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오디세이’는 한국에서 천만 영화가 되었나
글. 김현수(영화 칼럼니스트)
사진 출처. 유니버설 픽처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가 놀라운 흥행세를 이어가며 지난 9월 6일, 개봉 한 달여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인터스텔라’에 이어 놀란 감독의 작품 중 두 번째 국내 1,000만 달성 기록이다. 이 영화는 올해 개봉작 중 전 세계 박스오피스 2위에 올랐으며, 한국은 미국, 영국, 중국, 프랑스에 이어 다섯 번째로 이 영화를 많이 관람한 국가가 됐다. 여전히 상영 중인 만큼 곧 프랑스 흥행 기록도 따라잡을지 모른다. 서양 인문학의 토대를 마련한 그리스 로마 신화 시대의 영웅 서사에 2026년 한국 관객이 이토록 열렬한 응원을 보낸 이유는 뭘까.
산업적 측면에서는 톱스타의 멀티 캐스팅과 거장 감독의 연출력, 거대 자본이 투입된 블록버스터라는 점이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특히 OTT와 유튜브, SNS로 대변되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 속에서 입지가 좁아지던 극장의 가치를 재확인시켜줬다는 점에서 ‘오디세이’의 흥행기록은 더욱 특별하다. 영상 콘텐츠를 소비하는 한국 관객의 정서와 극장의 미래까지 짚어볼 수 있는 ‘오디세이’의 결정적 흥행 요인 4가지를 키워드로 정리해봤다.

브랜드 파워 : ‘놀란’이라는 장르
최근에는 잘 쓰이지 않는 표현이지만, 과거에는 관객이 배우의 출연 여부만으로 관람을 결정하면 ‘티켓 파워’가 보장된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톱스타가 출연해야 영화 흥행이 보장되곤 했다. ‘은막의 스타’라는 표현도 그래서 등장했다. 당시 극장 문화는 스타 중심이었다.
요즘 젊은 관객은 배우나 감독의 이름만을 보고 극장으로 향하지 않는다. 장르, 소재, 스타일 등 영화를 판단하는 기준이 과거보다 훨씬 까다로워졌기 때문에 꼼꼼히 따진다. 2000년대 이후 극장 산업을 주도했던 수많은 슈퍼히어로 장르를 다시 떠올려보자. 캐릭터나 배우보다 해당 영화의 연출 감독 이름을 먼저 기억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감독의 이름 자체가 하나의 장르처럼 칭송받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그중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는 여전히 대중이 주 연배우 크리스찬 베일, 히스 레저보다 놀란 감독의 이름을 먼저 기억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연출 전략 덕분이다. 그는 만화적인 슈퍼히어로를 인간적인 고뇌와 아픔을 지닌 인물로 재해석함으로써 현대 관객이 ‘쫄쫄이 슈트’ 뒤에 숨겨진 인간성을 들여다보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해줬다. 그가 매번 새롭게 들고나오는 영화적 기법과 낯선 소재에 따라 관객의 취향 차이는 갈릴지언정, 작품의 만듦새 자체에 대한 ‘호불호’ 논쟁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상업적 완성도를 보증하는 하나의 고유명사로 자리 잡았 고, ‘오디세이’ 흥행을 견인한 첫 번째 키워드로 꼽을 만하다.

고전 영웅의 재해석 : 현대적 고뇌를 품은 아버지상
‘인터스텔라’의 주인공 쿠퍼(매튜 맥커너히)는 딸에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우주로 떠나지만, 지구로 돌아올 연료를 잃는 위기를 겪는다. ‘오디세이’의 오디세우스(맷 데이먼)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가족 품으로 돌아가려는 절박한 선택의 기로에 선 인물이다. 호메로스의 원작 속 오디세우스가 위기 속에서도 달콤한 환대와 모험을 즐기던 지략가였다면, 놀란의 오디세우스는 뒤늦게 과오를 깨달은 나약한 인간이다. 그는 원작 속 오디세우스의 여정을 고통스러운 속죄의 여정으로 각색하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 그가 겪는 도덕적 갈등이 너무나 현대적인 방향의 재해석이라 비판받기도 했지만, 아버지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놀란 감독의 일관된 주제의식을 읽을 수 있다. ‘제우스의 법’이라는 신의 섭리를 거스르며 트로이인을 학살한 오디세우스는, 저승(하데스)의 문턱에서 원혼들과 마주하고 또 절대 들어서는 안 되는 세이렌의 노래를 듣기를 자처하며 잘못된 과거의 결과와 뼈아프게 맞닥뜨린다.
영화가 개봉하고 많은 관객과 평론가들이 오디세우스의 고뇌와 속죄에 대한 의미를 분석했지만, 고뇌하는 영웅이야말로 놀란 감독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캐릭터다. 딸을 향한 절박한 부성애로 시공간을 유영하던 ‘인터스텔라’의 쿠퍼,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원자폭탄 개발의 주역이 된 채 도덕적인 죄책감에 사로잡힌 ‘오펜하이머’의 오펜하이머, 사적 제재가 또 다른 괴물 조커를 탄생시켰다는 번민에 시달리던 ‘다크 나이트’의 브루스 웨인까지, 그들은 모두 결핍과 부채감을 동력으로 질주하는 인물들이다.
놀란 감독이 3,000년 전 신화 속 영웅의 이야기 속에서 ‘처절한 가족 드라마’를 발견해낸 점에 주목하자. 아버지의 기나긴 부재 속에서 구혼자들의 위협에 맞서 어머니 페넬로페(앤 해서웨이)를 지켜내야 했던 아들 텔레마코스(톰 홀랜드)의 간절함은, 평생 아버지를 기다리며 인류를 구원해낸 ‘인터스텔라’ 머피(제시카 차스테인)의 그리움과 거울처럼 겹쳐진다. 한국 관객에게 익숙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서사를 현대적 도덕률과 가족애라는 보편적 정서로 치환해낸 각색은 두 번째 흥행 키워드다.

