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 책방 📚


혜원
2024.09.22•
<가녀장의 시대>
아버지 부父 대신 여자 녀女가 늠름하게 빛나는 제목, <가녀장의 시대>는 작가의 말처럼 "아직 본 적 없는 형태의 가족 드라마"입니다. 책에 나오는 첫번째 등장인물은 30대 여성인 가녀장 슬아. 그는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쓴 성공한 작가로, 준비되지 않은 마감이 다가오면 약간 까칠해지는 특징이 있는데요. 그는 모부(母父)인 복희와 웅이를 직원으로 둔 '낮잠' 출판사를 경영합니다. 복희는 낮잠 출판사의 정직원으로, 탁월한 재능을 가진 요리사이자 슬아의 엄마이기도 합니다. 뭐든지 듬뿍듬뿍 느끼고 표현하는 중년이고요. 웅이는 낮잠 출판사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바닥을 쓸고 닦거나 운전대를 돌리는 일을 합니다. 슬아의 아빠이며 주변 인물들 사이에서는 만능 해결사로 통합니다.
<유쾌한 클리셰 (cliché) 비틀기>
"그들의 집에는 가부장도 없고 가모장도 없다. 바야흐로 가녀장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23p 中)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문장입니다. 여성이 댓가없는 살림노동을 하며 자신을 희생함으로서 지탱할 수 있던 구조의 가부장제. 이슬아 작가는 그를 놀랍도록 유쾌한 방식으로 비판합니다. 집의 주인이자 자신을 낳고 기른 모부의 상사, 두 식솔들을 책임지는 가장인 야물딱진 가녀장 '슬아'의 획기적인 등장은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책 속 슬아가 보이는 대담한 '가장'의 면모는 처음에는 흠칫할지 몰라도 나중에 되면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죠. 우리 안에 스며든 가부장제를 목격하고 새로운 삶의 대안을 훑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찡하고 애틋하고 사랑스럽고>
그러나 이는 명백한 "가족 드라마". 이 책 내내 슬아는 복희와 웅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웁니다. 먼저 태어나 훨씬 더 많은 굴곡을 거쳐본 그들이 생의 후배 슬아에게 경험을,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온 생각을, 생각들이 뭉쳐 이루어진 마음을 전합니다. 거만하고 대단한 가장임과 동시에 그는 젊습니다. 마음이 시큰해지고 눈물 나게 웃기거나 슬픈 이야기들이 복희와 웅이에게는 한가득입니다. 슬아는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타인의 삶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본 뒤 가끔은 부끄러워하고, 대개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합니다. 그렇게 좋은 어른을 닮아갑니다. 다면적인 캐릭터들이 복작복작 만들어낸 살맛 나고 따뜻한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한껏 충만하게 합니다.
<작가 이슬아 제 2막의 서막>
"완전히 사랑에 빠져버렸다. '나'에게서 '그'의 세계로 진입하는, 작가 이슬아 제 2막의 서막."
김초엽 작가의 추천사에서도 엿볼 수 있듯, 이 책은 이슬아 작가 최초의 장편소설입니다. 그간 그가 써온 책들은 실화에 기반한 수필이 대부분이었고, 이 소설에서도 현실의 이슬아 작가와 소설의 '슬아'는 공개된 정보만으로도 많은 부분이 유사합니다. 허나, 작품 속 '슬아'는 이제는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표현됩니다. 그는 저자와는 아예 다른 완벽한 타자이자 픽션의 등장인물이 된 것입니다. 이 책을 기점으로 우리는 이제 새로운 이슬아의 세계로 진입합니다. 이야기 속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게 됐지만, "아무렴 어때!"입니다. 그저 이 책을 읽고 나면, 이슬아가 이끄는 가녀장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축복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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