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2주차] ▶️ 에픽하이 |💿씨피카(CIFIKA)
글. 윤해인, 김도헌(대중음악 평론가), 김복숭(작가)
사진 출처. 에픽하이 유튜브
‘에픽카세 가요제’
윤해인: “일이 너무 커졌어.” 2026년 여름 어느 날. 에픽하이의 세 멤버는 유튜브 콘텐츠로 고민 상담을 하던 중, 팀 내 인기 순위로 열띤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타블로와 미쓰라를 랩으로 이겨보겠다는 투컷의 도발에, 세 멤버는 솔로 곡 대결을 하기에 이르렀다. 6개월 한정 리더/센터 포지션과 다른 두 멤버에게 ‘형’이라고 불리는 특전도 걸렸다.(참고로 맏형 타블로는 동생들에게 어차피 형이라 불리고 있지 않아서 특전이 맞다.) 타블로는 피처링 보컬로 방예담을, 랩이 아닌 노래에 도전한 미쓰라는 밴드 넬을 찾아간다. 투컷은 무려 그루비룸, 크러쉬, 스트레이 키즈 3RACHA 멤버들을 한 곡에 모아버렸다. 23년 차 힙합 그룹이자 유튜브 구독자 188만 명을 보유한 에픽하이가 가요제를 한다. 타블로의 말처럼, 일이 커졌다.
에픽하이가 ‘일을 키우는’ 일련의 과정은 사실상 에픽하이라는 팀의 작동 원리를 압축해 보여준다. 스스로 말이 많다며 영감을 위해 ‘묵언 수행’ 템플 스테이를 간 타블로는 시트콤 같은 일들을 겪고, 엄청난 흡입력의 곡을 써낸다. 미쓰라는 형들 몰래 밴드 넬을 찾아가 곡을 받아 구독자들을 위한 가사를 쓰고, 녹음 지옥 같은 넬 김종완과의 녹음을 군말 없이 해낸다. 투컷은 이 가요제에서 유달리 화려한 크레딧 라인업을 뽐낸다. 그는 ‘BORN HATER’라는 히트 곡을 보유한 프로듀서이지만, 자신의 비트가 너무 진지하다며 그루비룸을 찾아간다. 얼마 뒤 그는 작사를 하다 “20년 넘게 랩만 한 랩쟁이들”을 어떻게 랩으로 이기겠냐며 위기에 봉착하고, 이내 지독할 만큼의 자기 객관화와 판단력을 발휘해 냅다 크러쉬를 섭외해버린다. 여전히 막혀 있는 랩 메이킹을 위해서는 스트레이 키즈 3RACHA에게 연락을 한다. 빠르게 현실은 인정하되 굳이 부정적으로 보진 않는다. (다소 투덜거리지만) 할 수 있는 건 해낸다. ‘투컷적 사고’를 곡의 주제로 내건 그의 작업(또는 섭외) 과정은 정녕 ‘투컷적 사고’의 정수다. 실제로 투컷이 에픽하이 멤버 중 피처링 섭외 담당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는 23년 차 프로듀서가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선택일 테다. 프런트맨이 아니기에 한때 레거시 미디어에서 비교적 덜 도드라졌던 멤버 투컷이, 지금껏 이 팀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직관적으로 드러난 순간들이다. 가요제 내내 에픽하이는 예능적 재미를 위한 방해 공작을 벌이지만, 음악에 대해서는 충분한 리스펙을 보낸다. 그렇게 에픽하이는 그 ‘찐친 바이브’와 음악에 대한 진정성을 프로답게 오가며, 또다시 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중이다.
데뷔한 지 20년 넘은 팀이 유튜브로 새로운 전성기를 만들었다. 그러다 “본업 하셔야죠, 이제.”라는 말이 압박감으로 다가올 때쯤, 다시 유튜브에서 자연스럽게 판을 벌렸다. 어린 시절의 패기나 힙합 정신만으로 창작의 동력을 지속시키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튜브에서 시작된 가요제는 멤버들 인스타그램의 투표 홍보로, 그리고 음원 발매로 연이어졌다. 곧 나오게 될 투표 결과는 또다시 유튜브에 녹아들 테다. 어쩌면 ‘에픽하이 3.0’은 이런 순간을 뜻한 게 아니었을까. 셋이라면 무얼 해도 상관없지만, 무엇이든 만들거라던 타블로의 말처럼. 그냥, 크리에이터로서의 에픽하이.
