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키친’, 허스토리(Herstory)에서 ‘나’의 목소리로

‘헬스키친’, 허스토리(Herstory)에서 ‘나’의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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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승연(뮤지컬평론가)
사진출처. 에스앤코

뮤지컬 ‘헬스키친’의 바탕에는 1990년대 뉴욕의 힙합 문화와 접속하는 자기표현의 감각이 놓여 있다. 이는 ‘힙합 정신’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변화된 개인과 공동체가 자신을 고유한 언어와 리듬으로 표현하고 이를 통해 정체성을 구성하는 실천적 몸짓이 곧 힙합 정신이다. 18세 앨리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극의 흐름은 그의 삶이 ‘독자성을 지닌 목소리 그 자체’라는 메시지를 친숙하고 내밀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또래 집단과 학교라는 규범적 울타리를 벗어나 라틴계 흑인과 혼혈인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맨해튼 플라자의 ‘엘링턴 룸’에서 삶의 뿌리와 조건을 찾는 앨리의 여정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음악 안에서 새로운 언어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한국 초연의 앨리들(손승연, 김수하, 박지원)은 최대한 그 정신에 근접해 캐릭터를 구현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1990년대 뉴욕의 힙합은 ‘상상 속의 실체’이지만, 그것을 패션과 취향을 포함한 앨리의 고유한 언어로 육화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관찰된다. 그들의 작은 몸짓과 몸의 자세에도 관객의 환호가 터져 나오는 이유다.

‘헬스키친’의 개발 과정은 공연에 스며들어 있는 힙합 정신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공연의 아이디어는 앨리샤 키스의 연극 작업에서 시작됐다. 2011년 리디아 R. 다이아몬드의 코미디 연극 ‘스틱 플라이(Stick Fly)’의 음악과 공동 제작을 경험하며 새로운 공연 스토리텔링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된 앨리샤 키스는, 이후 극작가 크리스토퍼 디아즈, 연출가 마이클 그라이프를 ‘헬스키친’ 프로젝트에 합류시켰다. 그 결과물이 2023년 퍼블릭 시어터 트라이아웃 공연, 2024~2026년 브로드웨이 슈버트 극장 공연이다. 공연을 브로드웨이로 옮기는 과정에서 극의 구도를 바꾸는 결정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그 선택을 통해 앨리와 넉의 연애 서사 비중은 줄고 싱글맘 저지와의 갈등과 화해가 극의 중심축으로 단단히 구축됐다. 크리스토퍼 디아즈는 이러한 창작 과정에 대해 “앨리샤는 물론 연출가 마이클 그라이프, 안무가 카밀 A. 브라운, 그리고 배우진 모두가 자유롭게 스케치하고 실험할 수 있는 미학적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제한이 아닌 극적인 해방감을 경험했다.”라고 설명했다. 이번 한국 초연 레플리카 버전(7월 24일~11월 8일, GS아트센터)은 에스앤코 제작으로 협력연출 오루피나, 협력음악감독 양주인, 협력안무 강동주가 국내 프로덕션을 이끈다.  

