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만 스쳐도 인연

옷깃만 스쳐도 인연

작성자 방구석디제이

방구석 DJ

옷깃만 스쳐도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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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gkok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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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에서 대면통행으로

세상에는 나는 알고 있지만 상대는 모르는 일방향적인 친숙함들이 꽤 많다. 물론 그것은 티브이나 핸드폰 속 유명인의 경우도 당연히 그렇겠지만, 예상외로 일상 속에서도 충분히 발견 가능하다. 나의 경우는 버스가 특히 그렇다. 출근길의 버스라는 것은 굉장히 오묘해서, 매일 똑같은 시간에 집에서 나오더라도 버스를 타는 시각은 매일 미묘하게 다르다. 그리고 걸리는 시간도 제각기라, 언젠가는 늦겠다 싶어서 등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는데 평소보다 빨리 도착한 경우도 있었다.

처음 학교에서 멀리 떨어져 자취를 할 때는 이런 조바심에 쫓기고 싶지 않아서 무작정 빨리 나와 버스를 타곤 했는데, 이제는 나만의 안심하는 방법이 생겼다. 바로 버스의 사람들을 파악하는 것! 내가 A 정거장에서 타고 항상 맨 마지막 뒷자리에 앉아있으면, 그로부터 몇 분 뒤 한 지하철 역과 가까운 B 정류장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탄다. 그리고 그 중에는 나랑 항상 같은 정류장에서 내리는 사람이 있다. 나는 확신할 수 있다,  그 분이 그 버스 안에 있다면 나는 절대 지각이 아니라는 것! 어쩌면 일종의 나만의 부적(?)으로 기능하는 그 분은 아마도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당연한 말이지만) 알지 못하지 않을까? 그런 하루하루를 꽤 오래 반복하다보니 어디선가 그 분을 만나면 나는 아마도 "어디서 본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바로 버스의 그 분!이라고 떠올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것은 굉장히 재밌고도 묘한 느낌이다. 누군가는 알지만 누군가는 알지 못하는 것. 혹은 서로를 인식하고 있음에도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것.

하지만 그렇게 스치듯이 시작하는 우연이 어떤 이어짐의 새로운 계기가 되기도 한다. 몇 년 전, 독일에서 어학연수를 마친 후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무작정 배낭여행을 했다. 나는 그때 스페인 세비야에 있었고, 플라멩코가 유명하다는 말에 늦은 밤 공연을 보러 갔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동양인은 거의 없었기에, 한국인처럼 보이던 C언니는 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한 번의 시선교환을 계기로 우리는 그날 공연이 끝난 후 밤늦게까지 와인을 마시며 (취해서 더욱 기분좋게) 대화를 했다. 이런 환상적인 만남들은 나에게 꽤 오래토록 진하게 남아있고, 그러한 순간이 벗어나도 관계가 이어지는 경우가 꽤 있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을 소중히 하고 싶은 마음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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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에서 운명으로

그리고 이러한 낭만적 순간으로부터 시작하는 사랑에 대한 로망은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데, 제일 처음으로 떠오르는 것은 바로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이다. 아주 시끄럽고 혼잡한 길거리 횡단보도의 한복판, '아델'앞에 나타난 푸른 머리를 한 누군가. (이후에는 알게 되지만 아직은 모르는 사이인 채) 스쳐 지나가면서 서로를 인식하게 된 바로 그 순간, 횡단보도를 건너는 몇 분 남짓이 영원처럼 느껴지고 그 이후 줄곧 아델은 그 순간에 대해 생각한다.

이 계절이면 무조건 생각나는 <캐롤>도 이런 스침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테레즈'는 백화점에 있는 장난감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자신의 딸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방문한 손님 '캐롤'을 만나게 된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우연의 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강렬한 무언가를 느끼고, 그것을 계기로 사랑이 시작된다. 물론, 캐롤이 매장에 장갑을 두고 간 것은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 캐롤만이 알 수 있겠으나 어찌 되었든 나만이 기억하게 될 순간이 두 명의 추억으로 변하는 계기가 우연이었음은 분명하다.

또 이 두 영화가 나오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가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사랑에 빠지는 것도 결국은 이러한 로망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어쩌다보니 소개한 세 영화가 아주 이상적인 해피엔딩으로 끝났다고 할 순 없지만, 그 첫 만남의 순간들은 바로 행복한 낭만 그 자체.

