜깜하게 변한 도시에서 시위대들은 부정 선거와 관련이 있는 건물들을 마구 습격했어요.

시위하는 학생들을 강제로 진압하는 경찰들. 출처=https://archives.kdemo.or.kr/contents/view/16

개표가 진행되던 시청 부근의 무학국민학교에도 시민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시청을 향해 전진했어요. 그런데 그 순간! 대기하던 소방차가 전봇대를 들이박았어요. 일순간은 정전이 되어 암흑으로 변했죠. 그리고 소방차는 군중들을 향해 헤드라이트를 강하게 비추었어요. 경찰들은 시위대를 볼 수 있었고 시위대는 경찰을 볼 수 없었죠. 경찰은 사방으로 실탄 사격을 시작했어요. 4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총상을 입은 비극적인 사건이에요. 새벽이 되자 시위대는 절반 이상으로 줄어들었고 이후에도 계속 경찰에 체포당하며 3·15 마산 의거는 끝이 났어요.

아무쪼록 시위가 진압되고 한 달 정도, 물론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별다른 일이 없이 시간만 째깍째깍 흘러갔어요. 그러던 4월 11일 세상을 뒤흔들 사건이 발생합니다.

🩸 물 위로 떠오른 15살 소년, 김주열

대략 한 달이 지난 1960년 4월 11일, 한 소년이 꼿꼿하게 선 자세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장면이 포착돼요. 바로 3·15 마산 의거에 참여했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희생된 김주열 열사예요. 그는 마산상고 시험에 막 입학한 상태였을 정도로 아주 어렸죠.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1960년 4월 12일 최초로 보도한 고 김주열 열사 사진. 출처=https://www.ohmynews.com/NWS_

시신의 상태는 아주 참혹했어요. 눈 부위에 알루미늄 탄피의 최루탄이 박혀있는 상태였어요. 시위 진압 후 김주열의 시체를 발견했던 경찰은 이를 덮기 위해 마산 앞바다에 유기했던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죠. 이 소식을 들은 마산 시민들이 "죽은 내 자식을 내놓아라", "협잡선거 불법"과 같은 구호를 내걸면서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제2차 마산 의거가 시작된 거예요.

🎓 사회의 엘리트, 대학생들이 나서다

3·15 부정 선거 당시 시위에 나섰던 이들은 대부분 고등학생이었어요. 대학생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죠. 왜냐면 당시 대학은 4월에 개강했기 때문에 아직 방학 중이던 3월에는 전국에 흩어져 있던 대학생들을 모으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지금처럼 카톡이 있던 것도 아니고 ktx가 있던 것도 아니니 말이죠.) 그렇지만 대학생들이 모일 수만 있다면 이들은 고등학생과 달리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올 수 있었어요. 우선은 숫자가 많았는데:

  • 🎓🔥 폭발하는 교육열: 해방 이후 각종 전문대학 설립과 함께 대학생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어요. 전문학교 이상의 고등교육기관의 학생 수가 해방 당시 8천여 명에 불과했던 반면, 1950년대 후반이 되어서는 무려 10만 명에 달했죠.

  • 🪖🫩 징집은 쫌,,,: 전쟁 중에 대학생들의 징집이 연기되었는데 휴전 후에도 이것이 한동안 유효하면서 대학교 진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동기가 되었어요.

그럼에도 이들은 여전히 소수였어요. 현재 대한민국의 대학 진학률은 거의 75%에 달하는 것과 달리 당시는 10% 정도밖에 되지 않았죠. 폐허가 되어버린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이들 대학생에게 거는 기대가 컸어요. 대학생 스스로도 사명감을 가졌던 것은 물론이구요. 이런 와중에 4월 11일, 이미 대학생들이 학교에 모였던 시기에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었어요.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요? 대표적으로 고려대학교 학생처는 신입생 환영회를 연기하면서까지 시위를 하기로 했어요. 바로 4·18고려대학생시위의 시작이죠.