감정적 과잉 대신 감각적 환기를
이러한 자유로움 덕분일까. 뮤지컬 ‘헬스키친’ 한국 공연은 세련되고 힙한 첫인상을 남긴다. 객석을 압도하는 음악과 안무가 무대를 감각적으로 확장하고, 마지막 구간의 사운드를 조명 효과에 담아 강조하는 솔로 넘버들은 마치 팝 콘서트처럼 연출되어 있다. 1막 넘버 ‘Girl on Fire’는 이러한 특징을 대표한다. 앨리샤 키스가 2012년에 발표한 R&B 팝 발라드를, 사랑과 음악에 열정을 쏟기 시작한 앨리의 상태를 표현하는 넘버로 전유했다. 원곡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 ‘소녀(this girl)’의 변화를 ‘불에 붙은 상태’로 표현했듯, 넘버가 진행되는 동안 앨리는 피아노 레슨을 받고 그 기쁨을 엄마에게 자랑하며 넉과의 관계에 거침없이 돌진하는 ‘과정’ 자체로 묘사된다. 마지막 음을 하이 노트로 올려 앨리의 열정을 선언적으로 강조하는 연출뿐 아니라 ‘불에 타는’ 앨리를 핸드마이크 랩 퍼포먼스로 적절히 제어하는 타이니 역 이미쉘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서정적인 넘버 역시 세련되게 조율되어 있다. 앨리샤 키스의 대표적인 발라드 ‘If I Ain’t Got You’가 2막 넘버로 활용되는 구간은 특히 객석에 따뜻한 온기를 전한다. 원래 이 곡은 비행기 사고로 22세에 요절한 가수 알리야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지만, 뮤지컬에서는 부녀의 관계를 귀엽고 정답게 그리는 넘버로 재맥락화했다. ‘헬스키친’은 젠더적 관점에서 ‘여성들의 역사(herstory)’를 말하는 작품이다. 엄마(저지)와 비혈연적 모성을 수행하는 보호자이자 멘토(미스 라이자 제인) 사이의 유대, 그 ‘엄마들’의 열정과 정신적 유산에 대한 이야기가 극의 핵심이기 때문에, 남성들(넉과 데이비스)은 비교적 후경화되어 있다. 사춘기 10대 소녀의 서사에서 아버지와 남자 친구가 메인 플롯으로 다뤄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If I Ain’t Got You’ 장면이 유독 섬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곡은 떠돌이 음악가인 아빠 데이비스(케이윌, 테이)가 앨리의 유년 시절에 직접 만들어 함께 불렀던 노래로 활용되며, 두 사람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회복되는 판타지적 순간을 연출한다. 그들의 행복했던 과거가 아주 잠시 현실에 스미는 이 순간은 실재와 허구가 뒤섞인 혼성적인 상태를 만든다. 듀엣이 끝나자마자 데이비스는 또다시 이들을 떠나고 앨리는 그런 아빠를 덤덤히 수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에 존재하는 감정은 ‘실재’하지만 현실과는 무관한 ‘허구’에 불과한 것이라는 공연의 관점은 ‘부재 상태’로 존재하는 아빠 데이비스와의 관계를 다루는 지렛대처럼 작용한다. 원곡의 영어 가사를 번역 없이 그대로 넘버화하여 정서적 과잉을 피한 것 역시 이러한 조율점을 향해 있다. 

안무와 연출/무대 콘셉트의 조화 
사실 드라마투르기적 관점에서 ‘헬스키친’은 단순하고 단조롭다. 앨리샤 키스의 음악은 크게 튀는 구간 없이 뮤지컬로 재맥락화되어 있지만, 서사는 ‘엄마와 사춘기 딸의 갈등과 화해’를 단순하고 느리게, 정면으로 다룬다. 그러나 장면과 장면 사이 그리고 장면의 핵심 구간을 채우는 스트리트 댄스는 극에 방점을 찍으며 리듬과 흐름을 만든다. R&B와 힙합 그리고 소울풀한 넘버에 맞춘 안무는 ‘헬스키친’의 심장으로, 1990년대 뉴욕의 에너지를 거칠고 발랄하게 표현한다. 이번 한국 프로덕션은 전문 댄서로 구성된 앙상블을 추가해 안무 전체를 공연의 핵심으로 단단히 구축했다. 인물의 내면과 장면의 목표를 시각화하는 안무 중심 장면들이 특히 뇌리에 남는 이유다. 가령 ‘The Gospel’에서는 질풍노도의 시간을 겪는 앨리의 내면을 에너지 넘치는 군무로 내달리고, ‘Gramercy Park’에서는 댄서들의 얼굴과 몸짓을 그림자 안에 가려 넉의 어둡고 분열된 내면을 입체화했다. 또한 앨리가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발견한 순간 곧바로 주민과 친구의 응원과 지지를 받는 ‘Kaleidoscope’ 장면의 연출과 안무는 공동체성에 대한 정동적 감각을 환기하며 깊은 인상을 남긴다.       