이야기의 근본적 매력을 되살린 시각적 스토리텔링
숏폼 콘텐츠가 넘쳐나는 요즘, 모든 영화감독의 지상 과제는 2시간 넘는 시간 동안 관객이 지루할 틈 없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놀란 감독은 오래전부터 기승전결이 뚜렷한 선형적 스토리텔링 방식을 뛰어넘는 영화 형식의 한계를 확장해왔는데, 그 시도가 현대 관객을 사로잡았다. 예를 들면, 두 개의 시간대가 역순으로 배치되어 결말에 이르면 충격적인 반전을 선사하는 ‘메멘토’부터, 꿈속의 꿈, 이야기 속 또 다른 이야기가 중첩되며 무의식 세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인셉션’의 구조, 서로 다른 시간대의 군인들이 겪는 위기를 동시적으로 엮어낸 ‘덩케르크’, 다른 시간대의 움직임을 한 화면에 담아낸 ‘테넷’까지, 이는 모두 놀란 감독이 고안한 ‘시각적 스토리텔링’의 결과물이다.
‘오디세이’는 시각적 스토리텔링의 정수다. 원전 자체가 서양 문학사 최초로 플래시백을 활용한 고전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그가 왜 이 원형의 신화에 매료되었는지 납득할 수 있다. 현대 관객은 칼립소의 유혹에 빠져 7년 동안 기억을 잃었던 오디세우스의 시점에서 시작해 그가 트로이의 목마 작전을 성공시킨 과거의 이야기, 부하들과 목숨을 걸고 겪은 위험천만한 모험의 과정을 회상하는 것이 마치 현재 시점에서 벌어지는 것인 양 착각하며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왕의 부재로 파탄 직전에 놓인 고향 이타카의 현재가 정교하게 교차되며 관객은 오디세우스의 다음 행보를 한 장면도 놓칠 수 없게 된다.
복잡한 시점 설계의 과정을 거친 이후, 과거 트로이의 성안에서 펼쳐진 트로이 목마 작전과 현재 이타카 성에서 구혼자들을 처단하는 유혈극의 양상이 실은 완벽한 구조적 데칼코마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관객은 단순한 시각적 충격을 넘어 오디세우스가 겪어낸 처절한 속죄의 과정,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오디세우스의 장장 20년에 걸친 여정을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퍼즐을 맞추듯 시공간의 맥락을 능동적으로 추적하는 지적 유희의 여정을 겪게 한 놀란 감독의 설계야말로 현대 관객을 사로잡은 중요한 흥행 요인이다.
70mm 아이맥스가 보여준 극장 스크린의 미래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 개봉 전부터 ‘오디세이’는 영화 전체를 70mm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한 최초의 영화라는 점이 화제였다. 아이맥스 카메라는 기존 35mm 필름 카메라보다 무려 10배나 높은 해상도를 자랑한다. 놀란 감독은 진작부터 다큐멘터리 촬영에서나 쓰이던 거대한 크기의 아이맥스 카메라를 실사 영화 촬영에 도입했다. ‘다크 나이트’ 촬영 당시 전 세계에 단 네 대뿐이던 아이맥스 카메라 한 대가 파손되는 사고를 겪은 이후 지금까지 놀란 감독의 영화 촬영 도중 총 세 대의 아이맥스 카메라가 파손됐다고 전해진다. 그 결과, 대형 필름 포맷의 압도적인 스케일과 해상도를 통해 홈시어터나 스마트폰으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영화의 가치를 극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놀란 감독은 영화예술의 가치가 광학 기술의 발전과 떼어놓을 수 없다고 믿는 대표적인 감독이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필름에서 디지털로, 컴퓨터그래픽과 3D 기술의 입체적인 효과까지 더해지며 영화는 지금도 진화 중이다. 그 결과, 놀란 감독이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했다면 관객은 반드시 극장에서 확인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또 한 가지, 한국만의 빠른 극장 인프라 발전도 빼놓을 수 없는 흥행 요인으로 꼽고 싶다. ‘다크 나이트’ 이후 지속된 놀란 영화에 대한 신뢰의 여정은, 지난 10여 년간 국내 멀티플렉스가 특별상영관(돌비 애트모스, IMAX, 4DX, SUPER LED 등) 인프라를 전 세계 최고 수준으로 확장해온 흐름과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기술적 진보와 영화에 대한 확신이 빚어낸 이 믿음직스러운 극장 체험은 ‘오디세이’를 현대 영화의 걸작 반열에 오르게 한 밑거름이다. 그의 다음 영화가 또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이 견고한 믿음의 벨트는 쉽게 깨지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