정문 앞에서 누운 채 4.18기념 시위하는 고려대 학생들. 출처=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711278

그런데! 시위가 끝나고 귀교 중인 학생들이 웬 폭력배들에게 습격을 당해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어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시간은 당일 오후 2시 30분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단 단장과 훈련부장이 단원 집결을 명하고 5시쯤 종로4가 근처에서 매복했어요. 학생들을 습격하라는 사주와 함께요. 오후 7시 20분쯤 학생들이 을지로4가를 지나 종로4가로 접어들 때쯤, 대한반공청년단 동부특별단 부단장 유지광이 이끄는 정치깡패 60~70명이 일제히 흉기를 들고 나타나 시위대를 마구잡이로 폭행했어요. 무려 50여 명에 달하는 고려대생들이 부상을 입었죠.

정치깡패의 급습으로 쓰러져 있는 고려대학교 학생들. 출처=https://dict.kdemo.or.kr/entry/multimedia/photo/A-169/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시위대 중 일부는 "헤럴드트리뷴(Herald Tribune)",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 등 외신 기자들과 다음날 새벽까지 남아 기자회견을 가지기도 했어요. 이 소식은 다음날 아침, 그러니까 4월 19일(!)에 조선일보 3면에 대대적으로 보도됐어요. 어째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 것 같네요. 권력자에 대항하는 시위가 생기고 👉 무력 진압하고 👉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고 👉 민심이 들불처럼 일어나 다시 더 큰 시위가 발생하고,,,

✊🔥 더는 참을 수 없다, 4·19 혁명

4월 19일에 발생한 4·19 혁명, 숫자부터 약 3만여 명에 달했어요. 대학생, 고등학생 가릴 거 없이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수천 명이 경무대(이승만의 집무실 겸 관저)로 몰려들었어요. 서울뿐만이 아니죠. 부산, 광주, 인천, 목포 등 전국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혁명, 서울만 하더라도 이날 하루에 130여 명이 죽고, 1천여 명 이상이 다쳤어요.

4.19혁명 당시 서울시청 부근으로 모이고 있는 시민들. 출처=https://dict.kdemo.or.kr/entry/multimedia/photo/A-309/

상황이 심각해지자 내무부장관 홍진기는 계엄령 선포를 건의했고, 국방부장관 김정렬이 이에 동의했어요. 최종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승낙으로 오후 2시 30분에 서울 지역에 "경비계엄"을 선포했죠. (발포는 1시에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계엄을 오후 1시로 소급 적용했어요.)

4·19 혁명에 참여한 학생들. 출처=https://www.wbcb.co.kr/news/articleView.html?idxno=70237

용어 정리를 먼저 해야겠죠. 우리나라의 계엄법을 볼까요?

경비계엄은 비상계엄에 비해 규모가 작아요. 비상계엄이 전쟁, 내란, 전국적 폭동 등 국가의 존립 위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면, 경비계엄은 단순 폭동이나 소요 사태 등 치안 혼란을 진압하거나 예방하기 위해 선포하죠. 따라서 경찰이 중심이고 군대는 보조적인 역할만 해요. 집회와 시위의 제한, 언론의 검열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범위는 제한적이에요.

서울 지역에 선포된 경비계엄. 그렇다면 이것으로 시위의 열기가 잡혔을까요? 오히려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갔어요. 이를 막기 위해 4시 30분쯤 해당 지역에도 경비계엄을 추가로 선포했고, 그래도 잡히지 않자 오후 5시부터는 비상계엄으로 변경했어요. 이미 잘 아시겠지만 비상계엄은 군이 직접 치안, 행정, 사법을 장악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형태의 계엄이에요. 대표적으로는, 군사법원이 민간인을 재판할 수 있고, 국회의 활동 제한도 가능하고, 언론·출판·집회·통신의 전면적인 통제가 가능해요. 군이 국가 통치의 주체가 되는 완전한 비상통치 체제죠. (맨 첫 번째 사진에 보면, 4월 19일 당일에 두 번의 계엄이 선포됐다고 나오는데 경비계엄, 그리고 비상계엄 이렇게 두 종류의 계엄이 나왔기 때문이에요.)

국방부장관 김정렬은 국군 제15사단을 동원하기 위해 유엔군부사령관 에머슨 커밍스와 상의했어요. 그는 제15사단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해제했지만 "어떤 수용 가능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시민들에게 발포해서는 안 된다"라고 발언했어요.

4·19 혁명에 참여한 학생들. 출처=https://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10257

그치만,,, 경찰은 실탄을 무차별적으로 발사했고 전국적으로 대략 12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해요.

