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의 시간을 걷다 -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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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시간을 걷다 -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

여러분은 "나폴리" 하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이탈리아 남부의 항구도시로 쪽빛 바다와 아름다운 해변 풍경을 품은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아니면 얼마 전 흑백요리사에서 우승을 한 "나폴리 맛피아" 권성준 요리사가 만든 리조토가 생각나시나요? 아마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김민재" 선수가 떠오르기도 할 겁니다. 혹은 "통영"이 생각나시는 분도 있겠네요. 통영이 한국의 나폴리라고 불리니까요.
하지만 제가 "나폴리"라는 단어를 들을 때면, 가슴 한편에 묵직한 무게가 느껴집니다. 마치 풀지 못한 숙제처럼, 혹은 반짝이는 보석을 발견하고도 주머니에 넣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이 가져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런 안타까움 같은 것이 밀려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 때문입니다.
처음 이 작품의 첫 번째 이야기인 『나의 눈부신 친구』를 만난 것은 2016년 겨울, 국내 출간 직후였습니다. 당시 저는 작가나 작품에 대한 어떤 사전 정보도 없이, 단지 표지가 아름답다는 이유로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이후 두 번째 권인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까지는 읽었지만, 나머지 권은 읽지 못했죠. 완간까지 기다리기엔 이 세상에는 읽을 책이 많고, 취향이 새털처럼 가벼운 저는 그만 딴 길로 새어나가 버렸습니다.
그 후로도 이 작품은 끊임없이 저를 불러들였습니다. 마치 헤어진 연인의 소식이 이곳저곳에서 눈에 띄는 것처럼 말이죠. HBO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다는 소식,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책 100권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미완의 독서에 대한 부채감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그러던 중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다름 아닌 건강검진에서 갑상선에 나쁜 놈이 발견되어 수술을 해야 했죠. 일주일간 병실에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하고, 2주 정도 병가를 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제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이 "아! 이건 하늘이 내려준 기회다. 딴생각 말고 나폴리 4부작을 읽어보자!"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생각하는 하는 저는 정상일까요? 도대체 언제 철이 들까요?)
📚 나폴리 4부작: 시대를 관통하는 우정의 서사

나폴리 4부작은 195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이탈리아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두 여성의 복잡하고도 깊은 우정을 통해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탐구하는 대서사시입니다. 작품은 『나의 눈부신 친구』,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떠나간 이들과 머무른 이들』,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의 네 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총 분량 2,400여 페이지에 다다르고, 네 번째 이야기인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는 680쪽에 달하는 ‘벽돌’ 같은 두께를 자랑합니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엘레나(레누)와 라파엘라(릴라)라는 두 여성이 있습니다. 나폴리의 가난한 동네에서 자란 이들의 삶은 마치 두 개의 나선이 서로를 감아도는 것처럼 얽혀 있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우정을 넘어 질투, 경쟁, 사랑, 증오가 복잡하게 얽힌 끈처럼 이어져 있죠.
👯♀️ 두 주인공: 서로의 거울이 된 삶

엘레나(레누)는 학문을 통해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교육을 통해 나폴리의 빈곤한 환경을 벗어나 지식인으로 성장합니다. 피사 대학에서 공부하고, 작가가 되어 성공을 거두죠. 하지만 그녀의 마음 한편에는 늘 불안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릴라의 존재 때문입니다.
라파엘라(릴라)는 천재적인 지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놀라운 통찰력과 창의성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녀는 나폴리라는 공간에 묶여 있습니다. 결혼, 가정폭력, 가난이라는 현실의 굴레 속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생존해 나갑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복잡합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증오하고, 이해하면서도 질투합니다. 엘레나는 학문적 성공을 이루었음에도 늘 릴라의 그림자에 사로잡혀 있고, 릴라는 나폴리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 시대와 공간: 나폴리라는 무대
나폴리 4부작에서 나폴리는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이 도시는 마치 또 하나의 주인공처럼 이야기 속에서 살아 숨십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혼란스러운 시기부터 시작해, 경제 부흥기, 정치적 격변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나폴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본질적인 모습을 잃지 않습니다.

