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소개합니다, 나의 O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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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방구석디제이

방구석 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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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삶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이 말을 여기서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대학원 수업과 학부 수업이 겹치던 2021년 겨울. 나는 이 말에 어울리는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사실 고딩 때부터 독일어를 해왔지만 딱히 열정도 애정도 없었다. 그런데 왜 대학원까지 갔냐고 묻는다면,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술잔을 부딪치면서 “에휴, 나중에 뭐 대학원이나 가야지”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는데 실제로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니 그게 현실이 되어 버렸다. 독문학은커녕 독일에 대해서도 잘 모르던 나는, 막상 대학원에 오고 나니 졸업이 걱정됐다. 나 진짜 젬병인데, 논문 쓰고 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2021년 겨울, 비교문학 수업에서 ‘크리스티안 펫졸트’라는 감독 발표를 맡게 됐다. 내가 독문과라 독일 영화감독을 배정해주신 것 같은데, 저도 잘 몰라요, 선생님. 하지만 이걸 계기로 사랑에 빠졌다. 그래, 아무튼 논문은 이걸로! 내 미래의 길을 점지해주신 선생님께 한없이 감사한 나날이 계속되던 와중에.. 올해 여름, 나는 독일에서 주제를 고민하다가 대충 감을 잡아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뿔싸, 하필 그 주제로 바로 몇 달전에 논문이 나오다니, 그리고 그게 선생님이라니. 선생님은 아마 모르실 테지요, 선생님 때문에 울고 웃는 한 학생이 있다는 것을...

결국 졸업을 한 학기 미뤘다. (사실 선생님은 핑계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오늘 엄마와 통화하는데 꼭 졸업을 하라고 신신당부하신다. 땀이 삐질삐질 난다. (크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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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 Petzold만의 역사영화

역사적인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를 떠올릴 때 흔히 거시적인 무언가를 다룰 거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작년에 내가 변요한 배우 때문에 극장의 문이 닳도록 드나들어 관람했던 <한산>처럼 엄숙한 분위기이고 역사 자체가 직접적인 소재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펫졸트의 역사영화는 조금 독특하다.

먼저, 보여주는 것보다 들려주는 것이 더 많다. 인물들의 사소한 일상과 대화에 펫졸트가 말하고자 하는 역사의 시점들이 들어가 있다. 겉으로는 정통 로맨스를 표방하고 있지만 미시적인 순간들에 역사를 녹여내 영화에 이중적인 레이어를 쌓는 것이다. (그리고 들려주기를 잘하는 감독이라 그런지, 음악 또한 잘 쓴다. 특히 <피닉스>에서 ‘Speak low’가 나오는 장면!)

또 그의 영화들 중에는 시점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역사 영화는 항상 과거에 집중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그의 영화는 시점을 뭉뚱그려 이것이 과거의 문제만이 아님을 각인시킨다. 우리가 끊임없이 역사를 재인식, 나아가 재해석하게끔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트랜짓>은 과거와 현재의 난민 문제를 이 불명확한 시점을 통해 연결 짓는다. 이외에도 여러 특징들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잘 드러난 게 바로 ‘역사 3부작’으로, <바바라>, <피닉스>, <트랜짓>이다. 이 3부작은 또 다른 말로 ‘억압된 시대의 사랑 3부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억압된 시대의 사랑’이라니, 얼마나 시적이고 낭만적인 명명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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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베네, 연락 주세요.

