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한파를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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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방구석디제이

방구석 DJ

수능 한파를 조심하세요!

방구석디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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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gkok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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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길의 순간들

생각해보니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내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쳤던 것이! 겉으로 티는 잘 안 나지만 마음의 공간이 아주 작고 빈약한 나는 수능 전날 떨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것이 티가 나면 동생들이 놀릴까봐 호기로운 척 전날 저녁 TV 앞에 같이 앉아 ‘응답하라 1988’을 시청했고, 자기 전에 좀 후회했던 것도 같다. 다음 날 나는 집과 멀리 떨어진 시험장에 가기 위해 일찍 낯선 고등학교로 향했다. 교문 앞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우리 학교의 회색 체육복을 입은 후배들이 응원한답시고 꽹과리와 플랜카드로 거의 작두를 타고 있었고(?), 그래서 정신없이 홀린 것처럼 시험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시험장에서의 기억은 굉장히 파편적이다. 화장실을 줄 서서 갔던 것 같고, 밥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던 것 같고, 듣기 시험을 시작하기 전에 침을 여러 번 삼켰던 것 같고, 복도에서 회색 체육복을 마주칠 때마다 하이파이브를 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나와서 나에게 아무것도 먼저 물어보지 않는 가족들과 함께 감자탕을 먹었다. 수능 다음날은 내 생일이었는데 엄마는 미역국을 끓여주셨지만 부정 탄다는 이유로 나 빼고 가족들이 미역국을 뚝딱 비웠다. 어머니, 소녀의 시험은 오늘이 아니라 어제였지 말입니다. 학교는 건물 자체가 마치 하늘에 붕 떠 있는 것처럼 소란스러웠고 나는 그 속에서 요란한 생일 축하를 받았던 것도 같다.

이렇게 아직도 그날들이 선명하건만, 수능 자체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모두가 그럴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수능 시험문제가 기억에 나시는지, 혹은 각 과목마다 시험시간이 몇 분이었는지라도? 솔직히 나는 내가 평생 수능의 기억을 잊지 못할 것 같았는데... 학창시절 내내 그렇게 나를 괴롭혔던 수능이라는 놈은 강산이 채 다 변하기도 전에 내 안에서 가물가물 사라져가고 있다. 다만 정말 신기한 것은, 수능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묶여 있던 여러 조각의 기억들은 아직 선명하다는 것이다. 주말 저녁마다 부모님이 기숙사로 가져다 주셨던 김치볶음밥 도시락이나, 청소 시간에 엑소 춤을 가장 기깔나게 췄던 A의 춤사위나, 지하 독서실에서 당시 유행했던 스노우 필터로 찍은 룸메들과의 엽기 셀카나.. 뭐 그런 것들이 이제 ‘수능’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 추억들은 지금의 나를 지탱해주는 무언가이기도 하다.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지, 10대 때는 수능만 떠올리면 진짜 죽고 싶을 만큼 괴롭기만 했었는데 말이다.

수능에 대해 말한다더니 정작 수능 빼고 다 얘기하는 샛길로 새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뻔한 말들을 조금 해보고자 한다. 수능은 사실 상징과도 같은 것이어서, 이제껏 겪었던, 겪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겪게 될 수많은 힘든 또 다른 이름의 무언가로 대체되어 다시금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다시 질풍노도의 10대 청소년처럼 괴로워하고 끊임없이 그것에 대해서만 곱씹고 말겠지. 하지만 그 힘든 길을 걷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멈춰서기도 할 것이고, 길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도 할 것이고, 배를 내보이는 고양이에게 정신이 팔릴 수도 있다. 그러면, 나중에 또 시간이 흘러 그 길을 되돌아봤을 때 나는 또 그 샛길의 순간들을 떠올리며 다시금 길을 걸을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 미리 미래의 나에게 경고한다, 샛길의 순간을 잊지마 이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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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가 빼곡한 전장

단순하게 '시험'하면 가장 생각나는 영화를 가져왔습니다. 바로 <배드 지니어스>. 주인공 '린'은 태국의 한 유명 사립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한 천재입니다. 지금은 학교에서 전액장학금을 받고 있지만, 이후에 유학과 관련해서는 집안 형편의 문제로 고민이 많았던 린에게 부자 친구 그레이스가 은밀한 거래 제안을 해옵니다. 바로 자신과 친구들의 시험을 대신 풀어달라는 것!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인 린은 점점 대대적이고 광범위한(?) 컨닝을 집도하기에 이르는데...