🎙️ 나는 하야하겠소

이후에도 시위는 꾸준히 이어졌어요. 중요한 사건으로 4·25대학교수단시위를 꼽을 수 있겠네요. 전국 대학이 대규모로 휴교를 하고 교수들이 나서서 "살인정권 물러나라"는 성명을 발표했어요. 대표적으로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교수들이 공동으로 시국선언을 진행했죠. 시민들은 야간통행금지에도 흩어지지 않고 남아 시위를 계속 이어갔어요. 계엄군은 물론 최루탄을 여기저기 쏘아댔구요. 이승만 정부는 비상계엄을 유지하고, 검열을 더욱 강화하고, 학생들도 더 체포했지만 민심은 악화되기만 했어요. 심지어 군 내부에서도 진압 과잉이라는 불만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말 다 했죠 뭐.

4·25 교수단 시위. 출처=https://419.kdemo.or.kr/sub/m03_06/

사태를 되돌릴 수 없음은 명확해졌어요. 다음날에도 이어진 시위에 이번에는 미국이 직접 개입하게 됐어요. 주한미국대사는 아침에 김정렬 국방부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재선거 문제를 논의할 것을 권고했어요. 계엄사령관이 이승만에게 시위 대표자들과 면담을 부탁하고 이승만은 이를 수락했죠. 결국 5명이 이승만과 직접 면담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 자리에서 대통령직에서 하야할 것을 건의했고, 이승만은 국민이 나가라면 나가겠다고 응답했어요.

결국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이 라디오로 "나는 하야하겠소"라고 발표했어요. 참으로 긴 기다림이었네요. 4월에 전국에서 발생했던 혁명에서 총 186명이 사망했고, 6026명이 부상을 당했고, 수만 명이 경찰에 연행됐어요. 이제 이승만의 시대는 끝났어요.

🧹 수습, 그리고 다시 살아나는 불씨

4월 27일, 다음날이 되자 당시 외무부 장관이자 수석 국무위원이었던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 과도정부를 이끌었어요. 질서 회복과 선거 관리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혁명 직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정부 수립 준비를 담당했어요. 그다음 날에는 자유당 부통령 후보였던 이기붕 일가가 경무대 별관에서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민심의 분노 속에 가족과 함께 생을 마감함으로써 구정권 핵심부의 몰락을 상징한 셈이죠.

이후 최인규 전 내무부장관을 시작으로 옛 자유당 정권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어요. 혁명 직후 으레 따르기 마련인 구체제 잔재 청산의 첫걸음인 셈이죠. 이러한 반민주행위자 처벌 요구는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도 꾸준히 전개되었어요. 혁명이 한 달쯤 지난 5월 29일에는 급기야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했어요. (이후 그는 1965년 현지에서 사망할 때까지 하와이에서 살아요.)

망명 중인 이승만 전 대통령. 출처=https://news.nate.com/view/20250101n16956

헌법을 대대적으로 고쳐야겠죠. 6월 15일에 국회는 제3차 개헌을 해요. 대통령제에서 의원내각제로 전환해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을 줄이고, 국회도 양원제를 채택하는 등 권력 구조에 큰 변화를 주었어요. 너무 많은 힘이 소수에게 몰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두 보았으니 당연한 결과겠죠. 이외에도 국민의 기본권 보장 강화, 지방자치제 부활 등 국민의 자유 확대 요구를 반영한 내용도 남았기 때문에 이 제3차 개헌으로 제2공화국이 시작되었다고 봐요. 새로운 민주 체제의 법적 토대가 마련된 셈이죠!

이어지는 (진짜)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이 당선됨으로써 대한민국은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어요.

출처=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_%EC%A0%9C4%EB%8C%80_%EB%8C%80%ED%86%B5%EB%A0%B9_%EC%84%A0%EA%B1%B0

비록 내년 5월에 곧바로 또 다른 새로운 시대가 열리긴 했지만 말이죠,,,

3.15마산의거 - https://dict.kdemo.or.kr/entry/84/

3ㆍ15 마산시위 (3ㆍ15의거) - https://archives.kdemo.or.kr/collections/view/10000003

김주열 (金朱烈)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8995

4.18고려대학생시위 - https://dict.kdemo.or.kr/entry/76/

4·19혁명 (四一九革命)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902

🔮오늘의 행운 메시지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