씨피카(CIFIKA) - 'Old Fantasy'
김도헌(대중음악 평론가): 진솔한 나를 담은 음악, 내면에 충실한 작품, 있는 그대로의 감정 표현. 최근 대중음악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정성의 수식이다. 많은 음악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전하는 진실한 음악가임을 주장하고, 실제로 진실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창작가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연대와 위로를 말하기까지 어떤 고립과 고통을 겪었는지, 그 아픔 가운데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충분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 젊은 아티스트에게는 그 기다림이 익숙지 않다. 겪은 일을 이야기로 충분히 풀어낼 언어를 찾지 못했거나, 상상한 세계를 소리로 담는 솜씨가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 간극을 패기로 뚫고 나가는 것이 청춘의 미덕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돌아보며 내가 진정으로 바라고 해낼 수 있는 이야기를 확인하는 과정을, 우리는 성숙이라 부른다.
한국 대중음악의 젊은 창작가들이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순환을 준비하는 2026년의 풍경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씨피카의 EP ‘Old Fantasy’도 그런 흐름에 놓인 작품이다. 데뷔 10주년을 맞은 씨피카는 처음으로 작사, 작곡, 프로듀싱까지 전 과정을 홀로 완성하며 지금까지 협업으로 완성해온 창작관을 완전히 뒤집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씨피카의 음악을 함께 만들어왔다면, 지금은 씨피카 안에 존재하는 수백 혹은 수천 명의 씨피카가 가상 악기를 연주하고 목소리를 한데 모은다. 더 많이, 더 넓게 담고 싶었던 소리 중 진심으로 마음을 담을 수 있는 요소만 고르고 나머지는 과감히 제외했다.
미니멀한 1인 일렉트로닉 오케스트라의 소리로 씨피카는 과거의 허물을 벗고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의 태도를 되찾는다. 12.3 내란 이후 불면의 밤으로부터 불길하고도 취약한 자아를 마주하는 ‘Who’부터 새로운 의지를 끌어내, 첫사랑의 기억을 꺼내 보는 ‘Mine’과 라이브에서 자주 연주한 ‘Passing a gossip’ 등 나만이 지닌 파편에 귀를 기울인다. 회상은 ‘Lullaby’처럼 고독하고, ‘HEX’처럼 겹겹이 층을 쌓아 올리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자기 성찰과 직면, 자각을 응축한 낡은 환상으로부터 씨피카는 마침내 자유를 얻는다. 더는 무언가에 비유할 필요도 없고, 타인의 도움도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온전한 나만의 언어로 말하고 노래할 수 있는 축복을.

애너 퀸들런 - ‘애니가 남긴 것’
김복숭(작가): 이 책을 펼치자마자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아무런 예고 없이 세상을 떠난 헌신적인 친구이자 어머니, 아내이자 성실한 직장인이었던 애니 브라운의 죽음이다. 아직 서른을 갓 넘긴 나이였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은 그의 선의와 다정함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었다.
애니는 요양원 입소자들을 비롯해 자신이 알고 지낸 모든 이들의 삶에 따뜻한 흔적을 남겼다. 삶이 끊임없이 예상치 못한 시련을 던져왔음에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변을 비추는 한 줄기 빛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의 죽음에 남편 빌은 어디서부터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할지조차 모른 채 완전히 길을 잃는다. 애니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앤마리는 다시 중독이라는 늪으로 빠져든다. 열세 살의 맏딸 알리는 하룻밤 사이 어른이 되어, 사실상 가족의 가장이 된다.
애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1년 동안, 우리는 이 세 사람의 시선을 통해 그를 다시 알아간다. 세상을 떠난 애니는 마치 현실에는 존재하기 어려운 성인처럼 그려지지만, 애니를 떠나보낸 사람들의 모습은 가슴이 저릴 만큼 현실적이다. 그래서 작가 애너 퀸들런의 신작 ‘애니가 남긴 것’은 더없이 슬프고 감정적인 이야기이면서도, 좀처럼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감정을 부러 극적으로 끌어올리지도, 가벼운 위로를 건네지도 않는다. 대신 사람들이 슬픔과 맞서고, 그 안에서 작은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담하고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애니가 남긴 것’은 애니라는 한 인물을 통해, 한 사람이 떠난 뒤에도 그가 남긴 사랑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한다. 그 사랑은 남겨진 이들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머물며, 때로는 다시 삶을 향해 나아갈 힘이 되어준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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