태국, 대만 등의 나라도 우리나라처럼 치열한 입시로 유명한데요, 그렇기에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입시'라는 글자가 빼곡한 전장에서는 '린'처럼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가장 유리할 것 같지만 사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점이 이 영화를 보면서 씁쓸하게 다가오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국가마다 시차가 다르다는 점을 이용해 여러 부정행위들이 일어났던 SAT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스토리가 스토리인 만큼 장르는 '케이퍼 무비'입니다. 케이퍼 무비(caper movie)란, 범죄영화의 하위 장르로, 범죄과정이 주흐름이 되어 무언가를 강탈하거나 훔치는 내용을 주로 다룹니다. 하이스트 필름(heist film)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런 장르는 스릴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아시죠? 시험과 관련된 스릴을 느끼고 싶다면 <배드 지니어스>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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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노래: 민수 - 커다란(XX LOVE)

'시험' 하면 또 바로 생각나는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과 관련된 노래 하나를 추천 드립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이 영화도 한 번 소개해 드리고 싶군요. 잔잔한 멜로디지만 가사가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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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한강은 불꽃놀이 중>은 <시티 픽션, 지금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에 실린 단편입니다.

**아래로는 책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며,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은 이탤릭체로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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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자본주의의 룰 안에서 정상범주에 드는 것이 일종의 시험이라고 한다면, 고득점자가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심플하게 ‘더욱 많은 부를 축적하는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여기 부동산 강좌를 들으며 악착같이 서울에 집 한칸을 마련해보기 위해 애쓰는 주인공이 있다. 투자에 성공해 큰 몫을 챙기고 싶다. 한강뷰의 아파트가 제 소유임을 말하며 대시하는 남자에게 점점 마음이 기운다. 결국 그 남자(남자의 이름은 연석이다)에 대한 ‘나’의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가고, 연석의 ‘진지하게 만나보자’는 제안에 동의한다. 2주년을 맞아 ‘나’는 연석에게 제대로 된 이벤트를 선물하고자 그랜드 하얏트 서울 식사권을 중고 거래하기로 한다.

그랜드하얏트에 가자. 월급에 비해 좀 무리한 지출이기는 해도 2주년 기념일에 연석과 다시 한강을 보고 싶었다. 내 또래의 연인들에게 ‘2년’은 결혼을 하거나 헤어지거나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됐음을 말해주는 시간이었다. 이 구절에서, 또 아래의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 주인공은 ‘정상성’을 선망하고 집착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아까워하면서도, 돈을 들여 연인과의 행복한 2주년을 거래한다. 심지어 10장짜리 식사권 판매글에 컨택하며 사장의 돈으로 8장을, 자신의 돈으로 2장을 사는 알뜰함까지(!) 그게 훗날 연석을, 또 연석이 가진 아파트를 소유하는 데 한발짝 더 다가서는 투자라고 믿는다. 

「나는 한글 창을 띄우고 견고딕체, 글자 크기80으로 이렇게 써넣었다.

문을 닫으세요. 돈이 샙니다.

A4용지에 출력해 헌 종이를 떼고 새로 붙여놓았다. 화장실에 다녀오던 사장이 문을 힐끗 보더니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p.1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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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당하셨습니다

두둥. 그런데 구매하겠다고 연락한 그랜드하얏트 호텔 식사권. 그게 사기래요. 판매자가 연락은 되는데 뭔가 이상해요. 일반 등기로 보냈다는데, 동생이 대신 보내긴 했다는데, 그런데 웬걸… 기다려서 열어본 봉투가 텅 비어있다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요. 

‘나’는 당장 판매자 양 승 미 씨에게 전화를 건다. 화가 나고 억울해서 따져야겠는데 ‘죄송하다, 돈은 돌려드리겠다’는 대답만 돌아오니 더 미칠 노릇. 정말 답답한 건 10분만 더, 20분만 더 기다려달라더니 정말 돈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은행에서 두번에 나눠 송금되긴 했지만, 입금한 사람은 양승미 하나였다. 

‘나’는 찝찝한 기분을 해소하지 못하고 곧장 차를 몰아 봉투의 발송지 주소로 향한다(!) 그러나 도착지는 오래되고 낡은, 버려진 동네였다. 대문 앞이나 담벼락마다 낡은 세간이 아무렇게나 방치된 그런 동네. 때문에 이름도 얼굴도 몰랐던 양승미란 인물에 대한 혐오감은, ‘나’ 안에서 보다 형용할 수 없는 형태로 실체화 된다. 조금이라도 싸게 사려던 사람이, 그것마저도 사기를 쳐서 급전을 해결해야 했던 사람에게 미묘한 ‘닮음’을 느끼는 순간이다.

