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란비
작성자 방구석디제이
방구석 DJ
오란비

☔비와 기분의 상관관계
조금 옛날노래라 제가 이 노래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에 대해 잘 기억하기는 어렵지만, 저는 '비'라고 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노래가사가 있습니다. 바로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이라는 노래의 첫소절인데요.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어떤 사람들은 비가 오면 센치해지거나 곧잘 우울해지고, 어떤 사람들은 비가 오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편안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은 일종의 취향차이일지도 모르겠으나 비와 기분의 상관관계에는 과학적인 부분도 존재한다고 하는데요, 몇 가지 살펴보자면,,,
소위 '백색 소음'(/핑크 노이즈)이라고 하죠, 일정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반복되는 소음이지만, 우리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이 소음처럼 빗소리는 뇌파의 주파수를 안정시켜 편안함을 느끼게 하고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가 올 때 오는 소리만이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비가 오면 공기 중의 수증기로 인해 산소포화도가 낮아져 조금 더 편안한 느낌을 느낄 수 있고, 젖은 흙냄새 또한 우리에게 진정효과를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편안함 속에서 우리의 뇌는 좀 더 '열일'을 하여 기억의 작동을 활발히 가동시키는데요, 그렇기에 우리가 비오는 날 느꼈던 어떤 감정이나 과거의 경험들이 더 잘 떠오를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비가 오니 당신이 생각난다'는 이 노래 가사는 따지고 보면 굉장히 과학적인 셈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이러한 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편안함을 넘어 울적하거나 우울함을 느끼게 될 수도 있겠죠! 또 비가 오는 날에는 외부 기압이 낮아져 내부 기압이 높아지기 때문에 몸이 조금 불편하거나 아픈 사람들은 더 예민해질 수도 있는거고요.
여러분은 어느 쪽에 좀 더 가까운 편이신가요? 저는 왔다갔다하는 편인데요, 이러한 내 기분이 날씨 - 나아가 호르몬이나 기압에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면 뭔가 묘한 느낌이 들고, 어디까지가 나의 의지인 것일까? 싶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
🌧️우리 모두의 클리셰: 비와 로맨스
아무튼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당신'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로맨스 영화에서 비가 내리는 장면은 아주 클리셰하게 집어넣는 일종의 명장면을 위한 필수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비'와 '로맨스'하면 동시에 떠오를 몇몇 영화들의 장면이 지나가는데요, <어바웃 타임>, <노트북>류의 영화들은 물론이고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이나 <클래식>과 같은 영화들을 떠올리는 분들도 꽤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혹은 영화의 누군가가 떠오르기도 하죠. 예를 들면 우산을 들어올리며 씩 웃어보이는 강동원과 같은 사람 말이죠!
저는 아주 오래된 영화이긴 하지만 비와 로맨스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하나 있는데요, 2002년에 개봉했었던 <연애소설>입니다. 이은주, 손예진, 문근영, 차태현 등 유명한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었던 이 영화는 풋풋한 삼각관계를 주제로 하고 있는데요, 거기에 2000년대 초반에 흥행했던 '청춘', '시한부', '사진&편지'과 같은 소재들도 잘 버무려져 있습니다. 이 영화의 삼각관계에 해당하는 '수인', '경희', '지환'이 (아마도) 대관령 언덕에서 외투를 둘러쓰고 비를 피하는 씬이 저에게는 '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꽤 어릴 때 이 영화를 처음 보고 예상치 못했던 반전에 깜짝 놀라기도 했었는데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 영화가 마냥 단순한 삼각관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환'이라는 한 명의 남성과 '수인', '경희'라는 두 명의 여성으로 이루어진 이 삼각관계는 흔히들 생각하기에 한 명의 남성을 두 명의 여성이 좋아하는 삼각관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 영화도 겉으로는 그것을 표방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자면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미묘한 장치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다양한 감상을 위해 많은 것을 스포하지는 않을게요! 다만 이와 관련해 아주 흥미롭게 글을 전개한 조혜영 평론가의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라는 글의 일부를 인용하며 오늘의 레터메일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한국 장르영화에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성소수자들의 가시화가 갑작스럽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한정된 시공간에 허용된 젊은 여성들의 낭만적 동성애는 대중적 정서를 크게 위협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움을 가미해줄 수 있는 장르적 도구로 종종 사용되었다.
