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가 만드는 환상, 성우 아이돌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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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백설희(작가, 칼럼니스트)
사진 출처. 봇치 더 록! 공식 X

2025년, 일본의 대표적인 아이돌 IP 사업인 THE iDOLM@STER(이하 ‘아이돌마스터’)가 2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여 지난 12월 13일과 14일 동안 교세라 돔에서 ‘THE IDOLM@STER M@STERS OF IDOL WORLD 2025’라는 이름의 전체 브랜드 합동 라이브 공연이 열렸다. 이 공연은 이틀 동안 약 39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

또 다른 아이돌 IP인 Love Live! School idol project(이하 ‘러브 라이브!’)도 15주년을 맞았다. 이 ‘러브 라이브!’ 시리즈의 두 번째 그룹 Aqours(아쿠아)는 6월 21일부터 22일까지 마지막 단독 라이브 ‘러브 라이브! 선샤인!! Aqours Finale LoveLive!~영원stage~’에서 10만 명을 동원했다.

이런 성우 아이돌의 인기는 국내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2024년 말부터 일본의 성우 아이돌 그룹이 꾸준히 내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올해에도 ‘아이돌마스터’ 시리즈의 유닛들과 ‘러브 라이브! 슈퍼스타!!’의 그룹인 Liella!(리엘라!)가 한국을 방문했다. 애니메이션 ‘봇치·더·록!’의 성우 라이브 밴드인 결속 밴드도 12월 6일 킨텍스에서 단독 공연을 개최했으며, 마지막으로 성우 라이브 밴드를 기반으로 한 미디어 믹스 프로젝트 BanG Dream! 소속 Roselia(로젤리아) 역시 12월 24일에 내한 공연을 했다.

성우와 아이돌,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는 단어의 조합이다. 그러나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주로 좋아하는, 이른바 오타쿠 문화에 익숙한 팬들에게는 그다지 낯선 개념이 아니다. 성우 아이돌이라는 개념을 처음 탄생시킨 일본에서는 지금까지도 큰 인기를 끌며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성우 아이돌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린 민메이’에서 μ’s(뮤즈)로, 성우 아이돌의 역사 살펴보기
성우 아이돌의 시작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인 가수를 작품의 주인공 성우로 데뷔시키고 해당 캐릭터 명의의 라이브를 병행한 건 1982년 ‘초시공요새 마크로스’가 시초다. 주인공 ‘린 민메이’의 목소리 연기와 노래를 맡은 이이지마 마리는 가수 데뷔 직전에 오디션을 보고 ‘린 민메이’의 성우로 이름을 먼저 알렸으며, 작중에서 부른 OST ‘사랑·기억하고 있습니까’는 약 27만 장이라는 판매고를 올렸다. 이 성공으로 ‘천사소녀 새롬이(마법의 천사 크리미 마미)’의 오타 타카코와 애니메이션 ‘터치’의 히다카 노리코 등 유사한 사례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들은 성우와 아이돌 활동을 양립했을 뿐 해당 캐릭터의 성우로서 활동하진 않았다.

성우 아이돌이 등장할 발판이 마련된 건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이었다. 1997년, 시이나 헤키루는 성우로서 처음으로 부도칸과 요요기 국립경기장에서 콘서트를 열었으며 일본 대표 음악 프로그램인 TV아사히 ‘뮤직 스테이션’에 출연했다. 그 뒤를 이은 후배 미즈키 나나는 성우 최초로 요코하마 아레나와 세이부 돔 그리고 도쿄 돔에서 공연하는 등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며 메인스트림에 입성했다. 이 둘은 엄밀히 말하면 ‘아이돌급 인기가 있는 성우’에 가까웠으나, “성우라도 팬덤이 충분히 모이면 아이돌만큼의 가치가 있다.”라는 선례를 남겼다.

2005년, 아케이드 게임 ‘아이돌마스터’가 발매되며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극중에서 선보였던 공연을 성우가 실현하는 이벤트가 흔해지기 시작했다. 여고생들이 밴드를 하는 이야기를 다룬 애니메이션 ‘케이온!’은 2009년과 2011년에 개최한 라이브 행사에서 성우들이 직접 노래를 불렀는데, 두 번째 이벤트에서는 무려 3만 명의 관객이 모였다. 이후 ‘케이온!’은 성우 아이돌 밴드 프로젝트 BanG Dream!과 만화 ‘봇치·더·록!’에 영향을 주며 성우 아이돌의 가능성을 열었다.

그리고 2010년에 결성된 ‘러브 라이브!’의 첫 번째 프로젝트 그룹 μ’s(뮤즈)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본격적으로 성우 아이돌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μ’s의 성공 사례를 계기로 2010년대에는 ‘노래의☆왕자님♪’과 ‘앙상블 스타즈!’, ‘아이돌리쉬 세븐’ 등 여성향 IP까지 시장이 확장했다. 한편 2014년에는 앞서 말한 BanG Dream! 프로젝트가 출범했고, 2015년에는 ‘러브 라이브!’의 두 번째 그룹 Aqours가 결성되었다.

