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계엄 시리즈 📢 9~10번째 계엄 (4·19 혁명) - (1)
작성자 팜팜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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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계엄 시리즈 📢 9~10번째 계엄 (4·19 혁명) - (1)
🦔 뉴니커 여러분! 이번에는 9~10번째 계엄을 알아봐요. 우리나라에 지금까지 있었던 17번의 계엄 중에서 10번째 계엄까지를 이승만 대통령이 발동했는데요, 오늘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마지막 계엄을 다루는 날이에요! (빰빰 🎉)
1960년 4월 19일 오후 2시 30분경, 이승만 대통령은 전국적인 학생 시위에 당면하여 서울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어요. 잠시만요! 궁금한 게 벌써부터 넘 많아요.

🤟 하나, 둘, 셋, 야!
이승만은 제1대, 제2대, 제3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어요.
1️⃣ 1기 (1948년 ~ 1952년)
최초의 대통령 선거는 "간접 선거"의 방식으로 실시되었어요. 직접 선거인 현재와는 다르죠? 당시는 국민이 직접 투표하지 않고 🔍제헌국회의원들이 표를 던져서 대통령을 뽑았어요.
이 당시 헌법의 구조는 다음과 같아요.
후보자는 여러 명이 있었지만, 유력한 후보는 이승만과 김구였죠. 투표 결과는 이승만 180표, 김구 13표로 압도적인 득표가 나왔어요. (기타 표는 소수)

2️⃣ 2기 (1952년 ~ 1956년)
하지만 이미 국회의 다수는 대통령의 1인 독주 체제가 위험하다고 생각했어요. 🔍내각책임제로 갈 것을 주장했죠. (애초에 1948년 제헌헌법 제정 당시에는 내각책임제에 가까운 형태였지만 이승만의 강한 요구로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었어요.)
1기 때 대통령은 국회가 뽑았죠? 그런데 국회가 자신과 반대되는 생각("대통령 중심제보다는 내각책임제가 낫다!")을 가지고 있던 걸 깨달은 이승만은 직접 선거로 바꾸려고 시도했어요. 반공 지도자 이미지, 전쟁 영웅 프레임 등 대중적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본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국회보다는 대중들에게 투표 권한을 넘기려고 한 것이죠. 껍데기만 보자면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제도라서 좋아 보이지만, 그 속내를 알고 나면 갸우뚱,,🫠
문제는!
국회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거예요. (당연하겠죠?)
그래서 바로 저번에 다루었던 "부산정치파동", "계엄령" 등등이 발생했고, 국회의원들을 감금한 상태에서 멋대로 표결을 해서 1952년 7월 4일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어요. ("발췌"인 이유는 야당의 내각책임제 안과 정부의 대통령 중심제 안 중에서 본인에게 유리한 조항만을 발췌해서 짜깁기했기 때문이에요. 참고로, 이 발췌개헌이 제1차 개헌이에요.)
발췌개헌의 결과로 대통령과 부통령의 국민 직선제가 도입됐어요.

이승만 대통령은 당선되었죠. 헌법에 중임은 한 번만 가능하다고 적혀있으니 이승만 대통령은 원래대로라면 2기까지 하고 내려와야 하는데,,,
3️⃣ 3기 (1956년 ~ 1960년)
역시 시대와 국가를 초월하고 권력자는 자리에 한 번 올라가면 내려가지 않고 버티는 게 유행인가 봅니다. 마침 1954년 5월 총선에서 여당인 자유당이 국회의 다수파가 되었어요. 즉, 개헌을 밀어붙일 가능성이 생겼다는 뜻이죠! 이때를 틈타 자유당은 1954년 9월 8일 국회에 개헌안을 공식 제출했어요.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아요.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만" 중임 제한 조항을 적용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승만"만" 무제한으로 가능하다는 뜻이네요?)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이 대통령을 승계한다 (권력 승계를 안정화했어요)
국무총리제를 폐지하는 등 행정부의 구조를 조정한다 (대통령 중심제를 더 강화했어요)

헌법 개정은 국회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 이상 찬성이 필요하지요. (지금이랑 같죠?) 즉, 203 * (2/3)= 135.333...을 넘어야 하므로 최소 136표가 필요해요. 과연 몇 표의 찬성이 나왔을까요?
놀랍게도 딱 135표가 나왔어요!
그러니 부결을 선포했죠.
그런데!
이틀 후에 여당인 자유당과 정부에서는 "사사오입"을 주장하며 개헌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했어요.