* (...) 영화는 상상 가능한 일부 관객들은 여성 동성애의 비밀을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게 하면서도 대부분의 관객들에게는 비밀이 폭로되지 않도록 의도적인 오인 장치들을 흩뿌린다. 그것은 스테레오 타입을 뒤집는 것이다.
* 두 여자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겨루거나 혹은 우정 때문에 양보하는 삼각 구도로 보였던 영화는 수인의 사랑의 대상이 경희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서사를 재구성하게 만든다. 언제 서사를 재구성하게 되느냐는 관객마다 다를 수 있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서 지환의 주관적인 플래시백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 영화를 관객들 역시 다시 쓰게 된다. (...)
제가 몇몇 영화들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여러분이 '비' 혹은 '장마'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영화의 장면들에는 어떤 게 있나요? 로맨스보다 스산한 공포를 떠올리시는 분들도 계시겠죠! 제가 호러물쪽으로는 문외한이라,,, 여러분의 많은 추천 바랍니다! (하지만 보겠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겠군요😂)
-
🎵오늘의 노래: 김예림(림킴) - Rain
제가 '비'하면 생각나는 노래 2가지는 바로 김예림의 <Rain>과 정인의 <장마>인데요, 오늘 더 끌리는 노래로 선곡해보았습니다. 오랜만에 이 노래를 함께 들으며 빗소리를 즐겨보아요~!

🏚️한옥 처마와 빗소리
여러분은 비 오는 날을 좋아하시나요? 이 질문을 하면 제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실내에서 보는 비는 좋아한다"고 대답하곤 합니다. 저도 공감해요. 긴 장마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는 더더욱, 쏟아지는 비를 직접 맞는 것 보다는 멀리서 그걸 관조하는 것이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의 저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편인데요.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7살 때쯤인가, 가족들과 높은 산에 올라갔다가 폭우를 만나서 그대로 고립될뻔 했던 적이 있거든요. 그 후로 길을 걷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종종 두려움에 떨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일을 계기로 더 이상 비를 무서워하지 않게 됐는데요. 때는 바야흐로 중학교 2학년! 저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한옥마을로 1박 2일 캠프를 떠났습니다. 여러 명이서 수다를 떨고 베개싸움을 하다가 밤을 샜는데, 도중에 밖에서 비 내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곧장 문을 열고 나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처마에서 비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주변이 엄청 조용한 한밤중이었는데, 마루에 앉아 친구와 한참동안 그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쏴아아-하고 쏟아지는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더라고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어서 그럴까요? 어떤 기억들은 시간이 오래 지났어도 뚜렷한데 제게는 그날이 그렇습니다. 덕분에 비를 덜 무서워하게 되기도 했고 말이죠!
☔불행을 팔고 행복을 사는 곳, 장마 상점
장마를 주제로 정하고 나서 '비'를 메인으로 다룬 소설이 여럿 떠올랐습니다. 그중에서도 직접적으로 '장마'를 재미난 소설적 장치로 녹여낸 책이 있어 소개해드리려고 해요. 유영광 작가의 소설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입니다.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은 <달러구트 꿈 백화점>과 비슷한 힐링 판타지 소설이에요. 판타지 장르지만 또 너무 판타지스럽지는 않은 느낌이랄까. 책에 등장하는 위로가 너무 직접적이거나, 다소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책을 일기는 해야 하는데 무거운 주제는 싫으신 분들에게 추천드려요! 아주 쉽게 쓰인 책이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전혀 없고, 말하고자 하는 바도 직접적이고 명확한 소설입니다.
소설의 도입은 이렇게 시작해요.
「 레인보우 타운의 어느 오래된 폐가.
언젠가부터 이곳에 관해 전해져 오는 괴이한 소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사연을 이 낡고 허름한 폐가에 편지로 보내면, 어느 날 정체 모를 티켓 한 장이 집으로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뒷부분은 더 얼토당토않았다. 장마가 시작되는 날, 티켓을 가지고 폐가로 찾아가면 자신의 삶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고 했다. 」
주인공 세린은, 삶에 염증을 느끼다가 위 내용을 듣고 자신의 사연을 편지로 써서 보냅니다. 그 대가로 '골든 티켓'을 얻어 자신의 삶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갖가지 구슬들을 갖게 됩니다. 구슬을 통해 세린은 '좋은 대학을 나온 삶', '돈이 아주 많은 삶', '개인 카페를 운영하는 삶',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삶' 등등 경험해보고 싶은 인생을 사는 자신의 모습을 체험해봅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에게 소중한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죠. 말하고 보니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와도 비슷하네요!