그리고 이러한 사소한 계기로부터 시작되어 영원히 기억될 순간들을 우리는 항상 바라고, 그렇기에 이런 영화들은 언제나 많은 사랑을 받기 마련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28페이지'는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에 대해 추억하는, 일종의 상징으로 작동한다. 우리의 인생 - 수많은 페이지들 속에서 이렇게 특별한 28페이지와 같은 순간들이 반복되기를, 그리고 계속되기를, 멈추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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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노래: 김해원 및 Lim Ju Yeon - I dream of you too 

사실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즈음에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와 최근에 개봉한 <괴물>을 소개해 드리려고 했지만, 어떤 우연들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퀴어 영화들을 왕창 소개하게 되었네요! 이왕 여성 퀴어 영화들을 다수 소개한 김에, <윤희에게>의 OST 추천 드립니다. 




🏨유스호스텔에서 시작된 인연

우연이 반복되면 운명이라는 말을 반쯤은 믿게 된 경험이 있다. 교환학생으로 독일에 머물면서 영국을 처음 갔을 때, 숙박비를 절약하려고 유스호스텔에 묵었을 때의 일이다. 유럽 호스텔들의 이름 사이에선 심심찮게 '백패커스'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있는데, 그곳도 마찬가지로 배낭여행객들이 많은 평범한 호스텔이었다. 6인 1실이었나.

나는 그곳에서 홍콩에서 온 L을 만났다. 나는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잠이 든 바람에 L의 얼굴도 가물가물했다. 그렇게 피곤에 절은 채로 영국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갔다. 다음 날이 되자 L을 비롯한 같은 방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비운 뒤였다. 그날 일정은 대영박물관을 갔다가 근처 로컬 마켓에 가보는 것이었기에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인지! 그 넓은 박물관 내부를 마구잡이로 돌아다니던 나를 알아본 L이 멀리서 인사를 건넸다. 꾸쥬워마이걸~음악이 귓가에서 자동재생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이것도 인연이라며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같이 로컬 마켓에 갔다. 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맛있는 음식들을 여러 개 골라 나눠 먹기도 하고, 맥주도 한 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여행 중 만나는 인연들은 보통 스쳐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날따라 얘기도 잘 통했던 기억이다. 지금은 아쉽게도 연락이 끊긴 사이지만(벌써 그게 4년 전의 일이니) 독일로 돌아온 뒤로도 가끔 연락을 이어갔던 게 생각날 때가 있었다. 그런 걸 보면, 역시 세상은 참 좁고 인연은 어디에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는 말도 이제는 좀 신뢰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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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우다영 작가의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책에 수록된 <밤의 잠영>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그려진다. '나'를 포함한 주인공 커플은 휴양지에 놀러 가서 한 호텔에 머무르게 된다. 그곳에는 '나'와 애인 외에도 다른 한국인 커플이 머물고 있었는데,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들이 신경쓰이기 시작한다. 불편한 감정이라기보단 자연스럽게 눈에 띄는 느낌이랄까.

'나' 수영을 할 줄은 모르지만 수영장에 갔다가 그 한국인 커플 중 여자에게 수영을 배운다. 그러면서 그들이 사실 묘한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된다. 여자는 남자와 어린 시절부터 알던 사이였으며, 남자의 아내가 폐가 굳고 폐에 구멍이 나는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도. "구멍이 나 있어서 물에 뜰 수 있는 현무암"에 대한 얘기가 그 다음으로 언급되는데, 이 때문인지 덕분인지 엄밀히 따지자면 불륜 관계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한 둘의 사이는 묘한 느낌을 독자에게 안겨준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다는 말로도 어쩔 수 없이, 정신차려보니 '이렇게 됐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사고 같은 사이가 있는 걸까. 엮이게 된 뒤의 일을 그렇게 됐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우연한 만남은 예상치 못한 타인의 삶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낯선 이와의 만남을 통해서 전혀 다른 삶에 대해, 내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느낀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혹은 그가 들려줄 이야기가 어떨지 우리가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좋을지 나쁠지, 찝찝할지 두고두고 그리울지 등등을. 그러나 그렇기에 때로는 이 '낯섦'이 유의미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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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노래: 볼빨간사춘기 - 여름날(feat. 하현상)

2024년에 혹 새로운 인연을 만나길 기다리고 있다면 이 노래를 들어보실래요? 경쾌한 리듬과 귀여운 가사가 기분까지 좋게 만들어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