한 여성 A, 어느 날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 낯선 병원에서 눈을 뜬 A는 자신이 끔찍한 사고로 인해 전신 성형 수술을 해야 했음을 깨닫는다. 수술 이후 좌절에 빠져있던 그는 문득 자신이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남편에게 돌아가기로 마음 먹는다. A가 눈을 뜰 때까지 옆에서 도와주고 유일하게 과거의 인연이었던 친구 B는 A가 남편을 찾아 돌아가는 것을 못마땅해 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을 찾기 위해 그는 갖은 노력을 하고 결국 남편을 찾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남편은 이미 아내를 잃었다고만 생각할 뿐, 아내와 닮은 A가 자신의 아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A에게 위험한 제안을 한다. 바로 자신의 아내가 최근에 죽었으니 함께 사망 보험금을 타자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A는 남편이 바로 자신에게 일어난 사고와 관련이 있음을 깨닫는다. 엄청난 배신감에 절망에 빠진 A,,, 과연 A의 사랑과 삶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왜 너는 나를 만나서~)

이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펫졸트의 <피닉스>라는 영화를 내 맘대로 막장 스토리로 각색한 버전이다. 큰 틀은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니 만약 조금이라도 흥미가 일었다면 꼭 보시는 것을 추천 드린다. 후회는 하지 않으실테니.. 만약 독일 영화가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사실 펫졸트 감독의 신작 <어파이어> 또한 아직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3부작 시리즈를 즐겨 만드는 그의 ‘원소 3부작’ 중 2번째 영화이다. 첫 번째 영화 <운디네>가 ‘물’을 사용했다면, ‘불’을 사용한 이 신작은 예술병에 걸린 한 찐따(?)에 대한 이야기이다. 좀 궁금하지 않으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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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노래: Wallners - In My Mind

펫졸트 감독의 신작 <어파이어> 삽입곡. 몽환적인 분위기. 월요일 아침, 사람들 속에서 몰래몰래 머리를 흔들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좋은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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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결의 미학

잘 쓴다는 것은 읽기 쉽게 쓰는 것이다. 그렇다고 오래도록 믿어 왔다.

정용준 작가의 문장은 간결하고도 힘있게 뻗어나가며 페이지를 채운다. 특히 “유령”에서 주인공이 죄수가 된 범죄 경위를 서술하는 2장의 서문 부분이 압권이다. ‘열두 명이 죽었다.’로 시작하는 문단은 사건 당일의 목욕탕을 생생히 묘사하기에 충분하게 느껴진다.

「..(중략).. 열두 명이 죽었다. 당 총재를 비롯한 현직 국회의원 셋, 청와대 관련 인사 넷, 경호원 하나, 일반인 셋. 그날은 전당대회가 있었고 식사를 마친 의원들은 온천에 갔다. 경찰이 도착했을 땐 타일 바닥 곳곳에 피가 실개천처럼 흐르고 있었고 아홉살 난 소년이 냉탕 대리석 계단에 주저 앉아 울고 있었다. 붉게 변한 탕 속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고 있는 고요한 표정의 남자.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주인공은 이 일련의 사건으로 474번의 죄수번호를 부여받고 수감된다. 이후 벌어지는 일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신비롭고 날카롭게 풀어낸 “유령”은, 정용준 작가의 다른 책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에 실린 “474” 단편의 이야기를 개작해 쓰였다. 기회가 된다면 꼭 읽어보시길. 시간이 훌쩍 지나 있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카페에 앉아 한 두 시간 내외의 짧은 독서를 즐기고 싶은 날이라면 “세계의 호수”도 추천한다. 스위스의 장크트갈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나’와 ‘무주’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방인이자 이민자로서 느끼는 감정들을 가감없이 느낄 수 있다. 과장 없이 담백하게. 솔직하고 진솔하게 말이다.

「구름 한 점 없는 오후의 강한 햇살이 무주 위로 쏟아졌다. 무주는 빛에 젖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휘청휘청 걸어 물속으로 들어갔다. 소리를 내며 배영을 했다. 그러고는 느리고 꾸준하게 호수 끝까지 헤엄쳐 갔다. 멀리 사라질 동물처럼.

자유롭게,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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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마음을 쓰는 자

선악의 경계에서 인간의 내면을 헤아리는 일. 정용준 작가를 (감히) 타인에게 소개할 기회를 얻는다면 그런 걸 잘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악인을 묘사하는 것은 ‘악인은 누구인가’를 정의하는 일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악’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또 누구인지. 우리는 그것들을 오래도록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가. 어쩌면 태곳적부터.

