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스터링 재개봉, 영화계의 구원투수로 떠오르다
작성자 weversemagazine
리마스터링 재개봉, 영화계의 구원투수로 떠오르다
글. 이자연 (CINE21 기자, 대중문화 평론가)
사진 출처. 파라마운트 픽처스
극장가의 구원투수는 리마스터링 재개봉일까. 최종적으로 천만 영화 없이 박스오피스를 종료해가는 2025년, 1년 동안 무수히 많은 리마스터링 재개봉작이 관객을 다시 찾았다. 지금까지 재개봉이 작품 N주년을 축하하기 위한 일종의 기념 의식과 같았다면, 코로나19 이후부터는 그 의도와 목적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정확히는 극장이 끝없는 시간 공백을 맞닥뜨린 그 이후부터. 따라서 이제 리마스터링 재개봉은 단순히 기술 복원의 시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고전과 새 세대가 융합하는 광장, 오랜 침체기로부터 회복하고자 하는 극장의 공간적 확장, 새롭게 재해석될 기회를 얻는 작품과 감독의 터전으로서 다양하게 기능하기 시작했다.
고전과 새 세대가 융합하는 광장 - ‘대부’부터 ‘로마의 휴일’, ‘쉬리’까지
고전 영화는 작품의 생명력을 어떻게 연장할까. 새로운 관객의 유입이 오래 전 차단되어버린, 오직 이름만이 남아버린 영화들은 리마스터링으로 생명을 얻어 다시금 극장에 이름을 올린다. 올 가을 연이어 재개봉한 ‘대부’와 ‘대부2’는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4K 리마스터링을 거치며 선명한 화질과 음질로 개선되었다. ‘대부’ 시리즈는 재개봉과 함께 연속 상영회가 기획되며 총 6시간 30분 가량의 러닝타임을 차지했지만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전관 매진을 기록했다. 이외에도 한국 개봉 70주년을 맞이한 ‘로마의 휴일’은 흑백 영화 그대로 업스케일링 되었고, 국내 액션 블록버스터의 시초인 ‘쉬리’는 음향 리마스터링으로 총격과 폭발신을 선명하게 재현했다. 이러한 고전 영화의 리마스터링 재개봉은 해당 작품을 광활한 스크린으로 본 적 없는 어린 세대의 시간을 과거로 돌리는 영화적 경험을 선물한다. 다시 말해 관객들은 스크린으로 볼 때에야 정확하게 전이될 수 있는 작품 의도, 연출 방식, 흐름, 맥락과 메시지 등을 뒤늦은 만남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실제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이 기존 156분 분량에 15분을 추가한 이유도 디지털 리마스터링 과정을 통해 화려한 경극의 면모를 더 강조하고 보강하기 위해서다. 본래 작품이 설정한 방향을 재정비 함으로써 비디오 테이프와 DVD, VOD 서비스와 OTT 스트리밍 등 작은 화면이 채 담아내지 못한 것을 오직 극장만이 이끌어낸다. 많은 전문가가 리마스터링 재개봉을 두고 영화관 편성표의 공백을 메우는 비즈니스 전략으로 해석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경제적 효용을 입증하기도 하지만) 이 흐름은 극장가의 기류를 변화시키는 이상적인 가치를 충분히 보여준다. 어린 관객 세대와 고전 영화를 연결하는 광장으로서, 결국 관객이 영화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장기적 관점의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소위 '뉴비(신입)'가 있어야만 산업이 지속 및 확장될 수 있다는 문화생태계적 관점에서 보아도 고전의 재탄생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리마스터링 재개봉은 극장에 어떤 경험을 줄까 - ‘반지의 제왕’, ‘레미제라블’