사사오입이란 4는 버리고 5는 올린다는 뜻으로 반올림을 나타내요. 135.333...을 반올림해서 135표라고 억지 해석을 한 것이죠. 아무쪼록 날치기로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었고 이승만은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마련했어요. (사사오입 개헌이 제2차 개헌이에요.)
이러저러한 일들을 거쳐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었습니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이번에도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어요.

그런데!
부통령에는 자유당이 아닌 민주당의 인물이 선출되었죠. 이렇게 대통령과 부통령이 서로 반대되는 당에서 선출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어요. 민심이 균열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신호라고도 볼 수 있죠. (아래 부통령 선거는 왜 제4대로 나와있냐면, 1대 대통령일 때 부통령을 두 번 뽑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2대 대선과 3대 부선이 같이, 3대 대선과 4대 부선이 같이 시행됐어요.)


🗳️ 체계적이고(?) 대규모로 준비된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
이승만 대통령은 이제 대통령을 세 번 했으니 자진해서 내려왔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이전에도 부정선거 시비는 종종 있었지만 단순에 의혹에 그쳤어요. 정말 부정선거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이승만 대통령 본인도 어느 정도 선거에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은(혹은 아예 활용하지 않은) 거라고 여겨져요. 그런데 제4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우선, 정권 유지에 대한 위기감 자체가 커졌어요. 대선과 총선에서 모두 야당 후보들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었죠.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당시 이미 나이가 85살이었어요. 그래서 본인은 물론 부통령도 여당에서 당선되기를 강력히 희망했어요. (그래야 본인이 사망해도 자기 편인 부통령이 대통령을 이어받을 수 있으니까요.)
이승만 대통령은 1959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선거 대책을 세웠고, 대통령의 특명 사항과 공무원 선거 대책 등을 담당하는 내무부·외무부·재무부·법무부·교통부·체신부 장관으로 구성된 6인 위원회를 조직했어요. 애초에 그는 취임사에서 "공무원들은 대통령 선거에 있어 선거 운동을 해도 관계없"다고 말했으니 뭐 말 다 했죠.
치안국장은 물론 경찰국장 및 총경급 인사를 대규모로 갈아치우고 이후에는 경북‧강원‧전북‧전남‧제주 지역의 도지사도 새롭게 임명해서 선거 체제에 돌입했어요. 당시 내무부장관이었던 최인규는 각 시도 경찰국장, 사찰과장 및 경찰서장, 시장, 군수, 구청장 등을 수시로 소환해서 노골적으로 선거부정을 독려했는데, 과연 어떤 말을 했는지 아래 <꼬꼬무> 캡처를 통해 볼까요?




자유당은 경찰은 물론 각종 비공식적인 폭력 조직들까지 동원했어요. 대표적인 단체가 그 유명한 "대한반공청년단"이죠. 이들은 정부와 자유당의 비호를 받으며 선거 과정에서 각종 폭력 범죄들을 저질렀어요. 반공예술인단을 설립해서 선전을 담당하기도 했고, 어마어마한 선거 자금도 조성했어요.
결정적으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4할 사전투표"라는 거예요. 이름에서 풍겨오는 뜻을 그대로 해석하면 설마 싶지만,, 맞습니다 🫠 이미 자유당에 기표된 투표용지의 40%를 투표함에 미리 넣어두는 것이죠. (이는 투표 당일, 미리 눈치챘던 야당 참관인에 의해 발견돼요.) 이런 거짓된 선거를 내버려둘 수 있나요? 3월 15일 선거 당일 오전 10시 30분에 민주당 마산시당이 선거 무효를 선언함을 시작으로 오후 1시 30분에 민주당 경남도당이, 민주당 중앙당이 오후 4시 30분에 선언을 이어갔어요. "3.15선거 불법·무효 선언문"에 적힌 내용을 볼까요?

뭐 그래도 투표는 진행됐고, 단독 후보였던 이승만이 제4대 대통령으로, 부통령 후보였던 자유당의 이기붕이 무려 79.19%의 득표율로 당선됐어요. 이 참담한 결과를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아주 늦게 도입이 됐겠죠? (어쩌면 아직도 찾아오지 않았을지 모르죠.)
이에 불복하여 학생과 시민들이 곳곳에서 시위를 일으켰고, 정부는 계엄령까지 동원해서 무차별적으로 억압했어요.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에서 알아볼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