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하 “음악은 매번 도전을 요구하지만, 끝내 저를 자유롭게 해줘요”

김수하 “음악은 매번 도전을 요구하지만, 끝내 저를 자유롭게 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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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민서
이미지.  에스앤코

조명이 김수하에게 꽂히는 순간, 관객들은 “신비한 힘의 폭발”을 경험하게 된다. 강렬한 목소리와 에너지로 객석을 단숨에 사로잡으면서도 작품마다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온 그가, 이번에는 앨리샤 키스의 음악과 성장 경험에서 출발한 뮤지컬 ‘헬스키친’의 앨리가 되어 돌아왔다. 장르와 시대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새로운 음악과 인물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온 김수하는 이번 작품에서 199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사랑과 음악을 경험하고 가족과 충돌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해가는 앨리를 만난다. 김수하라는 만화경 속에 새롭게 자리한 앨리는 또 어떤 색과 무늬를 만들어낼까. 그 찬란한 변화의 순간을 들여다봤다.

‘헬스키친’은 앨리샤 키스의 음악과 성장 경험에서 출발한 작품으로, 2024년 브로드웨이 개막 당시 토니상 1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등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번 한국 공연에서 앨리 역을 맡은 소감과 처음 작품을 제안받았을 때 가장 마음이 끌린 지점이 궁금해요.
김수하:
가장 끌렸던 부분이 가장 머뭇거리게 만든 부분이기도 했어요. ‘헬스키친’의 음악들은 아름답지만 R&B와 팝을 구사해야 하는 난도가 높기 때문인데요. 처음에는 두려운 마음이 앞섰지만, 오디션을 준비하며 직접 곡들을 불러보면서 그 마음이 ‘아, 이 작품은 꼭 해야겠다.’는 강력한 확신과 도전 정신으로 바뀌었어요.

뮤지컬 전반적으로 ‘Fallin’’, ‘No One’, ‘Girl on Fire’ 등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앨리샤 키스의 곡들이 앨리의 이야기가 되어 등장합니다. R&B와 소울 특유의 리듬과 그루브가 중요한 곡들인 만큼 기존의 뮤지컬 넘버와는 다른 접근이 필요했을 텐데요. 이를 위해 어떤 훈련과 연구를 했나요?
김수하: 정말 ‘연습만이 살길이다.’라는 마음으로 임했어요. 공식 연습이 끝나는 저녁 6시 이후에도 남아 개인 연습을 했고,  미국에서 오신 협력음악감독 릴리 링(Lily Ling) 감독님과 국내 협력음악감독 양주인 감독님께 추가 연습을 부탁드리며 세밀한 피드백을 받았어요. 기술적으로는 평소 자주 쓰던 강렬한 벨팅 보이스보다 앨리샤 키스 특유의 섬세한 그루브와 감성을 살릴 수 있는 헤드보이스를 몸에 익히는 데 집중했어요. 직접 영상을 찍어 모니터링하면서 고쳐 부르기를 반복했고요. 유튜브 채널 홍보 일정을 앞두고는 따로 합주실까지 빌려 핸드 마이크를 사용하면서 연습한 소리와 톤이 실제 마이크를 통해 어떻게 전달되는지도 체크했어요.

현재 가장 애착이 가는 넘버가 있나요?
김수하:
앨리가 넉과 함께 부르는 ‘Unthinkable’과 ‘Like You’ll Never See Me Again’이 떠올라요. ‘Unthinkable’은 한 소녀가 단숨에 사랑에 빠지며 마치 물속에서 둘만의 세계를 헤엄치는 듯한 감각을 표현하고 싶었던 곡이에요. 진한 R&B의 색채와 가사 전달력을 동시에 살려야 하고, 작은 소리로 앨리의 섬세한 마음을 담아야 해 정말 많이 연습했어요. 어렵지만 너무나 아름답고 섹시한 넘버예요. 반면 ‘Like You’ll Never See Me Again’은 짧은 시간 안에 앨리와 넉의 이별을 고스란히 담아내야 하는 곡이에요. 노래하는 동안 제 안에서는 성숙해진 앨리와 이별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앨리가 끊임없이 부딪혀요. 감정을 눌러 담으며 속삭이듯 예민하게 결을 살려야 해 표현하기 까다롭지만, 그만큼 깊은 애정이 가는 곡이죠.

