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생각하는 사람들 💭
모엘
7달 전•
안녕하세요. 모엘입니다. 이번 주제에는 플라톤 철학을 좀 들고 와보려고 해요. 분명 너무 오래된 고대 철학이긴 하지만 우리가 현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비판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바로 들어가보겠습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유용성을 바탕으로 직능들의 결합을 이야기하죠. 우리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새로운 형태의 직능이라고 했을 때 기존에 있었던 직능과 조화를 이루어서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느냐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국가> 10권에서 말하는 모방시인이 현대의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하나의 직능으로 형성될 수 있을까?'가 하나의 관건이겠죠. 침대의 예시를 들어볼게요.
목수는 침대를 제작하는 제작자이죠. 화가는 침대를 그리는 사람이고요. 그리고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화가가 그린 침대는 직능에 포함될 수 없다고 보는 것 같아요.😲
제작자가 만든 침대는 사용자에 의해 평가를 받고 그 평가에 따라서 제작자는 새로운 침대를 만들어내는 순환 구조를 취할 수 있죠. 사용자가 나타나기에 이 구도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나 침대 그림은요? 침대 그림에 대해선 사용자가 없습니다. 어떠한 유용적인 관계를 형성시키지 못하죠.
그렇기에 이런 모방적 기술은 절대로 직능이 될 수 없으며 이런 것들을 직능에 포함시키면 사회는 사치스러운 국가이자 염증 섞인 국가가 될 거라고 플라톤은 비판하고 있는 거죠.
단순히 사람들의 원초적인 욕망과 욕구를 자극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윤리적인 방향성을 가리키지 못한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모방시인은 정확히 이런 포지션에 있는 사람이죠.
플라톤이 말하는 최선자 정체에는 훌륭한 사람들의 성격과 성품을 모방하면서 그것이 제도 원리를 모방하는 것이 중요할 겁니다. 훌륭함의 모방이라는 건 어떠한 훌륭한 사실을 목격하고 그걸 1인칭 관점에서 이야기를 표현해내며 이걸 제도에 고스란히 담아내어 실행하는 과정인 거죠.
(플라톤이 말하는 훌륭함의 모방이란 영웅신화에 가깝겠죠. 어떠한 영웅이 악을 무찌르고 극복하는 이야기일 거고요. 독자들로부터 하여금 용기를 갖게 만들고 윤리적인 방향성을 가리킬 수 있도록 만드는 그런 신화적인 이야기는 더욱 더 많이 보급해야 할 거고요.)
반대로 플라톤이 비판하는 모방시인은 3인칭 관점에서 접근하여 이 이야기를 꾸미고 왜곡시키는 사람들인 거죠. 이는 이야기를 왜곡하고 과장한다는 측면에서 사람들의 감정을 마구잡이식으로 자극할 수 있고, 독자들로 하여금 잘못된 생각을 가질 수 있겠죠. 독자들이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부분이 그저 원초적인 감정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거죠.
더군다나 플라톤은 민주정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최선자 정체의 이상국가의 관점에서 논하고 있으니, 사람들을 그저 현혹시키고 혼란만을 불러일으킬 모방시인에 대해서 추방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겠죠. 그리고 모방시인을 추방해야한다는 건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검열"해야 한다는 생각과 가까운 거죠. 플라톤은 모방시인이 혹세무민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검열"을 지향했을 거라는 거죠.🫨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이쯤으로 비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현대의 아도르노부터 시작한 프랑크푸르트 학파도 이런 플라톤의 논법을 재반복하는 거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제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를 여기서 다시 해볼 수 있을 거예요. 제 글들을 계속 읽어왔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는 민주정체를 긍정적으로 보았고 시문학에 대해서 강조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앞서 언급했듯이 행위자의 성품을 모방하는 것을 플라톤은 중요시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는 달랐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를 모방하되 행위와 행위의 관계에서 "개연성"의 요소를 넣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개연성 내에서 우리는 행위자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구도로 가는 거죠. 훌륭한 예술작품은 이 개연성이 필연성처럼 나타나는 것일 거예요. 더 나아가 이러한 필연성 속에서 행위의 실수가 나타나게 되고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하게 된다면, 이때 이 이야기 구조가 독자들로 하여금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키게 된다면 그것을 우리는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일종의 지적 각성을 통해 나의 행위가 달라질 수 있는 시점인 거죠.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의 개연성(->필연성)을 통해서 상대적으로 모방시인의 모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다고 볼 수 있는 거죠.
이 "개연성"이 왜 중요하냐고요? 누차 강조했듯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에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소비자들을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시키고 그저 감각적 욕구 충족의 요소로만 만든다면 플라톤이 비판한 모방시인과도 다름 없는 역할을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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