세린이 구슬을 통한 모험을 떠나기에 앞서, 소설은 독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불행을 팔아서 (자신의 사연을 써서 편지를 보내는 행위) 행복을 얻는 (구슬을 통해 원하던 삶을 체험하는 기회) 일이 있다면 행하겠느냐고 말이죠. 또한 장마의 특성을 잘 살려서, '이번 장마는 며칠 동안 지속된다'는 언질을 미리 주기도 합니다. 장마가 지속되는 기간 동안만 구슬의 효력이 지속되거든요 😂
🌧️그림자가 일어서는 세상에 맞서는 방법
한 권만 소개하고 넘어가긴 아쉬워서 한 권 더 준비했습니다. 황정은 작가의 <백의 그림자>인데요. 이 책에는 비라든가 장마,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묘사하는 문장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책을 읽는 동안 가랑비에 젖듯 축축해지는 기분이다'라는 감상평을 남기는 분도 계시고요. 일례로 하기와 같은 부분입니다.
「 팔월엔 비가 내렸다. 거의 매일 내렸다. 퍼붓듯 쏟아지다가 반짝 갰다가 꾸물꾸물 어두워졌다가 툭툭 떨어지다가 다시 한차례 퍼붓고 점차 가늘어져서 그 비가 밤새 이어지는, 뒤끝 있는 날씨가 계속되었다. 」
'뒤끝 있는 날씨'라니! 요즘처럼 한 달 내내 비그림이 가득한 일기예보를 묘사하기에 참 적절한 단어가 아닌가 합니다. 책은 '은교'와 '무재', 두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요. 둘의 시선을 따라 철거를 앞둔 전자상가에서 일하는 인물들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소설 내에서 '그림자'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잔인한 현실, 압박감 등을 나타내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곧 무너질 삶의 터전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불쑥불쑥 고개를 들이미는 그림자들. 그 그림자들에 각자의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환상이나 환영으로 묘사되기에는 약자들이 겪는 일상의 폭력을 보다 실질적으로, 덤덤히 묘사하고 있어 무시하기가 어렵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등장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삶에 동반되는 슬픔과 고통의 무게로 묘사되기도 하죠.
특히 책에는 그림자가 '일어난다'는 표현이 등장해 강한 인상을 남기는데요. 무언가 솟구치거나 일어나는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볼까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누군가 일어서면 주목 받게 되는 것처럼, 그들의 솟구침과 일어남 또한...주장을 하려는 것인지 분노의 표출인지 우리는 책을 읽는 동안 주목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위 내용과 별개로 책 속에 등장하는 은교와 무재의 대화가 언제 읽어도 참 위로가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긴 장마 동안 마음까지 시들지는 말자는 취지에서 둘의 대화를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
-
「 무재 씨는 반으로 자른 계란을 집어서 내 그릇에 넣어주고 나머지 반쪽을 입에 넣었다. 멀리 떨너진 면옥의 벽에 걸린 거울을 보니 무재 씨의 맞은편에서 나는 얼굴을 매우 붉히며 앉아 있었다. 왜 그렇게 땀을 흘리느냐고 무재 씨가 물었다. 탕이 너무 뜨거워서, 라고 말하며 나는 냅킨으로 땀이 밴 이마를 눌렀다. 」
-
「 전부 먹죠.
와.
좋아요?
네.
좋다니까 좋네요.
나도 좋아요.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도 경계를 넘었다. 」
-
🎵오늘의 노래: 에픽하이 - 우산(feat. 윤하)
이상하게 비가 오면 유난히 자주 생각나는 노래들이 있지 않나요? 오래된 노래인데도 비 오는 날이면 플레이리스트에서 꺼내 듣게 되는 노래를 이번 주 추천곡으로 선정했습니다. 긴긴 장마를 다함께 잘 버텨보아요 :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