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즈는 케첩이 아니라 기억을 판다
2026 북중미 월드컵은 마케터들의 놀이터다. 공식 스폰서는 물론이고, 스폰서가 아닌 브랜드들도 월드컵 이슈를 하이재킹하기 위해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펼친다. 특히 이번 월드컵은 마케팅의 본토라 봐도 무방한 미국에서 열리는 만큼, 재기 발랄한 마케팅이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월드컵 같은 글로벌 빅 이벤트는 공식 스폰서 외에는 '월드컵'이라는 용어조차 쓰지 못할 정도로 엄격한 규정이 적용된다.
그래도 비공식 브랜드들은 빈틈을 찾는다.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화제가 된 브랜드는 케첩 브랜드 하인즈다. FIFA의 '클린 스타디움' 정책에 따라 비공식 스폰서 브랜드들의 로고가 경기장 내에서 검은 테이프로 가려졌는데, 그 모습을 한 기자가 SNS에 올리며 화제가 됐다. 하인즈는 이 흐름을 그대로 가져왔다. 자기 로고가 검정 테이프로 가려진 케첩병 그대로를 '비공식 스타디움 케첩(Unofficial Stadium Ketchup)'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한 것이다. 검정 테이프 디자인 속에서도 하인즈 특유의 병 모양 하나만으로 누구든 그 브랜드를 알아본다.
하인즈는 이런 하이재킹 마케팅에 이미 익숙하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때는 '토마스 하인즈'라는 동명이인을 인간 광고판으로 활용했다. 빨강·흰색 옷을 입은 토마스 하인즈가 경기장 곳곳에 등장하며 '월리를 찾아라' 식의 콘텐츠를 만들었다. 결과는 1500만 회 노출, 900만 명 도달.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캠페인 예산이다. 공식 스폰서십이 1000만~2500만 달러 수준인 데 비해, 이 캠페인의 전체 예산은 단 1만 달러였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케첩 브랜드가 왜 이렇게까지 할까. 대부분의 소비자에게 케첩은 저관여 제품이다. 특정 브랜드의 맛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다른 제품을 사도 큰 차이가 없다. 일반적으로 브랜딩에 힘을 쓰는 카테고리는 고관여 상품이다. 평생 몇 번만 구매하는 집이나 자동차, 처음 결정한 브랜드가 관성적으로 오래 이어지는 은행 같은 산업에서 브랜딩이 중요하게 작동한다. 반면 제품의 퀄리티가 평준화되어 가격이 주된 변수인 산업에서는 브랜딩보다 매출을 직접 견인하는 광고에 마케팅 비용을 집중하는 게 보통이다.
하인즈의 선택은 정반대다. 매대에서 고민이 없는 제품일수록 브랜딩에 더 힘을 쓴다. 이유는 단순하다. 저관여 제품일수록 소비자는 익숙하고 감정적으로 친숙한 제품을 집어 든다. 어차피 퀄리티 차이가 느껴지지 않으니, 평소 떠오르는 브랜드, 혹은 어딘가에서 한 번이라도 마주친 브랜드를 선택하는 것이다. "케첩 하면 하인즈"라는 무의식이 만들어지면, 가격이 조금 비싸도 소비자는 그 브랜드를 집는다.
실제로 하인즈는 미국 케첩 시장에서 60% 이상의 점유율을 가진 카테고리 1등이다. 케첩이라는 단어가 사실상 브랜드 이름과 동의어로 작동한다. 그리고 그 1등 자리를 지키기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브랜드를 노출한다. 1등이라서 마케팅이 필요 없는 게 아니라, 1등이기 때문에 가장 많이 노출되어야 한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건기식 카테고리에서 1등이었던 클라이언트 브랜드가 있다. 효능, 신뢰성, 가격까지 우위였다. 그런데 경쟁사가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브랜드 이미지를 끌어올리는 사이, 그 카테고리의 대명사 자리를 내주게 됐다. 소비자에게 '첫 번째로 떠오르는 브랜드'가 되지 못한 순간, 1등이라는 수치는 빠르게 흔들렸다. 카테고리에서 한 번 밀린 브랜드 인식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브랜딩은 이제 가격대와 상관없이 모든 카테고리가 수행해야 하는 기본이 됐다. 가격과 광고로만 승부하는 브랜드는, 더 낮은 가격의 제품이 등장하는 순간 무너진다. 제품을 지키는 건 결국 소비자가 그 제품을 떠올리는 방식이다. 하인즈가 케첩 주제에 이렇게까지 마케팅에 공을 들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케팅은 매출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소비자와 관계를 맺는 일이다.
하인즈는 케첩을 팔지 않는다. 떠올리는 브랜드를 판다. 우리 브랜드는 소비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떠오르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