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서사 드라마의 진화: '은중과 상연', '애마'가 보여주는 여성 캐릭터들의 새로운 관계 🌹

여성서사 드라마의 진화: '은중과 상연', '애마'가 보여주는 여성 캐릭터들의 새로운 관계 🌹

작성자 고슴이의비트

비욘드 트렌드

여성서사 드라마의 진화: '은중과 상연', '애마'가 보여주는 여성 캐릭터들의 새로운 관계 🌹

고슴이의비트
고슴이의비트
@gosum_beat
읽음 31,068

최근 ‘은중과 상연’, ‘애마’, ‘백번의 추억’, ‘달까지 가자’까지 여성 주조연들이 등장하는 드라마들이 연달아 공개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야기 속에서 여성들은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돕고, 또 사랑하는데요. 오늘은 최근 공개된 한국 드라마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맺고 있는 관계망을 중심으로 드라마 속 여성 서사의 변화를 살펴봅니다.


함께 성장통을 겪는 여성들: 은중과 상연, 애마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먼저, 넷플릭스 ‘은중과 상연’(김고은, 박지현 주연)은 10대부터 40대에 걸친 두 여성 ‘은중’과 ‘상연’의 우정 연대기를 그리는 작품입니다. 한동안 연락이 드물었지만 말기암을 선고받은 상연이 오랜 친구였던 은중에게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알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요. 둘은 10대에 같은 초등학교에서 만나, 20대에는 같은 대학교 동아리에 소속되고, 30대로 접어들며 같은 영화를 제작하는 공동 프로듀서로 만나게 되죠. 15부작의 긴 호흡에서 드라마의 캐치프레이즈처럼 두 사람은 “원망과 선망 사이”를 오갑니다. 

상연은 안락사가 합법적으로 허용된 스위스 소재의 안락사 업체 ‘프리든’에서 자신의 의지로 고통을 끝내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이곳에 동행하도록 은중을 설득하는 과정을 통해 이 드라마는 ‘조력자살’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 있고요. 지난해 베네치아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영화 ‘룸 넥스트 도어’ 또한 두 여성의 우정과 조력자살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룸 넥스트 도어’를 만든 알모도바르 감독은 “깨끗하고 존엄하게 이 세상에 안녕을 고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기본 권리라고 믿는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는데, ‘은중과 상연’은 이렇게 기본 권리를 실현하는 관계에 대해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그런가 하면, 넷플릭스 ‘애마’(이하늬, 방효린 주연)는 톱 스타 영화배우 ‘희란’과 신인 배우 ‘주애’ 간의 팽팽한 기 싸움으로 시작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드라마는 1980년대, 전두환 전 대통령의 3S(스포츠·스크린·섹스) 정책에 따라 국내 첫 심야영화로 극장 개봉했던 영화 ‘애마부인’의 제작 과정을 담은 픽션 코미디 시리즈입니다. 여성 배우 희란이 더 이상의 노출을 거부하며 영화계에서 은퇴를 선언하자, 그 자리에 신인 배우 주애가 캐스팅되면서 희란은 은퇴 대신 조연으로 밀려나게 되죠.

2025년 나온 드라마 ‘애마’는 철저히 남성 중심주의적 시각으로 만들어졌던 영화 ‘애마부인’을 중심으로 1980년대 영화 산업의 부조리한 면을 풍자하고, 구조적인 여성 연예인 성 접대 문화의 이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성공을 꿈꾸었던 주애는 희란이 당대 톱 스타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는 걸 보면서 이렇게 말하죠. “모멸감에서 절 구원해 주셨는데 선배님도 구원받으셔야죠.”

‘애마’의 후반부에는 실제 영화 ‘애마부인’의 주연이었던 안소영 배우가 극중 대종상 영화제 시상자로 깜짝 출연하며 “돌이켜보면 영광스럽지 않은 날들이 없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이는 희란과 주애를 포함한 여성 영화인들에게 존경과 헌사를 보내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상징적인 장면을 만들어냈습니다. 마치 지난해 개봉한 영화 ‘위키드’에 브로드웨이 뮤지컬 원작 캐스트 멤버인 ‘크리스틴 체노웨스’(글린다)와 ‘이디나 멘젤’(엘파바)이 카메오로 출연하며 오랜 위키드 팬들을 놀라게 하고, 작품에 대한 의미를 더한 것처럼요.


위계 문화 속 여성들의 연대: 백번의 추억, 달까지 가자

이미지 출처: 티빙

최근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 중에 주인공들이 당시 상영되던 ‘애마부인’을 극장에서 관람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또 다른 작품이 있는데요. 바로, JTBC ‘백번의 추억’(김다미, 신예은 주연)입니다. ‘영례’와 ‘종희’는 버스 안내양과 뒷자리 승객으로 처음 만나게 되지만, 곧 버스 안내양 동기로 함께 일하는 사이가 되는데요. 버스 안내양은 1961년 교통부가 버스 여차장제를 도입하면서 생겨난 직업군으로, 드라마에서는 주로 하차하는 승객들의 차비를 수금하거나, 버스 기사에게 “오라이”를 외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다만 버스 안내양은 대표적인 저임금 직업군인 데다, 첫차가 운행하는 새벽 5시 즈음 근무를 시작해 밤 10시에 퇴근할 정도로 노동 강도가 높았고, 다 같이 기숙사에서 합숙을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드라마에서 그려진 것처럼 버스 안내양 간의 뚜렷한 위계 문화도 있었고요. 영례가 버스 안내양이 된 이유는 명문 법대에 재학 중인 큰오빠를 공부시키고 어린 두 동생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일을 쉬지 못하는 엄마를 도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례를 향해 종희는 “난 매일 아침 ‘걸스 비 엠비셔스(Girls, Be Ambitious)!’를 외워. 소년만 야망을 가지란 법 있니? 소녀도 가져야지!”라며 새로운 시야를 보여주는데요. 이는 헬렌 켈러가 1937년 대구의 신명 여학교 방문 당시 학생들에게 전했던 이야기이기도 하죠.

