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편: 내가 나의 삶을 책임진다는 것 | 진실된 서사 구축하기
지난 글에서 인간이 모두 모순적이라는 내용을 다루었었다. 더 나아가 이 모순은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 내면 심리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거나 감정의 기원을 하나씩 따져 분석한다면 마치 모순이 아닌 것처럼 설명할 수 있지만(일관적인 것처럼 설명 가능하지만), 타인의 관찰자 시점을 전제했을 때(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는 타자적 시점에서는) 내가 여전히 모순적이게 보일 거라는 것도 이야기했다.
이 지점에서 내로남불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성립한다. 지금 시대에 자주 쓰이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은 모순적인 타인들을 비꼬기 위해서 사용되지만, 우리 모두가 모순적이라는 것을 전제할 때 우리는 어떤 지점에서 모두 내로남불일 수 있다. 그 이유는 위에 언급한 것처럼 나는 내 상황의 서사(narrative)를 모두 알고 있고 이에 대해 나름대로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하지만, 타인에 대한 서사는 전혀 알지 못하거나 오직 파편적으로만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약 타인의 서사를 오로지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을 해본다면 마치 내가 자신에 대한 서사를 생각했을 때처럼 나름대로의 탄탄한 개연성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나의 서사를 구성하는 것은 일면 내가 모순적이지 않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이 우리가 자기합리화라고 말하듯, 완전히 정당화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현대의 해석학자인 폴 리쾨르는 서사적 정체성(narrative identity)을 이야기한다. 나의 과거를 해석하고 현재를 이해하며 미래를 전망하면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엮어갈 때 "내가 누구인지"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내 안의 자기 진실성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구성해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위의 경우처럼 자신의 서사를 자기기만적으로 구성할 때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 만약에 나의 모순된 부분들, 그리고 더 나아가 나의 잘못과 실책을 과거의 인과관계 속에서 그저 정당화하는 방식이 그 예이다. 이런 방식은 다음과 같은 발화로 나타난다.
"내가 과거에 이러이러했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이러이러할 수밖에 없어."
이 발화를 다음의 예시로 구체화해보자.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의지할 사람도 없었고 삶에 대한 어떠한 희망조차 없었어. 내가 개망나니인 건 어쩔 수 없어."
와 같은 발화는 나의 가정사를 언급하면서 지금의 나의 좋지 못한 특성을 정당화하는 표현일 수 있다. 과거의 특정 상황에 현재 자기 자신을 지속적으로 귀속시키는 것이다.
요즘은 더 나아가 MBTI로도 이러한 자기기만이 가능하다.
"내가 INTP라서 사회성이 떨어져."
와 같은 발화 역시 설문 조사 결과라거나 통계적 자료에 자기 자신을 의탁하는 모습이다. 바로 위의 발화와는 다르게 여기에는 서사조차도 숨겨져 있다.
물론 과거의 사건이라거나 기억들이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지금 위의 예시에서 대해서 "이 인과관계가 과연 필연적일까?"와 같은 비판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반성(reflection)이라는 것이 정확히 이 지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분명 그럴 수는 있었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지 않았을까?"와 같은 물음이다.
위의 두 가지 예시를 다음과 같은 발화로 바꿔보자.
"나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개망나니처럼 살아왔어. 다만 언젠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부모님이 하늘에서 과연 내가 이렇게 살길 원했을까?'라고. 그 생각을 한 이후 내가 나중에 하늘에서 부모님을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가고 있어."
"내가 그 사회성이 좀 떨어진다는 INTP가 나오긴 하더라. 그러나 인간의 성격 유형을 그저 16가지로 나눌 수는 없는 거고 그리고 내가 평생 INTP라는 보장도 없잖아~ 지금도 나의 장점을 살려서 사람들과 잘 지내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고 노력하고 있지."
그렇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눈치 챘겠지만 지난 글들과의 연속선상에서 본다면 자기기만과 진실성은 곧 태도(attitude)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과거의 인과관계를 통해 현재를 단순히 정당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는 내가 어떠어떠하게 살겠다!"라고 선언하는 약속의 관점에서 볼 때 여기에 윤리(ethics)의 문제가 들어오게 된다. 결국 나는 과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그대로를 떠맡으면서, 미래에 대한 나의 또 다른 가능성을 매순간 상상하고 그려내면서, 현재에서 미래를 향해 선택하고 행위하며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게 리쾨르가 이야기했던 진정한 의미에서의 서사적 정체성이다. 인간은 위와 같은 방식으로 과거-현재-미래를 축으로 두어 자신의 이야기(narrative)를 지속적으로 새롭게 만들어 가면서 동시에 새로운 의미(meaning)를 만들어내며 이를 통해 변화(change)하는 것이다. 과거의 나의 행적뿐만 아니라 내가 미래에 어떠한 것을 희망하고 기대하는지까지가 "나"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진실된 삶을 살았다는 건 곧 매순간,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자기 진정성이 있는 선택을 해왔다는 것이다. 주어진 상황을 회피하려 하지 않고 늘 자기 자신을 직시하려고 할 때, 그리고 늘 더 나은 가능성을 꿈꾸면서 실천하는 삶을 살았을 때, 자기 자신에게 한치 부끄러움이 없는 떳떳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다면 죽기 직전에 나의 삶을 돌아봤을 때 후회할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나의 서사를 온전히 책임지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할지 아직 감이 안 잡힌다면 조금만 더 쉽게 이야기해보자. 리쾨르식으로 이야기하면 진실성에 다가가는 방법 중 하나가 곧, "자기물음"이 된다. 자기 자신에게 물음을 끝없이 던지면서 아무리 의심하고 의심해도 도저히 의심이 안 되는 영역을 찾아내는 것. 여기서 나를 진정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들을 발견하는 것. 더 나아가 "내가 할 수 있다"와 같은 자기확신을 갖는 것. 그리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향해 나를 책임지며 나아가는 것. 의심과 믿음의 반복. 새로운 의미(가능성)의 지속적인 창출. 그게 어쩌면 인문학, 그리고 철학과 윤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것일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