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편: 약자 혐오 문화, 그리고 루저가 되기 싫어 행위하지 않는 현대인

8편: 약자 혐오 문화, 그리고 루저가 되기 싫어 행위하지 않는 현대인

작성자 모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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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편: 약자 혐오 문화, 그리고 루저가 되기 싫어 행위하지 않는 현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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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imo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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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들이 우경화가 되어가고 있다고 했을 때, 지난 글과 이어서 생각해볼 때 다음의 경우를 추론해볼 수 있다.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비참한 실패를 경험하거나 혹은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을 찾지 못한 개개인이, 자존감의 박탈을 경험하고 무기력에 놓인다. 그런 개개인들이 자신의 상태를 직면하기에는 겁이 나고 두렵기 때문에, 그 비난의 화살을 돌릴 다른 사람을 찾는다. 이때 내가 외면한 나의 수치심이 타인에게 전가될 때 바로, 혐오와 증오가 된다. 이러한 매커니즘이었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때의 타인이 특정 범죄의 피의자가 되기도 하지만, 약자와 소수자도 해당된다는 점이다. 전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는 지난 글에 언급했던 도덕주의적 관점에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한다 치더라도, 후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는 도덕주의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영역이다. 약자와 소수자 혐오는 전혀 도덕적이지 않다.

 

왜 그러면 약자를 혐오하는가? 여기에는 많은 부분들이 얽혀있다.

먼저 약자는 나를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안전하다는 확신이 일례가 될 수 있다. 바깥에서 친구와 싸웠는데, 집에 와서 애꿎은 부모에게 왜 짜증을 부리는가? 여기에 부모는 내가 이렇게 하더라도 나를 이해해줄 거라는 모종의 믿음이 작동하는 것이다. 친구는 나를 버릴 수 있더라도 부모는 나랑 늘 함께 할 거라는 모종의 안도감과 안정감이 같이 작용할 수 있다. 여기서 약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족이라는 유대를 공유하지도 않는다. 이보다 더욱 강하게 혐오할 수 있는 건 매우 당연하다.

한편으로 지금의 무한 경쟁 사회에서 인정 받는 인간상은 능력 있고 성과를 만들어내는, 돈을 잘 버는 인간상이다. 이 도식으로 약자를 바라보게 되면 그들은 능력도 없고 생산성도 없고 사회에 민폐만 끼치는 존재들이다. 나는 이렇게 노력하면서 발버둥치며 사는데, 약자들은 노력조차 안 한다는 프레임이 씌워지면 그 약자는 혐오의 대상이 되기 너무나도 쉽다. 지금의 기득권과 구조를 정당화할수록 그리고 내가 그 체제에 충실할수록, 그 시스템을 역행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 커진다.

언어적으로 접근해보면 지금의 힘든 나를 설명해 줄 언어가 부족하다. 나는 약자도 아닌 것 같고 강자는 결코 아니다. 깊게 들여다보면 나는 약자 이상으로 힘들고 지쳤을 것이다. 그런데 나 같으면서도 동시에 힘들다고 지쳤다고 말하는 약자를 발견한다. 이때 그 약자들이 대부분의 좋은 것들을 가져가게 되어버린다면, 더 나아가 그 집단이 특혜를 받는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면 혐오는 더욱 커지게 된다. 그리고 그 약자 담론이 위선의 도식과 겹쳐버리면 더욱 끔찍해진다.


약자를 혐오하는 문화 속에서 우리는 약자가 되기를 더더욱 거부할 것이다. 실패한 사람을 그저 "루저"로 일컫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나 역시 "루저"가 되어버린다면, 만약 나 역시 약자들처럼 그저 현실을 부정하며 탓하는 식의 나약한 목소리를 내버린다면, 나는 내가 혐오해오던 그리고 사회가 조리돌림해오던 약자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약자가 되기 싫은 나는, 약자를 더더욱 혐오함으로써 약자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더 나아가 자신의 과거의 실패와 아픔, 고통을 약자의 증거로 여겨 스스로의 서사를 왜곡하고 부정한다면, 그리고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그저 약자의 모습으로 여긴다면 이는 더더욱 큰 문제이다. 우리는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잃게 될 것이고 새로운 가치의 창출이 더는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가치의 창출이 일어나지 않으면 사회는 고착화될 것이고, 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계속 은폐될 것이며, 불평등 역시 더욱 심화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도전을 하지 않고 모험을 하지 않는 이유도 "루저"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에 내가 리스크를 안고 모험했을 경우에, 그것이 실패했을 결과를 받아들이는 문제는 분명 쉽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시도를 하지 않으려 하고 무기력과 체념을 일상화하며 지금의 현재적 상황에 그저 안주하기 쉬운 것이다. 더 나아가 내가 모르는 타자는 낯섦의 영역 그 자체이다. 내가 모르는 미지의 영역은 나에게 좋을 수도 있고 좋지 않을 수도 있다. 내 주변에 있는 타인 중 누군가는 내게 유용성을 주지만 그러한 타인조차도 언제든지 나에게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이다. 나 역시 타인에게 받은 피해로 인해 언제든지 약자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가 언제든지 실패하고 추락할 수 있는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이 모험이라면, 차라리 타자를 맞이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나에게는 익숙하고 안전한지도 모른다. 자유주의에서 주로 말하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무엇이든 허용된다."라는 표현이 갖고 있는 내적 모순이 이런 것이다. 모든 것이 허용되더라도 모든 걸 할 수 없다. 타인도 그렇듯이, 나 역시 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행위"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하게 된다. 행위하지 않으면 나의 행위로 인해 타인들에게 피해를 끼칠 일도 없다. 더 나아가 나의 행위가 타인에 의해 평가 받고 비판 받을 일이 없다. 타인들이 나에 대해서 간섭할 일이 없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라는 격언은 여기서 가장 잘 통용된다. 아무도 행위하지 않고 관찰과 관조만 한다. 행위 없는 관조는 곧 관망이자, 방관이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질문할 때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모습 역시 이 연장선일지도 모른다.


지난 번에 적었던 글 중 5편: 평등을 말하기 이전에 알아야 하는 것 ㅣ 민주정을 혐오한 플라톤의 말미에 다음의 내용이 있었다.

이처럼 우리가 약자를 혐오하기 이전에, 우리 모두가 약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먼저 생각하면 어떨까? 우리가 만약에 약자가 될 수 있다는 지점에서 연대해서 새로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지금 우리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라거나 지나친 경쟁의 모습과는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오늘의 행운 메시지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