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편: 자유를 말하기 이전에 알아야 하는 것 ㅣ 민주정을 혐오한 플라톤

6편: 자유를 말하기 이전에 알아야 하는 것 ㅣ 민주정을 혐오한 플라톤

작성자 모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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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편: 자유를 말하기 이전에 알아야 하는 것 ㅣ 민주정을 혐오한 플라톤

모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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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imo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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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5편: 평등을 말하기 이전에 알아야 하는 것 ㅣ 민주정을 혐오한 플라톤과 이어서 보면 좋아요.

평등에 대해 유의해야 할 점을 알았다면 자유라는 건 또 무엇인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평등과 함께 "자유"가 있다면 그 자유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을 다 하는 걸 의미하는가? 한편으로 현대의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가장 최소치의 도덕을 형성하는 것이 곧, 자유인지도 모른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무엇이든 허용해도 된다(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이상 어떠한 자유도 보장된다)."라는 도덕적 기준을 마련해주는 것이 어쩌면 자유가 되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보자. 내가 그저 육체적인 쾌락과 향락에 끌려가는 것도 자유인가? 물론 이 질문을 듣고 개인주의를 여전히 가져간다면 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도 그 사람의 자유라고 말하기 쉽다. 다만 플라톤이 민주정을 혐오했던 것이 바로 이 영역이다.

플라톤은 민주정이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개개인, 각자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려는 모습에 가까워서 국가의 질서를 흐트러놓을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위에 언급한 것처럼 개개인이 감각적인 유혹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곧 방종일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둘 그렇게 변질되어 간다면 공동체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이상국가라는 건 다양한 직능들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수렴점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해석하는 방종에 가까운 자유는 가운데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발산할 것이고, 이것이 곧 무질서가 될 것이다.

또 다르게 본다면 우리가 자유에 대해서 환상을 갖고 있는 것도 여전히 이 지점이다. 자유주의의 기본 논법 중 하나는 "내가 자유롭게 선택을 하고 그것에 책임을 지면 된다."이다. 근데 이 논법의 문제점 중 하나는 내가 선택을 했지만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까지 따라오게 된다면 그 영역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더 나아가 그것까지 책임을 진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가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크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부분이 바로 공동체의 도움이 요청되는 지점이지만, 처음부터 타인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스스로 혼자를 선택한 개인이 공동체에 다시 의존하는 건 모순이 될 테며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거다. 그들은 그저 자기 자신이 몰락해 가는 걸 지켜볼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즉, 마치 자유라는 것이 모든 것을 간섭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의 선택은 타자와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우연성에 의존을 하기에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역설을 맞이하는 것이다. 공동체적 책임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내 욕망에 따라 일단 저지르고 보는 나의 자유롭다고 여기는(?) 선택은 곧 방종의 형태가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나를 옭아맬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자유주의 논법에서도 국가의 질서를 흐트러뜨릴 수 있다. 이 논법이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을 질 문제니까 "나에게 간섭하지 마"를 의미하게 된다면 타인에 대한 무관심,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따라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기적인 행위를 정당화하게 된다면 공동체는 흔들릴 것이며 극악무도한 지도자가 등장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칸트가 이야기하는 구도에서의 자유는 플라톤이 생각하는 방종에 가까운 자유를 뒤집은 개념에 가깝다. 칸트한테 있어서는 자연적인 경향성(감각적 유혹, 충동)에 끌려가는 것이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이는 마치 욕망에 그저 끌려가는 동물과 같다. 앞에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로 먹어버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으르렁대면 나 역시 똑같이 으르렁대는 건 지극히 동물적이고 모종의 인과의 연쇄고리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생각한 자유는 이러한 자연적인 경향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결정론적인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고 새롭게 인과를 시작할 수 있다. 즉,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앞에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기다리고 참았다가 친구랑 나눠먹을 수 있고, 누군가가 나에게 으르렁대면 나 역시 곧바로 으르렁댈 게 아니라 이야기를 들어보거나 용서를 할 수도 있다. 칸트식의 자유는 자연적인 경향성으로부터의 자유이기에, 이러한 자유로운 선택은 인간의 존엄성을 만들어낸다. 혐오와 보복의 무한 연쇄고리를 끊어내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용서라면 우리는 이 부분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구도로 보았을 때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무차별적 자유랑은 간극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라는 개념을 조금 더 확장해보자. 지난 글 5편: 평등을 말하기 이전에 알아야 하는 것 ㅣ 민주정을 혐오한 플라톤의 말미에 다음의 내용이 있었다.

이 문단에서 말하는 것이 곧, "자유"이다.

지금 세상이 일종의 돈이라거나 권력이라는 특정 가치에 의한 위계질서가 설정되어 있다고 보자. 우리는 이러한 기존 가치들을 우상으로 여겨 경쟁을 통해 이를 달성하려고 한다. '사'자가 들어가는 전문직이 되려고 바늘구멍을 들어가려 하며 경쟁하는 것도 여전히 이 영역이다. 우리가 기존의 가치들을 찬양하고 우러러볼수록 그러한 가치들은 고착화된다.

이제 다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기존의 가치, 혹은 사회가 정해놓은 목적에 의해 내가 짜맞춰 들어가는 것이 과연 자유로운가?

니체를 비롯한 실존철학자들이 거부했던 것이 이 영역이다. 그들이 강조하는 창조적인 삶은 단순히 기존의 질서에 편승하여 경쟁에 뛰어드는 삶이 아니다. 사회에 이미 주어져 있는 안정적인 루트를 거부하고 기존의 경쟁을 뒤로 하여, 나만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가치 창출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가치가 아니라, 내가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영역에 발을 담그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 가치 창출곧 자유가 된다.

새로운 가치의 창출이 일어나지 않는, 기존의 가치에 천착되어 고착화된 사회의 모습은 비참하다. 기득권들은 자기 자리를 유지하려 할 것이기에 새로운 세대들은 여전히 기존의 가치적인 측면에 의해 핍박 받고 올라갈 자리가 없다. 바뀌지 않는 위계질서 속 서열 안에서 불평등은 계속 가속화된다. 젊은 세대들의 무기력은 더더욱 가속화된다.

그러나 가치 창출이 일어나고 동시에 그 가치에 대해 새로운 사회적인 인정과 존중이 주어지는 사회라면 어떠한가? 끊임없이 다양한 취향과 취미가 생산되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공감이 되고 공유가 되면서 돈이라는 가치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걸 우리가 내면화한다면 어떠한가? 특정 가치를 향해 모두가 뛰어들어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들로 갈리는 방식의 무한 경쟁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들이 끊임없이 생산되어 세상이 다양화되고 다원화되면 어떤 모습일까? 진정한 의미의 자유(Freedom)라는 것이 이 영역에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러한 가치 창출은 무한히 일어나야 하며, 새로운 세대들은 기성 세대가 요구하는 가치를 뒤로 하고 새로운 자기만의 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은 개개인에게도 좋고 나아가 건강한 공동체에게도 좋다. 그것이 다름과 차이가 나는 개개인들을 다시 엮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면 민주주의에 있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유는 이러한 자유일 것이다.

🔮오늘의 행운 메시지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