이미지 출처: iMBC

끝으로, 장류진 작가의 동명의 소설을 드라마화한 MBC ‘달까지 가자’(이선빈, 라미란, 조아람 주연)에서는 비공채 출신으로 사내 동기들 사이에서 묘하게 소외당하고, 늘 인사 평가에서 승진이나 월급 인상으로 이어지기에는 모자란 수준인 ‘M(Meet requirement, 요구 충족)’을 받는 여성 직장인 3인방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들은 자신을 ‘무난(Mㅜ난)이들’이라고 지칭하는데요. 특히, 주어진 일에 항상 열심을 다해왔지만 결국 열등감만이 남게 된 4년 차 직장인 ‘다해’의 곁에는 5분 대기조로 위로가 되어주는 직장 동료들이 있습니다. 집세 고민, 실연, 고대했던 프레젠테이션의 좋지 않은 결과 등으로 상심한 다해는 ‘은상’의 권유로 코인을 시작하게 되죠. 

국내에 가상화폐 투자 열풍이 아직 대중적이지 않았던 2017년을 극중 배경으로 설정한 것에 대해, 제작진은 이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이 과도한 주식 투자를 조장하는 사행성 메시지를 읽는 대신 여성 3인방의 행복을 응원하게 되길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장류진 작가 또한 작가의 말에서 “그래도 나는 이 이야기를 마지막엔 꼭 설탕에 굴려서 내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라고 말한 것처럼요.

다만, ‘달까지 가자’에는 1980년대에 유행한 아이스크림 CF를 패러디한 티저 영상이 중동 문화를 희화화한다는 지적을 받은 바 있다는 점, 극중 3인방 중 한 명인 ‘지송’이 다른 여성 팀원에게 “요즘 주름 고민이 있느냐”는 대사를 하며 여성혐오적인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구도를 만드는 점 등 다소 시대착오적인 지점도 있습니다. 


한국 드라마 속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의 활약

2020년부터 한국영화감독조합(DGK)이 주관하는 ‘벡델 데이’는 미국의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양성평등지수로 제시한 테스트에서 착안해, 매해 문화 다양성에 이바지하고 있는 벡델 초이스(드라마 시리즈, 영화) 10을 선정해왔습니다. 이를테면, 다음 조건들을 만족해야 하는데요.

이러한 조건에 충족하는 올해의 벡델 데이 드라마 시리즈(2024년 6월-2025년 5월 방영된 드라마 대상)에는 “똑같은 외형에 가려졌던 미지와 미래가 자신 고유의 얼굴을, 여성을 향한 폭력에 맞서서 이름을 바꿨던 상월과 로사가 각자의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tvN ‘미지의 서울’(박보영 주연), 4인의 여고생을 중심으로 “연대나 사랑으로만 귀결되는 청춘의 모습과는 다르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색다른 성장 서사”를 그린 U+ 모바일TV ‘선의의 경쟁’(혜리, 정수빈 주연), “유교사상이 세상의 전부이던 조선에서 키다리 아저씨의 드높은 조력 없이 진취적인 여인 한 명이 굳건한 울타리를 만들어내는 처음 보는 영웅 서사”로 자리한 JTBC ‘옥씨부인전’(임지연 주연)이 있습니다. 올해 상반기 가장 화제작이었던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아이유, 문소리 주연) 또한 “각자의 이름 대신 ‘할머니’ ‘엄마’라는 대명사로만 불리던, 가족을 위한 헌신과 노동의 일상에서 사라졌던 여성에게 ‘정말 수고 많으셨다’고 말해준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 목록에 이름을 올렸고요.

벡델 초이스 심사총평에서는 최근 드라마에서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영화계가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제작 시스템하에 여성 원톱 주·조연의 작품이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기획 단계에서 걸러지는 것과 대조적인 흐름으로 읽힌다.”고 짚고 있습니다. 특히, 국내 영화 산업 대비 드라마 산업에 여성 작가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데 이는 “단순히 통계적인 차원을 넘어, 여성 캐릭터의 현실감과 감정 표현, 그리고 서사의 결을 결정짓는 중요한 배경이 되어 왔다.”고도 말하고요.

물론, 국내 영화 시장 근무 환경에서 핵심 창작인력의 성비 불균형은 고질적인 현상이지만 일부 개선됐습니다. 2024년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여성 감독은 24%, 각본가는 34.7%로 각각 집계되었어요. 전년도와 비교하면 모든 직종에서 여성 창작 인력의 비중이 늘었지만, 한편 촬영감독 직군은 상업영화·OTT 오리지널 영화에서 모두 3년 연속 0명을 기록하는 등 여성 촬영감독이 부재한다는 현실도 눈여겨봐야 하죠.

 

앞으로도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들의 약진은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혼자의 힘으로 모든 걸 해내는 게 아니라 옆에 있는 이들과 함께 주체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죠. 뉴니커 여러분은 요즘 어떤 드라마를 가장 재미있게 보고 있나요? 앞으로 그 속에서 또 어떤 여성들을 만나보고 싶나요? 


[비욘드 트렌드] 에디터의 관점을 담아 지금 우리의 심장을 뛰게하는 트렌드를 소개해요. 나와 가까운 트렌드부터 낯선 분야의 흥미로운 이야기까지. 비욘드 트렌드에서 트렌드 너머의 세상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 매주 금요일 12시 ‘고슴이의 비트’ 레터 받아보기

이 아티클 얼마나 유익했나요?

🔮오늘의 행운 메시지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