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편: 상대성을 넘어 보편성을 찾아나서기 위해 | 무한한 소통과 평가

21편: 상대성을 넘어 보편성을 찾아나서기 위해 | 무한한 소통과 평가

모엘
@dorimoel
읽음 132

지난 글에 우리는 결국 사람(혹은 사람의 행위)을 판단하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언급했던 것처럼 강력한 평등주의적인 문화에서는 "내가 어떻게 감히 그 사람을 평가하는가?"에 대한 주저함이 따라 붙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직면한 상황에 대해 적절하게 판단하고 평가해야 다음의 선택을 할 수 있듯이, 타인 역시 내 앞에 닥친 사건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상황과 동일하게 타인을 판단하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이 평가의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각자가 삶의 가치 기준을 만들어오고 있을 것이며, 우리는 그 잣대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평가하게 된다.

다만 평가에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모두의 평가가 질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다시 상대주의로 빠지게 된다. 그러면 선생님조차 있을 필요가 없고 학교도 있을 필요가 있는가? 상대주의는 곧 돈을 많이 가져다주는 쪽을 선호하게 되는 상업주의라는 미궁 속으로 다시 빠질 것이다.

상대주의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 풍부하고 풍성한 논의와 평가들을 통해서 조금 더 설득력이 있고 설명력이 있는 평가를 찾아나서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바로 소통(Discussion)이 필요하다.


지난 글에는 문화상대주의를 비판하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중시하는 관점'에서의 평가를 끌어왔었다. 그러나 이 관점 역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것 역시 수많은 소통과 논의, 토론들을 통해서 설득력을 얻은 하나의 관점일 뿐이고 이 역시 이보다 더 설득력 있는 관점이 나온다면 뒤바뀔 수 있는 부분이다.

즉, 인간의 존엄성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훼손하는 문화적 전통에 대해서 우리는 "미개하다"라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하지만, 이것 역시 절대적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 역시 천부적인 것으로만 이해하기보다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고 약속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다른 이야기와 관점이 지속적으로 등장할 수 있도록 수많은 논의와 비평의 영역, 소통의 장을 계속 무한으로 열어놔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전통과 관습에 대해서, 더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이야기할 순 없는 것인가? 이 부분 역시 매우 논쟁적일 수 있다. 일단, 바로 위에 말한 모든 관점들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걸 전제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멈칫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며 적극적으로 개입한 전략이 역사에는 있었다. 이것이 "야만성"과 "미개성"을 명분으로 20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이 휘둘렀던 폭력과 약탈이다.

외부자적 관점, 제3국에서 어떠한 강제적인 조치나 일방적인 설득을 시도하는 것은 위처럼 많은 부작용이 일어나기 쉽다. 우리 전통과 문화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제3자가 우리에게 간섭하려 드는 건 더 큰 반발심을 갖게 만들기 쉽고, 조치를 취함에 있어서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서 또 다른 수많은 폭력들이 가해질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외부자를 끌어오지 않고, 그 전통 속의 사람들이 자성적으로 스스로의 전통의 문제의식을 갖고 내부적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서도 수많은 소통과 논쟁의 씨앗들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그 전통이 기존의 권위주의 체제 안에서 오랜 시간 고착화된 형태로 이루어졌다면 내부에서 이런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는 무척 힘들 것이다. 그 전통 속 지배계층이 희생자들의 목소리들을 권위로 찍어눌러 왔을 가능성이 있다.


지난 글 <18편: 갈등은 꼭 나쁜 걸까요 | "취존해"는 갈등 회피의 표현이다?>에 설득과 소통의 차이를 잠깐 언급했었다.

설득은 일반적으로 수직적인 우위를 전제한다. 만약 설득이 결론적으로 나의 주관을 타인에게 주입시켜 타인이 나를 따르도록 하는 거라면, 여기에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 방향성이 닫혀있기에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나기는 다소 힘들다.

반대로 소통은 일반적으로 수평적인 평등을 전제한다. 그리고 나의 주관과 타인의 주관이 서로 교류하면서 서로 변화할 수 있다는 걸 전제한다. 여기엔 어떤 직접적인 목적을 염두에 둔다기보다는, 방향성이 열려 있기에 기존에는 생각해보지도 못한 가능성이 새롭게 생길 수 있다.

지금의 평등을 전제하는 민주주의에서는 수직적인 권위를 전제로 하는 명령이나 설득은 작동하기 힘들 것이다. 양쪽에서 내가 깨닫지 못했던, 보이지 않던 수많은 논의들이 끊임없이 나올 수 있도록 만드는 소통은 어쩌면 지금의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국제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해야 한다. 힘 있고 강력한 국가가 단순히 강제력을 행사하는 방식은 더 큰 희생을 불러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국가와 국가 간의 이해관계를 넘어, 보다 진실된 관점에서 양국 간에 묻고 답하는 소통이 가장 필요한 지점이다.

이 진실된 소통 안에서 양국 간에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발견하고 조금 더 다른 방식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간다면 여기에 평화적 해결의 씨앗이 있는 것이다. 이 소통을 통해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를 침해해 온 국가가 단순히 전통의 의례적인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된다면(과거의 전통과 관습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시대에서 재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때서야 각 국가의 관계와 역할들에서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이것은 양국이 서로 이해관계를 넘어 동등한 위치에서 지속적으로 소통해야 하며, 비판적 관점을 꾸준히 취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렇게 현재의 문제점들을 무한으로 발굴하고 개선해나가는 것이 "소통"의 핵심이고 국제 관계에서 지향해야 할 모습이다.

물론 이런 방식이 이상적인 것은 맞다. 이 방식이 잘 작동했다면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답을 찾아야 한다면 이 영역까지 내다봐야 한다. 개인에게 있어서 이 부분은 훨씬 유리한 부분이 있다. 국제 관계는 이미 다수가 존재하는 집단을 전제하고 긴 역사를 전제하기에 훨씬 이해관계가 복잡하지만, 한 문화권 내에 개인과 개인의 경우는 소통하기에 훨씬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


강력한 평등주의는 상대주의로 흐를 수 있기에 문제가 될 수 있다. 모든 관점과 모든 판단이 질적으로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민주주의를 살고 있고, 우리는 개별자적 관점에서 모두 평등하다. 그 평등 속에서 서로 간에 소통을 하며, 개인과 공동체를 모두 포괄할 수 있는 합리적인 논의와 평가의 장을 무한하게 열어두어야 한다.

급진적인 변화는 피해자와 희생자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좀 더 소통을 통한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모두에게 좋을 수 있는, 희생을 최소한으로 할 수 있는, 그런 합리적인 보편성을 계속해서 찾아 만들어가는 것이 개인 간의 관계, 집단 간의 관계, 정치 영역에서도 꼭 필요할 것이다.

🔮오늘의 행운 메시지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