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편: 갈등은 꼭 나쁜 걸까요 | "취존해"는 갈등 회피의 표현이다?

18편: 갈등은 꼭 나쁜 걸까요 | "취존해"는 갈등 회피의 표현이다?

모엘
@dorimo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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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 감수성과 공감능력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았다. 사실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건전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공감만 잘 할 수 있다면 여기서 타인과 갈등의 소지가 생길 일은 없을 것 같다. 타인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타인의 감정에 동감한다면, 문제가 될 게 뭐가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어쩌면 갈등의 소지는 공감을 때로는 방해할 수 있는 감수성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감수성(or 가치관)과 타인의 감수성이 충돌하는 지점에 가치의 충돌이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지난 글에 이야기했던 걸 도식으로 한 번 나타내 보자.

먼저 1번 케이스부터 살펴보자. 1번엔 갈등의 소지가 없다. 1번은 마치 타인의 감수성에 자기 자신을 짜맞추고 밀어넣는 방식이다. 우리가 "무지성 공감"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히 여기에 들어간다. 상대방이 하는 말에 어떠한 비판도 없이 "네 말이 맞아!"만을 반복하는 것은 맹목적인 복종일 수 있다. (1번의 경우에 갈등이 만약 생긴다면 그것은 타인이 나의 진정성을 의심할 때이다.)

3번 케이스를 들여다 보자. 3번은 애초에 공감도 아닐뿐더러 갈등의 소지가 적나라하게 나타날 수 있다. 3번은 나의 가치관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주입하는 형태를 말한다. 그렇기에 3번 케이스는 다분히 폭력적이다. 타인의 입장에서는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해?"라는 반발감이 생길 수 있고 여기서 갈등은 증폭된다. (3번의 경우에 만약에 나와 타인이 수직적인 관계(선생님-학생)를 전제하고 있고 내가 타인에게 그만큼의 공을 들인다면 그것은 설득의 한 양태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수평적인 관계를 전제한 소통과는 차이가 있다.)


마지막으로 2번 케이스가 지난 글에 언급했었던 온건한 공감이 된다. 나의 감수성을 전제로 하여 타인의 감수성을 공감하고 이해한 뒤, 나의 감수성을 확장해나가는 형태가 바로 이 영역이다. 여기에는 그럼 갈등의 소지가 없는가? 물론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자.

위 3번의 그나마 건전한 형태가 나의 가치관을 타인에게 따르도록 하는 설득(Persuasion)이라면, 2번의 형태는 곧 소통(Communication)이 된다.

여기서의 소통은 서로 간에 공통점과 차이점들을 확인해가면서 공통분모를 찾아가며 이를 확장해나가는 하나의 작업이 된다. 서로 간에 공통점과 차이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질의응답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여기에는 모종의 논의(Discussion)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역시 포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논의에는 내 생각이 무조건적인 정답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작업(나의 가치와 타인의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 / => 비판)이 수반된다. 그 말은 나의 생각이 바뀔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나와 타인이 서로 간의 대등한 관계에서 진행하는 소통을 전제한다면 타인 역시 본인의 생각이 바뀔 수 있는 지점이 있다. 그렇다. 여기에는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공동 세계의 확장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2번에서도 3번처럼, 분명 갈등의 소지가 이미 내재되어 있다. 나의 가치관을 타인 앞에서 꺼내고 그것에 대해서 타인에게 평가받고 나의 가치관을 수정하는 일련의 과정이 전제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온건한 공감이 이루어지는 방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곧, 갈등은 꼭 회피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나를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하는데 갈등이 필요하다면 말이다. 서로 간의 가치와 의견의 충돌(갈등)이 발생하고 더 큰 관점에서 이를 해결하고 통합해나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감수성과 성숙함을 함께 키울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위 사례의 1번의 케이스는 타인의 기준에 나를 맞추는 것, 3번 같은 케이스는 나의 기준에 타인이 맞추게 하는 것이라면, 2번의 케이스는 이해관계 내에서 어떠한 기준이나 도달해야 할 특정의 합의점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나와 타인 모두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서로의 선입견으로부터 모두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렇기에 2번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꽉 막힌 갈등이 아니라, 열린 갈등이 된다.

이렇게 봤을 때 어떠한 갈등도 발생하지 않는 평화로운 상태를 우리가 생각한다면 그것은 관계 속에 이미 거짓이 들어와 있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은 자기 진정성을 숨겨 자기 자신을 속이거나 타인을 속이는 방식으로, 위선과 가식을 껍데기로 덮어씌워,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유야무야 넘어가는 방식이다. 우리가 귀찮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굳이 첨예한 갈등을 만들지 않게 조심해서 그냥저냥 넘어가는 것도 이에 해당될 수 있다.

다만 내가 누군가와 진실된 관계를 구축하고 싶다면 우리는 갈등이라는 리스크를 감당해야만 한다. 나라는 사람을 넘어서, 그 사람을 잘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견과 가치의 충돌은 필수적일 것이다. 그 충돌은 분명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발생하는 필연적 과정이다. 내가 진실한 태도를 보여야 타인도 나에게 진실할 수 있을 것이며 여기서 생긴 갈등은 분명 열린 갈등이고 생산적인 갈등일 것이다.

현대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이상이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 된다."를 말한다면 이는 타인과의 갈등의 소지를 전혀 만들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말을 조금 더 확장해서 본다면 이는 타인과 교류하지 않겠다는 말일 수 있다. 타인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는다면 타인에게 피해를 끼칠 일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 말은 결국은 타인을 이해하지 않고 나만의 작은 울타리 안에 있겠다는 선언일 수 있다. 우리가 타인이 불확실하고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나를 언제든 배신하고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나 역시 나도 모르게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고 신세를 진단 이유로, 타인을 멀리하게 된다면 여기엔 어떠한 갈등도 없을뿐더러 소통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혹시 "취존(취향존중)해!"라는 말을 쓰면서, 속으로는 타인을 멸시하거나 한편으로 선을 그어 무관심하려 하지는 않는가? 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취향존중"이라는 형식적 틀을 넘어서 그 사람의 세계와 직시할 수 있는 소통(communication)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여기에 갈등이 전제된다면 좀 어떠한가? 이 갈등이 해결될 때, 더 커다란 이해를 가져올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갈등이 해결되고 나야 더 가까워진다면, 그 마찰이 해결된 이후의 나와 너는 또 다른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 상태일 것이다.

("나도 맞고, 너도 맞아." 등의 상대주의적인 방식에 대한 부분은 다음 글에서 조금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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