앨리는 앨리샤 키스의 실제 성장 경험에서 출발했지만, 작품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인물이기도 해요. ‘김수하의 앨리’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더했나요?
김수하:
먼저 앨리샤 키스의 옛 자료들을 찾아보며 ‘이 음악과 말 속에 어떤 마음이 담겨 있을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를 분석했어요. 동시에 1990년대 R&B와 재즈를 매일 들으며 몸에 자연스러운 리듬감을 새기려고 했고요. 이번 캐릭터는 가창력뿐만 아니라 앨리가 선천적으로 지닌 리듬을 표현하는 게 핵심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댄스 앙상블 배우들이 리듬을 타는 습관이나 디테일을 유심히 관찰해 적용했고, 안무를 더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 크로스오버 스윙인 정민희 배우에게 직접 디테일한 안무 표현을 배우기도 했어요.

청춘의 한가운데에서 방황하는 앨리에게 열정과 불안, 사랑과 갈등이 한꺼번에 찾아옵니다. 그 “아름다운 혼란”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었나요?
김수하: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뮤지컬 배우’라는 꿈을 정한 뒤, 오직 한 곳만 바라보며 달려왔는데요. 그 과정에서 제 안에는 늘 앨리처럼 뜨겁게 끓어오르는 열정과 ‘어디로 향해야 할까?’ 하는 막연한 불안이 공존했어요. 돌이켜보면 가장 막막하고 어두운 시기였지만, 꿈이 있었기에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순간이기도 했더라고요.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뮤지컬과 음악을 처음 만나 가슴이 뛰었던 그 시절의 감정을 많이 끌어올렸어요.

특히 앨리가 단순히 화를 내는 ‘철없는 아이’로 보이지 않도록 감정의 시작점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엄마에게 화가 난 상태’가 아니라 ‘내 마음을 몰라주는 데에서 오는 답답함’에서 시작해 그것이 서운함과 폭발하는 열망으로 이어지도록 했죠. 마음속에는 뜨거운 외침이 있지만 스스로도 그것이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청춘의 불안에 관객분들이 공감하시길 바랐어요. 이별을 지나 스스로를 찾아가는 성장 과정이 느껴지도록 서사에 따라 목소리 톤에도 변화를 주었고요.

앨리는 넉을 만나 처음으로 강렬한 사랑을 경험합니다. 이전에 연기한 인물들의 사랑과 비교했을 때 앨리의 첫사랑은 어떻게 달랐나요?
김수하:
그동안 연기했던 인물들의 사랑이 생존이나 운명과 맞닿은 거대하고 비극적인 경우가 많았다면, 앨리의 사랑은 훨씬 더 풋풋하고 날것 그대로의 ‘첫사랑’이에요. 특히 상대를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깨달아 가는 자아 발견의 과정이라는 점이 다르게 느껴졌어요. 넉을 사랑하며 앨리가 얻은 것은 ‘타인과 깊이 연결되는 감각’이에요. 피아노가 자신 내면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면, 넉은 그 마음을 밖으로 꺼내 누군가와 뜨겁게 나누고 교감하게 해준 사람이죠. 반대로 잃은 것은 ‘세상을 향한 막연한 환상’이에요. 이별을 견디며 세상이 마음처럼 되지만은 않는다는 걸 사실을 깨닫지만, 그 깨어진 환상 너머에서 앨리는 더 단단하고 성숙해져요.

