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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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책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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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_usj73co68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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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길 전철에서 책을 읽는 분들이라면 공감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손에 쥐기 벅찬 벽돌책, 남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제목, 때로는 감정이 북받쳐 참기 어려운 울컥함까지. 저 역시 그런 이유로 출퇴근용 책을 고를 때 꽤 신중해집니다.

그런데 요즘, 제목부터 다소 파격적인 한 권의 책을 아침마다 펼쳐 들었습니다. 어쩌면 남들이 보기엔 출근길 풍경과 그리 어울리지 않아 보일 수도 있는 제목이죠.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입니다. 

이상하리만큼 솔직하면서도, 동시에 많은 이들이 공감할 법한 말입니다.

이 책, 왜 지금 우리의 출근길에 어울릴까요?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는 2025년 월급사실주의 동인이 펴낸 세 번째 앤솔로지입니다. 

이 시리즈는 2023년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2024년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에 이어, 올해도 ‘지금, 여기’ 한국 사회의 노동 현실을 생생한 소설로 기록합니다.

이번 2025년판은 특히나 존엄, 소속감, 쓸모, 효능감 같은 단어들이 유독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이러한 감정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우리가 속한 조직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개인의 노동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대우하는지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책 속 인물들이 겪는 어려움은 때로는 부조리한 시스템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단순히 ‘힘들다’는 고발을 넘어서, 우리가 ‘어떻게 존엄을 지키며 일할 수 있을까’를 묻는 이야기들이 모여 있습니다. 장애인, 이주노동자, 디지털 노동자, 경력단절 여성, 해외 청년 노동자까지, 말 그대로 우리 시대 노동의 '경계인'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냅니다.

구성: 8편의 단편이 들려주는 8가지 노동의 얼굴

이 앤솔로지에는 총 8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김동식 〈쌀먹: 키보드 농사꾼〉 
온라인 게임 속 생계를 이어가는 ‘비정규 노동자’. 게임사가 거래를 막자 싸움에 나서는 주인공의 이야기로, 플랫폼 노동의 현실을 유쾌하게 풍자합니다.

서수진 〈올바른 크리스마스〉**
호주 대형 마트에서 일하는 이주여성 주미. 자청한 크리스마스 근무에도 승진은 ‘원주민 남성’의 몫. 국적, 성별, 비정규직이라는 삼중의 벽 앞에서 무너지는 한 사람의 분투.  

예소연 〈아무 사이〉**
돌봄 노동자와 치매 노인 사이의 긴장과 책임. 어느 날 사라진 노인을 찾는 과정에서 묻는 질문: 돌봄이란, 책임이란, 그리고 우리는 아무 사이일까?  

윤치규 〈일괄 비일괄〉
‘육아휴직→퇴사→경력 단절→복직 실패’라는 전형적인 궤적 속 여성 노동자의 현실.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의 경계, 그리고 연대의 가능성에 대해 묻습니다.  

이은규 〈기획은 좋으나〉
탁상공론으로 기획된 프로젝트와, 현실과의 괴리를 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 ‘좋은 기획이 왜 늘 무력하게 끝나는지’를 날카롭게 포착합니다.  

조승리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저시력 장애인 안마사인 주인공이 백화점 지하에서 겪는 무례와 무력. ‘성실함’조차 비웃는 구조 속에서, 어떻게든 원칙을 지키며 존엄을 버티는 이야기.  

황모과 〈둘이라면 유니온〉
일본에서 일하는 한국 청년의 이야기. AI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반복노동을 강요받는 현실. 글로벌 노동시장 속 청년의 무기력과 정체성 혼란.  

황시운 〈일일업무 보고서〉**
중증장애인 세진의 재택근무. 매일 보내는 업무 보고서는 사실 아무도 읽지 않는다. 그저 장애인 의무고용률을 맞추기 위한 ‘쓸모 있는 존재’로만 기능하는 일의 허무함.  

**: 다 좋은 작품들이지만, 개인적으로 좀 더 깊은 인상을 받은 작품들입니다.

출근길에 읽는 이유, 그리고 이 책이 건네는 질문

이 책을 읽는 동안, 저는 같은 전철 칸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새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무표정한 얼굴, 졸린 눈,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손들. 그들 각자의 ‘일하는 자리’엔 어떤 이야기들이 있을까요? 혹시 그들 중 누군가는 이 책 속 주인공처럼 ‘자신의 쓸모’를 의심하며 일하고 있진 않을까요?

우리 모두는 누구나 한 번쯤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이런 데’는 실제 공간이 아니라, ‘존중받지 못하는 자리’, ‘내 존엄이 깎이는 구조’를 뜻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존엄이 깎이는 구조'는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제도적 차별일 수도 있고, 때로는 성과만을 강조하며 과정을 무시하는 조직 문화일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인식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구조적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개인의 자조를 넘어 시스템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게 합니다.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는 우리 모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 당신은 지금, 어떤 노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 당신의 노동은 존엄과 연결되어 있나요, 아니면 그 반대인가요?

  • 당신이 ‘쓸모없다’고 느끼는 그 자리에서, 누구도 대신해주지 못할 당신만의 가치가 숨겨져 있다면 어떨까요?

  • 우리의 노동 환경과 사회 시스템은 개인의 존엄성을 충분히 지켜주고 있을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꾸기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할까요?

  •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연대하고 함께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 책은 “이런 데서”라는 자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자조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 애쓰는 이들의 처절하면서도 숭고한 분투를 그려냅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6371642

왜 ‘월급사실주의’일까?

‘월급사실주의’라는 동인은 소설가 장강명의 제안으로 출범(?)했습니다. 이름은 1950~60년대 영국의 ‘싱크대 사실주의(kitchen sink realism)’에서 따왔습니다. 우리 주변 보통 사람들의 노동 현장을 판타지 없이 현실적으로 그리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매년 한 권씩 발간되는 이 시리즈는 각 해마다 주제 의식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어떤 주제 의식으로 다가올지 벌써부터 궁금합니다.   

  • 2023년: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 먹고사는 문제 자체에 대한 고발

  • 2024년: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 노동 내 관계와 구조, 불평등

  • 2025년: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 정체성과 존엄, 사회적 소수자의 내면

이 책이 필요한 순간   

  • 오늘도 일터로 향하며 ‘이게 맞는 걸까’ 의심이 들었던 순간

  • 내 일에 의미를 찾기 어려웠던 날

  • 타인의 노동 현실이 궁금했던 때

  • 차마 말 못 했던 무력감과 자괴감을 누군가 대신 말해주길 바랐던 날

나가며: 전철 안에서 시작된 연대의 시선

책장을 덮고 나면, 출근길 전철의 풍경이 조금은 달라 보일지도 모릅니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누군가, 가방을 꼭 끌어안고 졸고 있던 청년, 자리 없이 문 옆에 선 채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던 직장인까지.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안고 오늘도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이겠지요. 

그리고 이 책은 그 개별적인 이야기들이 실은 우리 사회의 노동 현실이라는 거대한 직물 속 한 올 한 올임을 깨닫게 합니다. 개인의 고뇌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수많은 '우리'의 문제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는 단지 제목이 솔직해서 눈에 띄는 책이 아닙니다. 
‘당신도 나와 같지 않나요?’ 하고 조용히, 그러나 깊이 묻는 책입니다.

당신의 아침을, 출근길을, 하루의 한가운데를 바꿔줄 책이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행운 메시지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