주변에서 ‘악’을 목도할 사건이 많은 해였다. 거리 곳곳에서 일어난 칼부림도 그렇고, ‘나’의 불편에 대한 보상 욕구가 타인의 목을 조르고 안위를 해칠만큼 커져버린 일들도 더러 있었다. 사람마다 ‘악함’는 기준의 정의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생존의 위협을 가하고, 평안을 해치는 일들에 본능적으로 신경이 곤두서는 것은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고개 돌리지 말아야 한다. 피하지 않고 작가가 썼듯이 피하지 않고 읽어야 한다. 악마에겐 침묵할 권리가 없고 우리에겐 악을 모를 권리가 없다.”」

“유령”의 서평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표현된 악을 고스란히 수용하는 일. 고개 돌리지 않고 마주하는 일은 어렵지만 필요하다. 

유령 외에도,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의 표제작과 그에 실린 단편 “이국의 소년”에서 정용준은 여러 악인을 등장시킨다.때로 그들은 나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나를 죽인 퇴역군인이기도, 부대 내 괴롭힘의 가해자들이기도 하다. 사회의 여러 단면을 꼬집고, 그 틈에서 나오는 악에 대해 진솔하게 말하는 이 작가의 단단함을 자연히 동경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중략).. 하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쓸쓸한 일입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어두운 거실에 앉아 기묘하게 부풀어오르는 붉은 땅을 봅니다. 그 밑에 파묻힌 죽은 생물들이 끓고 있어요. 젖은 모래는 바위처럼 단단해요. 그곳은 뜨겁고 긴 새벽입니다.」

이국의 소년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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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작을 다정하게 대한다면

소설 쓰기의 자세에 관해 정용준 작가가 해준 말이 있다. “소설을 쓰고 읽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하고 싶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럴 가치가 있어요. 당신이 소설을 그렇게 지킨다면 소설 역시 당신을 그렇게 지켜 줄 것입니다.” (소설 산책, 2022) 에서 나온 이 구절이 그것이다.

글쓰기를 하다 지친 날에는 이 말을 떠올린다. 창작을 한다는 것은 결핍을 해소하고, 또 무언가 빠져나간 자리를 끊임없이 채우는 행위라 생각한다. 나의 일부를 조금 떼어내고 다시 둥글게 빚어 붙인다. 호빵맨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하면 내가 좀 더 단단해지는 기분이랄까. 

얼마 전, 이 구절을 실감케 하는 일이 있었다. 짧게 쓴 단편 소설이 갓 1천뷰를 돌파했을 때였다. 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이 글을 봤으니 충분히 부끄러웠고, 그러므로 내릴 때가 됐다고 여겼다. 허나 그날 밤 삭제를 하려고 창을 켰을 때 누군가 ‘주기적으로 보러온다’며 남긴 댓글에 나는 그만 하던 것을 멈추고 말았다. 아직도 그 글은 모 플랫폼의 내 채널에 남아 있다. 지우지 않을 테니 다음에도 놀러오세요. 몇 번이고 놀러와도 됩니다.

우리가 글을 대할 때의 마음과 태도가 그것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를 결정한다. 내가 그것을 다정하고 진실되게 대할수록 글도 나를 그렇게 대해준다. 정용준 작가의 이 생각은, 비단 글 뿐만 아니라 다른 상황에서도 적용된다고 믿는다. 글이 나를 배신할 것 같고 도망갈 것 같고 뜻대로 되어주지 않을 것 같지만 예상 외로 글은 그곳에 가만히 있어주는 편이다. 그 자체로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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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노래: Ryuichi Sakamoto - Acceptance

어쩐지 속세와 멀어지고 싶을 때 들으면 좋을 거라 느꼈던 곡. 몰락한 왕조의 마지막 순간을 담는다면 꼭 BGM으로 넣고 싶은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