넉과의 사랑이 앨리가 자신을 발견해 가는 하나의 과정이었다면, 엄마 저지와 스승 미스 라이자 제인 역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앨리의 성장에 영향을 주는 인물들이에요. 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앨리를 어떻게 다르게 표현했나요?
김수하: 비유하자면 엄마 저지는 앨리의 ‘뿌리’, 미스 라이자 제인은 ‘날개’, 넉은 미지의 세상을 열어준 ‘문’이라고 생각해요. 그중에서도 앨리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미스 라이자 제인이에요. 앨리 안에 있던 소리와 가능성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준 스승이자 음악적 구원자니까요. 엄마와 있을 때는 가장 아이 같고 솔직하면서도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답답함을, 미스 라이자 제인 앞에서는 호기심과 존경심, 음악을 받아들이는 집중력을 강조했어요. 넉과 있을 때는 미지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설렘과 주체적인 선택을 담으려 했고요. 결국 세 사람을 거치면서 앨리는 누군가의 딸, 제자, 연인을 넘어 ‘앨리’라는 독립된 사람으로 성장한다고 생각해요.

앨리는 미스 라이자 제인의 피아노를 만나 처음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앨리에게 피아노와 곡 ‘Kaleidoscope’는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나요? 이를 표현하기 위해 특별히 신경 쓴 부분도 궁금해요.
김수하:
앨리는 피아노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궁금함과 함께 걷잡을 수 없는 끌림을 느껴요. ‘Kaleidoscope’라는 제목처럼, 만화경을 돌릴 때마다 새로운 색과 모양이 펼쳐지듯 억눌려 있던 앨리의 수많은 감정과 가능성이 피아노를 만난 순간 비로소 아름다운 빛으로 터져 나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앨리에게 피아노는 ‘자신의 목소리’에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이 한 곡으로 앨리의 삶이 갑자기 달라지는 건 아니에요. 계단을 한 칸씩 오를 때는 높이를 체감하지 못하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면 높은 곳에 올라와 있는 것처럼, 앨리의 삶에 미스 라이자 제인이 조금씩 스며들며 내면의 성장이 쌓여가는 거죠. 처음 피아노를 마주한 호기심을 표현하기 위해 노래도 호흡을 많이 섞은 목소리로 시작해요. 이건 릴리 링 감독님께서도 앨리샤 키스가 특별히 당부한 부분이라고 말씀해주셨고요. 곡이 진행될수록 앨리의 마음을 대변하는 배우들이 하나둘 등장하는데, 그들과 호흡을 맞추며 앨리라는 만화경에 점차 다채로운 색이 채워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If I Ain’t Got You’와 ‘No One’ 같은 익숙한 사랑 노래도 작품에서는 가족의 이야기가 됩니다. 여러 형태의 사랑을 경험한 끝에 앨리가 알게 되는 ‘사랑’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김수하:
‘If I Ain’t Got You’는 흔히 연인 간의 러브 송으로 알려져 있지만, 작품에서는 앨리와 아빠의 추억과 교감이 담긴 곡이에요. 그리워했던 아빠의 존재와 부재 그리고 음악이라는 연결 고리를 통해 노래하다 보니 그리움과 반가움, 기쁨과 슬픔, 외로움 같은 감정이 한꺼번에 휘몰아쳐요. 관객분들도 참 좋아해주셔서 전주가 흐르면 객석의 공기가 달라지는 게 느껴지고요. ‘No One’ 역시 극중에서는 엄마와 다시 한번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에 흘러나와요. 세상이 모두 등을 돌려도 서로가 있다면 두렵지 않다는 엄마와 딸의 뜨거운 러브 송으로 재탄생하죠. 이렇게 여러 형태의 사랑을 통과한 끝에 앨리가 깨닫는 사랑은 ‘온전히 받아들이는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인 거죠.

앨리에게 뉴욕이 성장의 커다란 자극제가 된 것처럼, 김수하 씨 역시 스물한 살에 런던으로 떠나 여러 도시에서 배우로 살아왔습니다. 당시의 경험이 앨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나요?
김수하:
앨리에게 뉴욕이 그랬던 것처럼, 저에게도 런던을 비롯한 해외에서의 시간들이 커다란 자극제였어요. 스물한 살에 런던에 처음 갔을 때 낯선 언어와 문화, 압도적인 도시의 에너지 속에서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두려움과 외로움이었어요. ‘과연 내가 이 낯선 도시와 큰 무대에서 나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매일 안고 살았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의 생소함과 다채로운 사람들이 저를 위축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채워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새로운 문화와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 훌륭한 배우들과의 호흡이 저도 모르는 사이 배우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제 스펙트럼을 넓혀주고 있었죠. 그래서 무대 위에서 뉴욕을 바라보는 앨리의 마음에도 제가 해외에서 느꼈던 고독함과 그 뒤에 찾아온 가슴 뛰는 에너지를 담아낼 수 있었어요.