2D과 3D의 경계 사이, ‘과몰입’을 부르는 매력
이처럼 성우 아이돌들이 인기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성우 아이돌들은 자신이 맡은 캐릭터처럼 분장을 하고 무대에 등장한다. 그리고 팬들의 몰입을 깨지 않도록 공연 중에는 스스로와 상대방을 해당 캐릭터의 이름으로만 지칭하며, 캐릭터의 목소리로 노래를 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실제 성우와 작품 속 캐릭터 사이의 경계가 흐려져 팬들은 성우들이 보여주는 캐릭터에 몰입하게 된다. 이 애매모호함이 바로 성우 아이돌이 지닌 매력의 원천이다. 실제로 μ’s의 음악 프로듀서였던 키사라 요헤이는 미디어 매체인 ‘CINRA’와의 인터뷰에서 ‘아이돌 마스터’를 좋아했던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서 있는 건 성우들이지만, 눈을 감지 않아도 캐릭터들이 있다. 라이브에서는 그게 가장 중요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성장’에 집중하는 일본 아이돌 특유의 문화적 배경도 작용하고 있다. 보통 성우 아이돌은 신인 성우를 발탁하는데, 이들 중에는 춤이나 노래를 전혀 배워본 적이 없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기회가 주어진 만큼 그들은 필사적으로 연습하여 점차 성장해 나가는데, 팬들은 그 과정에서 성우의 성장을 마치 캐릭터의 성장처럼 느끼게 된다. 일례로 Aqours에서 ‘타카미 치카’로 활동하는 성우 이나미 안쥬는 ‘MIRACLE WAVE’라는 곡에서 백덤블링을 선보여야 했다. 부담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피나는 연습을 거듭하여 백덤블링에 완벽하게 성공해 관객들에게 엄청난 환성을 이끌어냈다. 한편 BanG Dream!의 밴드 중 성우가 직접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하는 Roselia의 드러머 사쿠라가와 메구와 기타리스트 쿠도 하루카 역시 초심자였으나 여러 무대를 거치며 솔로 연주까지 해낼 정도로 발전했다. 이런 성장의 모습이야말로 팬들이 감동하는 모멘트이자 성우 아이돌이 사랑받는 요인이 아닌가 싶다.

물론 환경적 변화도 한몫했다. 코로나19 시기 동안 OTT를 통해 애니메이션 시청층이 확대되며 새로운 팬덤이 유입되었다. 그리고 엔데믹 후 ‘현장감’에 대한 수요가 커지며 실제 무대에서 캐릭터를 만날 수 있는 성우 아이돌과 성우 밴드의 인기도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목소리를 넘어, 성우 아이돌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크리스마스 이브, 고려대 화정체육관에서 ‘Roselia ASIA TOUR 「Neuweltfahrt」 in Seoul’을 통해 성우 밴드가 주는 그 현장감을 체험할 기회가 있었다. 드러머인 사쿠라가와 메구는 초심자였단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시종일관 파워풀하게 드럼을 때려대면서도 생글거리며 웃었다. 쿠도 하루카도 마찬가지였다. 쿠도 하루카는 Roselia에 막 들어갔을 무렵 자신의 블로그에서 더블넥 기타를 들고선 “언젠가 Roselia 라이브에서…”라는 코멘트를 남겼었는데 그로부터 8년 후, ‘Animelo Summer Live 2025’에서 더블넥 기타를 들고 무대에 등장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이번 내한에는 아쉽게도 일반 기타를 들고 온 모양이었다.

이날 화정체육관에서는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는 팬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그들 사이에 서 있던 나 역시 목소리만을 듣고도 Roselia가 내 눈앞에 있다는 걸 실감했다. 이처럼 목소리가 캐릭터 빌딩의 핵심인 만큼, 성우 아이돌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은 견고해 보인다.

성우 아이돌이 구현하는 환상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업계는 성우 아이돌을 넘어 버추얼 세계로 눈을 돌리고 있다. ‘러브 라이브!’는 2022년 실시간으로 전개되는 버추얼 아이돌 ‘러브 라이브! 하스노소라 여학원 스쿨 아이돌 클럽’의 시작을 알렸고, BanG Dream! 역시 2023년에 버추얼계 밴드인 ‘무한대 뮤타입(夢限大みゅーたいぷ)’을 론칭했다. 성우 아이돌과 버추얼 아이돌의 경계마저 흐려지는 지금, 시대의 부름에 따라 아이돌 엔터테인먼트는 경계를 넘나들며 또다시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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