특히 작품의 주요 배경이 되는 리오네 루차티(Rione Luzzatti)는 1914년에서 1929년 사이에 지어진 주택단지로, 폭력과 가난이 일상화된 곳입니다. 이곳에서 두 주인공은 성장하고, 때로는 도망치려 하고, 때로는 되돌아옵니다. 나폴리는 그들에게 어머니이자 감옥이며,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결코 완전히 떠날 수 없는 운명의 장소입니다.
⏳ 역사적 맥락: 전후 이탈리아의 변화
작품은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이탈리아 현대사를 생생하게 담아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극심한 빈곤과 혼란, 경제 부흥기의 희망과 좌절, 1968년의 학생운동, 노동운동의 격동기, 그리고 마피아의 영향력 등이 세밀하게 묘사됩니다.
특히 여성의 지위 변화는 작품의 중요한 축을 이룹니다. 1975년까지 이탈리아 여성들은 법적으로 아이들과 같은 권리만을 가졌으며, 가정폭력은 일상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엘레나와 릴라의 이야기는 단순한 개인의 서사를 넘어, 한 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의 투쟁과 성장을 대변합니다.
🏆 문학적 성취: 현대의 고전이 되다
나폴리 4부작은 현대 문학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 작품은 전 세계 45개국 이상에서 번역되어 1,5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페란테 열풍(Ferrante fever)'이라는 문화 현상을 일으켰습니다.
작품의 특별함은 여러 층위에서 발견됩니다. 먼저, 페란테는 가정폭력, 성적 질투, 수치심과 같은 문학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던 경험들을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또한 내면의 심리 묘사와 복잡한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능력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의 대가'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 미스터리한 작가: 엘레나 페란테
엘레나 페란테는 1992년 첫 소설을 출간한 이후 지금까지 자신의 실제 정체를 철저히 감추고 있는 작가입니다. 그녀는 "책은 일단 쓰여지고 나면 작가가 필요 없다"라는 신념 하에 익명성을 고수하고 있으며, 이러한 익명성이 자신의 글쓰기 과정에서 핵심적인 요소라고 주장합니다.
페란테의 글쓰기는 화려한 문학적 수사 대신 의도적으로 단순하고 직접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마치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자연스러운 서술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독자들로 하여금 더욱 깊은 몰입감을 느끼게 합니다.
💫 주요 메시지: 인간의 보편적 진실을 향해

나폴리 4부작은 여러 층위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의 자유와 억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50년대 나폴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제약과 이에 대한 저항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성차별의 문제를 돌아보게 됩니다.
교육과 계급 이동의 의미도 중요한 주제입니다. 엘레나의 학문적 성취를 통한 계급 이동과 릴라의 지역사회 내에서의 성장은 서로 다른 해방의 형태를 보여줍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또한 작품은 폭력의 순환과 사회적 유산이라는 테마를 다룹니다. 나폴리의 빈민가에서 일상화된 폭력은 단순한 물리적 폭력을 넘어 사회적, 심리적 폭력으로 이어지며, 이는 세대를 걸쳐 반복되는 순환의 고리를 형성합니다.
❓ 왜 지금 나폴리 4부작인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나폴리 4부작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이 작품은 현대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들을 깊이 있게 다룹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의 자리, 계급 이동의 가능성과 한계, 교육을 통한 자아실현의 문제 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입니다.
둘째, 이 작품은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탁월하게 묘사합니다. 디지털 시대에 약화된 인간관계의 본질을 되짚게 하며, 피상적 친밀감과 달리 '경쟁·질투·연대가 공존하는 진정한 유대'가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셋째, 작품은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60년에 걸친 서사로 풀어낸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입니다. 나치 잔재, 정치 부패, 마피아의 폭력이 일상화된 나폴리는 현대 도시의 그림자를 응축해 보여주며, 등장인물들이 직면한 선택—탈출과 순응, 개인적 성공과 공동체 유대 사이의 갈등—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민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병실에서 읽은 나폴리 4부작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문득 어이없는 웃음이 났습니다. 진통제를 맞아가며 무슨 청승인가 싶더군요. 배우자에게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수술 후 병상에서 이런 묵직한 소설을 읽었다는 게 이해가 안 될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에게 이 책들은 오히려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엘레나와 릴라의 이야기는 마치 오랜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편안했거든요.
이제 '풀지 못한 숙제'는 끝났고, '놓쳐버린 보석'도 찾았습니다. 다음은 뭘까요? 아, 그러고 보니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면 꼭 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네요. 글 서두에서 언급했던 “나폴리 맛피아” 권성준 셰프의 리조토를 먹으러 가는 거죠. (예약이 아이유 콘서트 티켓팅 난이도라면서요?) 누가 아나요? 어쩌면 그곳에서 엘레나와 릴라가 좋아했을 법한 나폴리의 맛을 만날 수 있을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