김수하 씨가 연기한 인물들은 시대와 장르는 달라도 자신의 삶을 직접 선택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인물들에게 특별히 끌리는 이유가 있을까요?
김수하: 지금까지 연기한 인물들은 모두 제 삶의 한 조각을 나누어 가진 소중한 존재들이에요. 돌이켜보면 저는 주어진 환경이나 운명에 수동적으로 휩쓸리기보다 자신의 삶을 직접 선택하고 개척해 나가는 인물들에게 본능적으로 끌렸던 것 같아요. 특히 상처받고 흔들리더라도 살아내려는 인물들에게 마음이 가요. 그런 인물을 만날 때면 제 안의 열정도 자연스럽게 끓어오르거든요. 앞으로도 이렇게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나아가는 강인하고 주체적인 인물들을 무대 위에서 계속 그려내고 싶어요.

피아노 앞의 앨리를 보며 ‘포미니츠’의 제니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제니와 앨리에게 피아노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존재였다면, 두 인물을 거쳐온 지금 김수하 씨에게 음악은 어떤 의미인가요?
김수하:  ‘포미니츠’의 제니에게 피아노는 자신의 천재성을 증명해야 하는 거친 투쟁이자 세상과의 단절을 상징하지만 또 건반을 치는 그 순간만큼은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었기에 애증을 느끼는 양가적 존재예요. 반면 앨리에게 피아노는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하고 세상과 연결되는 ‘희망과 확장의 해방’에 가까워요. 제니는 억눌린 상처와 분노를 터뜨려 던져버리고, 앨리는 자기 안의 빛과 가능성을 세상을 향해 펼쳐내는 거죠.

지금의 저에게 음악은 매번 도전을 요구하지만, 끝내 저를 자유롭게 해줘요. 힘든 과정을 지나 결국 해냈을 때 찾아오는 해방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요. 그 양면성이 저를 계속 도전하게 만들고, 가장 저답게 무대 위에 설 수 있게 하는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과거에 꿈꿨던 ‘아이다’의 아이다, ‘렌트’의 미미, ‘레미제라블’의 에포닌을 실제 무대에서 차례로 만나왔어요. 10년 전의 김수하 씨가 지금의 자신을 본다면 어떤 말을 할까요? 그리고 지금 그리고 있는 ‘다음 상상’은 무엇인가요?
김수하:
10년 전 일본 ‘미스 사이공’ 리허설 중이던 제가 생각나네요. 뜨거웠던 여름날, 지하철에서 내려 연습실로 걸어가던 아스팔트 길과 공기가 아직도 생생해요. 무대가 너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불안했던, 꿈 많은 20대였죠. 그때의 제가 지금의 저를 본다면 ‘너의 길을 잘 가고 있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걸어온 게 참 대견하다.’고 말해줄 것 같아요. 그리고 힘들게 견뎌온 시간들이 결국 지금의 너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될 테니 그 시간들을 절대 잊지 말라고 전하고 싶어요.

지금도 저는 여전히 배울 게 많고 무대 위에서 매번 고민하고 흔들리는 배우예요. 그래서 제가 그리는 다음 상상도 거창하지 않아요. 지금까지 그래왔듯 주어진 무대와 인물들에게 진심을 다하는 것 그리고 어딘가에서 저처럼 불안해하며 꿈꾸고 있을 사람들에게 ‘나도 여전히 흔들리고 부족하지만 이렇게 차근차근 걸어가고 있다.’는 소박한 희망을 건네는 친근한 배우로 오래 무대에 남는 것. 그거면 충분할 것 같아요.

*뮤지컬 ‘헬스키친’은 2026년 7월 24일부터 11월 8일까지 GS아트센터에서 국내 초연으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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