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89회 – 출렁이며 맞이하는 2025년

작성자 성민이

읽는 라디오 다시!

다시! 89회 – 출렁이며 맞이하는 2025년

성민이
성민이
@user_yf6ldknyms
읽음 41
이 뉴니커를 응원하고 싶다면?
앱에서 응원 카드 보내기

 

 

1

 

탄핵집회가 열리던 초반에 이곳에서 열리는 집회에 나갔다가

그곳에서 느낀 공허함과 이질감 때문에 집회에 나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남태령을 비롯해서 곳곳에서 불어오는 연대의 기운에 휩싸인 후

광장에서 그 기운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오래간만에 집회에 나갔습니다.

 

이곳 집회는 토요일인데도 저녁 7시에 열립니다.

시골에서는 막차가 비교적 빨리 끊기기 때문에 저녁 7시 집회는 항상 막차 시간을 살피면서 참석해야 합니다.

토요일인데 굳이 저녁 7시 집회를 해야 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도시 사는 사람들 중심의 집회여서 어쩔 수 없습니다.

집회 시작 전에 도착해서 비교적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더니 집회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고 그 분위기를 오롯이 느낄 수 있어서 좋더군요.

초반 집회와 달리 이래저래 준비들도 잘 돼 있었고, 참여자들의 열기도 뜨거웠습니다.

특히 남태령에서의 경험을 공유하며 연대의 마음을 모아가는 것이 좋더군요.

 

그런데 집회가 이어질수록 저는 조금씩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주먹을 지켜들면서 ‘동지가’를 같이 부르자고 하는 것 정도는 상관없는데

시민들이 은근히 대상화되는 분위기는 조금 거북했습니다.

사회단체 지도부가 제일 먼저 단상에 올라서 발언을 하고

이어 여러 활동가와 문화예술인들의 발언과 공연이 이어지고 나서

후반에 시민발언 기회가 주어지는데 시민들은 무대 아래서 발언을 합니다.

지도부는 위에 서고 대중은 밑에서 얘기하는 이 모양새는 그 동안 무수한 촛불집회에서 봐왔던 대중의 당당함을 깎아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발언들도 일반적인 분노나 약자와의 연대에 대한 당위적인 주장 이상은 없어서 살아있는 생생함을 느끼기도 어려웠습니다.

시민의 참여와 열기를 모아내는 집회가 아니라 올바른 정치적 입장으로 활동가들이 앞장서면 시민들이 따라가게 만드는 집회였습니다.

계엄국면 초반의 집회에서 느꼈던 공허함은 사라졌지만 이질감은 여전했습니다.

 

막차 시간 때문에 거리행진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집회만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도시를 벗어나 어두운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우더군요.

남태령에서 농민과 시민의 뜨거웠던 연대에 대해 그렇게 많은 얘기들을 하고 있었지만

저처럼 시골에서 홀로 농사짓고 있는 이들에 대한 배려는 없었고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분들에게 저는 동지가 아니더군요.

 

 

2

 

탄핵집회에 참가하고 나서 투덜투덜 거리고 있었는데

또 한 번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믿기지 않는 소식에 한숨이 절로 나왔고

끔찍한 영상에 할 말을 잊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안전한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꿈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계엄 소식에는 뉴스를 보지 않고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었는데

참사 소식에는 뉴스를 보는 것이 너무도 끔찍했습니다.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통과하며 그나마 조금씩 일상을 찾아가고 있었는데

되찾아가는 일상이 비참해보일 정도로 또 다시 깨져버렸습니다.

뉴스를 볼 수도 안 볼 수도 없고

뭔가를 차분하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안하며 멍하니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뉴스를 보다가 마음이 착잡하면 영화를 보며 마음을 달래고

밤에는 쉽게 잠이 들지 않아 술을 사다 먹고서야 잠에 빠져듭니다.

 

그래도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니 마음의 출렁임이 조금 가라앉았고

하우스와 텃밭에서 잠시라도 일을 하며 시선을 돌려봤습니다.

다시 뉴스를 접하면 마음은 또 착잡해지지만

그렇게 들썩이는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노력해봅니다.

 

 

3

 

sns에 제주항공 참사에 대한 애도의 글들이 넘칠 때

어떤 분이 제주항공 참사로 윤석열 탄핵 건이 물타기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글을 올렸더군요.

그 글을 보고 마음이 불편해서 “타인의 고통 앞에서 정치적 판단이 앞서기보다는 그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면 합니다”라는 댓글을 남겼습니다.

그 분은 제 댓글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sns에서 활발하게 정치적 발언을 이어가시더군요.

 

차분한 톤으로 기체조를 알려주시던 유튜브를 애용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의 기체조 영상들이 모두 사라지더니 ‘보수 유튜버로 전향합니다’라는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역시나 차분한 톤으로 “얼마 되지 않는 민주당 지지자들에 맞서 욕하면서 싸우겠다”고 하시더군요.

놀랍고 안타까워서 “분노의 에너지가 넘치면 몸과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라는 댓글을 달까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비판적인 댓글들은 순식간에 지워버리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sns에 글을 올렸던 분은 젊은 여성분이었고

유튜브를 올리셨던 분은 젊은 남성분이었습니다.

세대와 젠더로 갈라져 대립하는 현실의 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했습니다.

그리고 최인훈의 소설 ‘광장’이 떠오르더군요.

감격스러운 해방을 맞았지만 남과 북 어느 곳에서도 뿌리내릴 곳을 찾지 못한 이명준은 중립국으로 떠나는 배 위에서 투신자살을 합니다.

‘좌파의 좌파’임을 자처하던 젊은 날의 저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격동의 시기에 민중에 뿌리내리지 못한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이라며 이명준을 비판했었습니다.

‘좌파의 패잔병’이 돼서 뒤로 밀려나버린 저는 활활 타오르는 지금의 상황 속에서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한 채 이명준과 같은 처지가 돼 버렸습니다.

 

잠을 자다 새벽 2~3시쯤 눈이 뜨이면

차분한 음악을 틀어놓고

제 마음을 가만히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처럼 이런저런 생각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데

세상의 거센 파도에 비하면 제 마음의 파도는 잔잔한 편입니다.

세상의 파도를 오롯이 받아들이기에는 제가 너무 나약해서 자신이 없고

제 안으로 숨어버리기에는 세상의 파도가 너무 거셉니다.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지금 이곳에서

이명준처럼 바다에 몸을 던져버릴 것이 아니라면

그냥 그 출렁임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과 함께 출렁이다보면 출렁이는 리듬에 올라탈 수도 있고

세상의 출렁임 속에서 누군가의 호흡이 느껴지면 그 호흡에 녹아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같이 출렁 출렁거리며 2025년을 시작해봐야겠네요.

 

 

(박준의 ‘타는 목마름으로’)

여객기 참사 희생자들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