「나는 신호등이 주황색으로 바뀌면 브레이크를 밟았고, 초록색으로 바뀌면 다시차를 몰았다. 이따금 숨을 참았다. 뭔가가 가슴을 짓누르다가 반대로 저 안에서부터 역류하는 기분도 들었다. 」

「양승미는 낡은 동네에서 밀려나고 서울에서도 밀려나 결국 멀리 떠나야했는지도 몰랐다. 사는 게 어쩔 수 없어서, 정말 어쩔 도리가 없어서 중고나라에 가짜 판매글을 올린 건지도 몰랐다. 한강변에 있는 연석 명의의 아파트. 언젠가 그곳이 재건축된다면 거기 살던 사람들 중 누군가는 어디로 가게 될까. 어디로 가야 할까. 이런 생각들은 초고층 아파트 창밖으로 보이는 멋진 야경을 보며 다 잊게 되겠지. 잊고 살겠지.」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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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의 두 얼굴

‘나’는 어쩌다 이런 인물이 되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물론 복합적인 이유가 있으며, 단적인 기준으로 누군가를 재단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임을 기억하지만-아마 풍족한 환경에 대한 결핍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갖지 못한 것을 원하는 건 당연한 이치니까. 가난에 대한 혐오가 ‘나’를 이런 어른으로 자라게 했을 것이다.

노동소득이 자본소득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나는 회사를 다니고 첫 월급을 받으면서 이런 말들을 더욱 많이 들었다. 주식, 코인, 부동산, NFT 등등 투자의 대상이 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더욱 자주, 풍성하게 들었다. 실제로 큰 이익을 본 사람을 만나기도 했고….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느낀 건 “00씨는 뭐 안하세요?” 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이런 과업들이 일종의 시험이라면 절대 고득점자는 못 되겠구나 싶었다. 투자로 큰 이득을 본 사람들을 부정적인 프레임 속에 가두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부럽고, 가끔 어떻게 하셨나요 비법 좀, 하고 귀동냥을 해야 할 것 같은 조급함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러나 태생적으로는 역시 이런 쪽으로는 포기가 빠르다. 만 25세에 매일 새벽2시에 자게 된 비결 이런 건 캡션에 공개할 필요도 없이 무료로 풀어줄수 있는데 

아무튼 다시 책 얘기로 돌아와서,

「강변을 따라 도시의 불빛이 영원히 끝나지않을 것처럼 이어졌다. 아름답고도 무서운 풍경이었다. 태양이 세상 밖으로 잠기며 하늘은 점점 붉게 타들어갔다. 검붉은빛이 높은 빌딩을,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강물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온통 화염에휩싸인 세상을 바라보며 나는 몸을 떨었다. 」p.184

양승미의 흔적도 찾지 못하고 나는 차를 타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헛헛한 마음을 숨기려 애써보지만 역시 쉽지 않다. ‘화도 나고 쓸쓸한 것도 같고 외롭기도 서글프기도 허탈하기도 한’, ‘이 감정에는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나’ 고민하며 창밖을 본다. 그리고 다시 연석에게 전화를 건다.

책에 실제로 불꽃놀이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특정 시기에 이벤트성으로 발생하는 불꽃놀이 대신 매일같이 펼쳐지는 오후 5시, 한강의 이 불꽃놀이는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각자의 사정에 따라 다르게 비춰질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노을을 머금은 멋진 야경으로, 누군가에겐 영원히 다다를 수 없어 괴로운 욕망의 불꽃으로.     

+ 위 문단을 마지막으로 끝내려다, 이번 호에서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을 위해 조금 덧붙여본다. '정상성'이 19세기 벨기에 통계학자 아돌프 케틀레가 평균값에서 고안한 것으로, 생긴 지 200년밖에 되지 않은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한다. 투자뿐만 아니라 취업, 결혼, 사회적 지위 향상 등등. 수많은 시험대를 모조리 제대로 잘! 통과야할것만 같은 강박에 휩싸일 때마다, 그렇지 않아도 세상은 굴러간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이것마저 잘 안될 때는? 속으로 아모르파티 열창하면 좀 나아집니다. 진짜임. 이 글을 읽는 모두를 응원합니다. 뭐가 됐든 내 방식대로 살아내면 그만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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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노래: 미스티 블루 - 8월의 8시 하늘은 불꽃놀이 중 

오늘 소개한 소설 제목의 기원이 된 노래입니다! 하루를 정리할 때 듣기 좋은, 신비한 분위기의 곡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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