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를 열심히 살게 해준 원동력은 꿈, 사랑, 모정 세 가지 요소였다

"앞으로 내 생애는 몇 페이지의 여백이 남아있는 것일까. (중략) 나는 지금 나의 인생 전부의 어느 선에 서 있는지 모르나, 지나간 날을 생각해보니 별로 후회할 일도 없이 무던히 살아왔다는 자부를 갖는다. 나의 과거를 열심히 살게 해준 원동력은 '꿈'과 '사랑'과 '모정'이라는 세 가지 요소였다고 생각된다. 꿈은 그림과 함께 호흡해왔고, 꿈이 아닌 현실로서도 늘 내 마음속에 서식을 해왔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 해준 것이 사랑과 모정이었다."

서울시립미술관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전의 화가 천경자 작품을 감상하던 중, 그림 만큼이나 빠져들었던 것이 그의 글이었어요. 자서전의 글을 보며, 내 생애는 한 권의 책 중 몇 페이지에 도달했을까, 나의 원동력인 꿈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 죽으면 풍성한 열매가 열리는 아주 큰 나무에 뿌려지고 싶어

하얀 눈이 펑펑 내리던 루체른을 걷던 중, 독일 친구가 물었어요. "죽은 후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본 적 있어?" 천국과 지옥, 또는 환생과 같은 개념을 물어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난 화장을 해서 가루가 된 다음에, 열매가 열리는 아주 큰 나무에 뿌려지고 싶어. 기둥이 아주 굵어서 두 팔 벌리면 가득 안을 수 있는. 날 보고 싶을 때면 나무를 안으면 되는 거야. 그리고 난 토양의 영양분이 되고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해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나눠주고 싶어."

전 할머니가 되었을 때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답을 아직 찾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데 이 친구는 더 나아가 죽고 난 뒤 남겨질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가 될 것 인가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랑하는 가족들, 소중한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기억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어요.

◻️ Still Life, Stillleben, 삶의 유한함

우연히 수요일에 스위스 취리히에 가게 되어, 미술관을 방문했어요. 취리히 미술관의 컬렉션은 수요일 마다 무료로 관람할 수 있거든요. 엄청난 거장들의 작품들이 2개의 건물에 가득 전시되어 있어서, 빠르게 보는데도 3시간이 걸렸어요. 수많은 걸작 속에서도 제 시선을 사로 잡는 것은 단연 정물화예요. 정물화만이 가진 고요함과 정적, 균형과 조화,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찰나의 시간들과 메세지들이 상상을 자극하거든요.

정물화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메세지를 담고 있는 '바니타스' 장르의 그림이 많아요. 17세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본격 출현한 바니타스 정물화는 인간의 허영과 욕망, 그리고 인생의 덧없음을 반영해요. 과일, 술, 꽃, 악기 처럼 흔한 소재들이 삶에 대한 메세지를 담고 있어요. 탐스러운 과일은 물질에 대한 인간의 탐욕을 나타내는 한편, 깎여나가고 부패해버린 음식물들은 허무함을 의미해요. 화려한 꽃의 찰나의 피어남과 시듦은 인생의 유한함과 닮았구요.

당시 네덜란드 시민들은 정물화를 걸어 놓고 감상하며 스스로를 성찰했다고 해요. 정물화는 영어로 'Still Life', 독일어로는 'Stillleben' 이에요. '정지한 삶', '고요한 자연' 등으로 해석할 수 있어요. 'Still'은 '아직도', '그럼에도'의 뜻 내포하기에, 정물화는 '여전히 계속 되는 삶'의 의미를 전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독일 친구의 생각이 정물화와 많이 닮았어요.

◻️ Art your life

여행을 하는동안 이번 테마에 대한 답을 대략 찾을 수 있었어요. 너무 자세한 내용은 궁금하지 않을 것 같아, 간단히 이야기 해볼게요. 지금까지 저는 경쟁과 성취를 추구하며 항상 조급하고 불안했어요. 매번 늦은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부족함과 자책감을 느껴요. 그런데 제가 정말 원하는 것은 낭만과 유머가 있는 삶이에요. 그리고 주변의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따뜻함과 사랑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어요.

화가 천경자는 당시로는 드물게 40대 후반의 나이에 해외 여행을 시작하며 70대 초반까지 스케치 기행을 즐기고 많은 작품을 남겼어요. 소설가 박완서도 전업주부로 살다 마흔의 나이에 등단하여 약 40년 간 작품 활동을 했구요.

우리의 삶은 유한하지만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늦은 때는 없어요. 정형화된 삶 또는 다른 사람의 기준과 평가에 갇혀 살 필요도 없구요. 때마침 독일 슈투트가르트 시내를 걷다 한 갤러리 입구에 적힌 글이 눈에 들어왔어요. "Art your Life." 나만의 삶을 만드는 아티스트가 되어보는 것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