로버트 브릴의 금속 프레임 격자 구조 무대는 이러한 흐름을 유려하게 만든다. 공간을 수직의 프레임으로 나눠 다층적인 구간에서 노래와 춤, 밴드의 연주가 동시 수행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더불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해튼 플라자를 오르내리며 음악적 감수성을 키워 나가는 앨리의 ‘수직적 움직임’이 무대 디자인 콘셉트를 따라 자연스럽게 구현되었다. 인물의 움직임과 극의 배경을 미학적으로 통합하려는 전략이 돋보인다. 조금 더 들어가면, 무대와 연출의 콘셉트가 일치되는 양상도 관찰된다. ‘렌트’(1996), ‘넥스트 투 노멀’(2009), ‘이프덴’(2014), ‘디어 에반 핸슨’(2016) 등의 뮤지컬을 연출한 마이클 그라이프의 예술적 비전이 무대디자인에 통합되어 있다. 현실에 밀착된 일상적 존재들을 금속 프레임 무대에 세워 공간을 연출하는 그는 인물의 아우라와 정서가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그려 나간다. 과도한 영상 대신 프레임을 시그니처 색으로 물들이며 인물의 목소리와 내면에 집중하는 연출 방식이 ‘헬스키친’에도 적용되어 있다. 

흑인 여성, 지혜를 전하고 역사를 잇다 
전술했듯 공연은 앨리샤 키스의 자전적 스토리에 영감을 받아, 앨리와 엄마 저지(박혜나, 최현선) 사이의 갈등으로 주요 사건을 만든다. 그들의 갈등은 꽤 심각하다. 사춘기 소녀 앨리는 저지의 과도한 통제에 사사건건 부딪친다. 그런데 그들의 갈등은 인종 문제와 결부되며 더 심각하게 발전된다. 백인 엄마와 흑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흑백 혼혈’ 앨리가 ‘흑인’ 넉(박광선, 한승윤)과 연애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넉은 당시 흑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던 시대상을 은유하는 인물로, 데이비스와의 불같은 연애 끝에 9개월 만에 엄마가 되어버린 저지의 과거를 상기시키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헬스키친’의 이야기는 ‘흑인 여성 음악가’ 미스 라이자 제인(정영주, 김영주)을 통해 더 깊은 차원으로 심화된다. 노년의 음악가 라이자 제인은 맨해튼 플라자 1층 엘링턴 룸에서 앨리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삶의 지혜를 조언하는 멘토로, 앨리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다. 공연은 최종 심급에서 라이자 제인의 비전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드러낸다. 이것을 구체화하는 것이 바로 1막 마지막 넘버 ‘Perfect Way to Die’와 2막의 ‘Authors of Forever’다. 두 넘버가 수행되는 동안 무대 중앙에 영상으로 등장하는 ‘진짜 흑인들의 얼굴’은 ‘헬스키친’이 만든 허구적 세계에 실재의 감각을 불어넣는다. 공연은 역사 속 실존 인물을 빠르게 보여주면서 과거에서 미래로 거침없이 달린다. 특히 ‘Authors of Forever’에서 직접 제시되는 세 명의 흑인 여성 음악가들, 플로렌스 프라이스(Florence Price), 마거릿 본즈(Margaret Bonds) 그리고 해이즐 스콧(Hazel Scott)을 통해 앨리가 그려 나갈 미래를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그들은 음악가로 성장할 앨리의 미래에 영원히 별처럼 빛날 것이며, 앨리는 그 계보 위에서 ‘나만의 이야기’로 여전히 불완전한 삶의 국면들을 돌파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울린다.

끝으로 ‘헬스키친’ 한국 초연의 화두를 공연 외적인 면에서 살펴보려 한다. ‘헬스키친’이 공연 속 ‘뉴욕’과 모녀의 이야기를 맥락화하는 방식은 K-뮤지컬 제작에 참고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프로듀싱 전반에 관여한 앨리샤 키스와 창작진들은 뉴욕을 특정한 공간이 아닌 하나의 ‘감정’으로 의미화했다. 공연 속 모녀의 이야기는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지역을 초월해 소통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공연에서 앨리와 저지는 ‘그들’일 뿐이다. 그들에게 한국인과 서울이 타자이듯,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감정과 보편의 논리 이전에 공연의 흥미 여부다. ‘헬스키친’의 매력은 앨리샤 키스라는 상징성, 뉴욕 문화의 세련된 배치와 활용에서 만들어진다. K-뮤지컬에 대한 비전은 바로 이 지점에서 힌트를 얻는다. 서울(혹은 지역)에 사는 한국인이 자신의 공간을 의미화하고 주체화하는 방식에 매력이 더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예술적 상상력 말이다. “실재의 가치에 대한 우리의 신념은 환상을 통해 형성된다. 우리의 환상을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와 세계 사이의 접촉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스탠리 캐벨의 이야기는 한국 뮤지컬의 ‘현재’에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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