긴 침체기를 거친 극장은 적극적인 경험의 장으로서 소생했다. ‘킬링 로맨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 등 팬들이 모여 함께 떼창을 부르는 싱얼롱 상영회, ‘더 퍼스트 슬램덩크’, ‘극장판 하이큐!! 쓰레기장의 결전’ 등 소년만화를 목 놓아 응원하는 응원상영 등은 영화 속 세계와 현실이 연결되는 과몰입 경험을 주면서 다양한 팬덤 사이로 뜨거운 열풍을 이끌었다. 또 ‘아바타’ 시리즈, ‘탑건’ 등 촉각·청각을 극도로 자극하는 작품들은 아이맥스, 돌비시네마 등 프리미엄 상영관을 만나 자신이 그 세계관 안에 존재하는 것만 같은 감각에 빠져들었다. 이렇듯 영화관은 감각 기반의 경험 제공처로서 공간적 확장을 이뤄냈다. 이러한 변화에 발맞춰 리마스터링 재개봉 작품도 변하기 시작했다. 한 예로 메가박스는 올해 돌비 포맷의 ‘반지의 제왕’ 3부작을 최초로 재개봉했다. 지금까지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한 적은 있지만 사운드를 보강한 돌비 시네마 버전은 처음이다. 그렇기에 이번 ‘반지의 제왕’ 3부작 재개봉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최초 개봉 당시 2D 차원에 한정됐던 영화는 기술 발전에 따라 선명한 화질로 거듭나고, 이제는 청각적 과몰입을 이끄는 세계관으로 무한 확장된 것이다. 이외에도 돌비 비전과 돌비 애트모스 버전으로 재탄생한 ‘레미제라블’도 지난해 리마스터링 재개봉으로 관객을 만났다. 뮤지컬 음악으로서 정체성만큼 생생하고 역동적인 사운드를 통해 작품의 본질을 다시금 구현해낸 것이다. 리마스터링 재개봉은 이제 과거 작품의 화질을 개선하여 영화관을 채우는 목적이 아니다. 극장이라는 공간성을 적극 활용하고 확장하는 융합체이자, 극장의 모든 잠재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촉매제로서 영화 산업의 새로운 축을 만들어나간다.
새롭게 재해석되고 발굴되는 기회의 자리 - ‘더 폴: 디렉터스 컷’,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최초 개봉과 다른 관점으로 발굴되는 작품들도 있다. 극장 상영이 끝나면 모든 시간이 그대로 정지되는 것만 같았던 작품과 연출자에게 재탐색이란 말 그대로 '기회'다. 오직 리마스터링 재개봉이기에, 영화관에 다시 이름을 올리기에 마주할 수 있는 귀한 순간이기도 하다. 먼저 "Long live Korean women(한국 여자 만세!)"이라는 명언을 남긴 타셈 싱 감독은 4K 리마스터링을 통해 18년만에 부활한 ‘더 폴: 디렉터스 컷’으로 유례 없는 흥행에 성공했다. 고전적 스토리, 고혹적인 미술과 미쟝센, 모험적인 연출까지 극장에서의 재상영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숨막히는 미적 장치들을 관객은 재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봉 N주년 기념'이란 명목 아래 이미 유명한 작품 위주로 진행하던 것과 달리, 마치 최근작을 수입·배급하듯 리마스터링을 다루니 시간을 뛰어넘는(timeless) 작품 선정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따라서 극장가 침체기에 리마스터링 재개봉이 구원투수로 떠오른 건 단순히 '아는 맛'으로서 흥행이 보장되어서가 아니라 시대 불변한 가치를 계속 되찾고 발굴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치를 반영하듯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리마스터링 재개봉을 맞이하여 많은 언어적 수정을 거쳤다. 2000년 최초 개봉 당시 세로 자막에 맞춘 짧은 대사들을 현재 가로 자막에 맞게 넉넉한 분량으로 조절하고, 기존에 '곤충'이라고 표현하던 것을 더 큰 카테고리인 '벌레'로 넓게 명명했다. (곤충이라고 보기 어려운 기묘한 벌레들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는 '나우시카다움'을 제대로 반영하기 위해 번역까지 새로 덧댄 사례로 '리마스터링'의 범위를 어디까지 볼 것인지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리마스터링 재개봉도 변화한다. 비주얼 업그레이드를 선택 받는 작품의 경향이 변하고, 다채로운 굿즈와 특전, GV 등 재개봉작을 알리는 방식도 변한다. 먼지 묵은 장면을 받아들이는 관객 반응도 변하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다양한 감상법도 변한다. 변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뜻이다. 영화관의 활기와 생명력을 이어가는 리마스터링 재개봉은 오늘날의 관객과 극장가를 그대로 비추면서 계속해 진화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