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난 걸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어: 미성년

일어난 걸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어: 미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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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난 걸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어: 미성년

뉴니커
@user_u2oeivdv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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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시절, 미성년-
정말 미성년인 인물은 누구인가.

표면적으로 영화를 끌고 가는 건 아이들이다. 판단은 서툴고, 선택은 위험하며,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온다. 그래도 아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를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한다. 서투를 지언정, 외면하지 않는다. 반대로 어른들은 끝까지 아무도 아무것도 직면하지 않는다.

두 딸이 처음 설정한 문제는 서로 달랐다. 한 아이에게 문제는 바람을 피우는 아빠를 엄마 몰래 가정으로 되돌려놓는 것이었고, 다른 아이에게 문제는 엄마의 무책임 그 자체였다. 이 차이는 결정적인 균열을 만든다. 폭로의 순간, 순식간에 한 아이의 목표는 깨지고 다른 아이의 목표는 유지된다. 목표를 잃은 아이는 무엇을 해결해야 할지 모른 채 아빠를 거부하는 쪽으로 멈춰 선다. 그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이건 잘못된 것'이라는 감각이다. 그렇게 그 둘은 적에서 동지가 된다.

영화 내내 어른들의 반응은 인상적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반응하지 않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아빠는 이혼도, 관계의 정리도,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상황을 최소 비용으로 넘기려 한다. 싸게, 조용히, 빨리, 대충. 만 원으로 해결해보려다 결국 맞는 장면에 이르지만, 그것은 응징이나 종착지가 아닌, 회피가 물리적 형상을 얻은 순간에 가깝다. 그 이후에도 그는 택시기사로부터 숨어버린다. 끝까지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얄팍한 커튼 뒤에 겨우 버티는 사람이다.

사랑하지 않는 남편과 각방을 쓰며 살고 있는 엄마에게 이 일은 감정보다 처리해야 할 일들로 다가온다. 집을 내놓고, 이혼을 진행하고, 이후의 삶을 결정해야 한다는 현실 앞에서 어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음식을 싸들고 상간녀의 병문안을 간다. 슬픔이나 분노보다 청구서 처리가 앞선다.

상간녀도 마찬가지다. 그는 불륜남과의 다음 삶이라는 이미지 속에서 막연히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하지만, 적극적으로 이혼을 요구하지도 않고, 아이를 살리기 위해 애쓰지도 않는다. 조기출산으로 아이를 잃고서도 '내 인생이 그렇지 뭐'라는 공허한 태도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채 티비를 본다.

어른들에게 이 모든 일은 그저 놓여진 '상황’이다- 관리해야 할 변수, 지나가야 할 국면.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사건’이 된다- 시간을 가르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그래서 어른들은 그저 그렇게 넘어가지만, 아이들은 멈춰 서서 목표를 수정하고 어떤 결론에 도달한다.

아이들이 애쉬를 나누어 먹는 장면은 단순한 책임의 제스처가 아니다. 그 책임은 원래 아이들의 것이 아니며, 떠맡는다고 해서 더 정의로워지지도 않는다. 애쉬를 날려보내면 상황을 끝내는 셈이 되고, 버려버리면 없던 일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둘이 나누어 삼킨다는 선택은 '이것은 일어났고 이미 내 삶의 일부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 가깝다. 거창한 의미를 만들지 않지만, 부정하지도 않겠다는 태도.

이 영화를 통해 어른들은 끝내 성장하지 못한다. 아주 큰 일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뻔한 해결책으로 정리하려고 하거나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척 한다. 아이들만이 사건을 온전히 통과한다. 너무 이르게, 너무 조용하게.

그렇다고 아이들이 '더 성숙하다'거나 어른들이 '덜 성숙하다'는 기호를 억지로 집어넣지 않는다(몇몇 장면이 떠오르긴 하지만..). 책임을 진다는 건 다른 책임을 내려놓는 것이기에 성숙한 선택을 쉽게 정할 수 없다. 회피하는 게 성숙하지 못한 거라고 단순하게 질책할 수도 없다.

어른들이 어질러 놓은 것을 아이들이 대신 치우는 클리셰가 아닌, 어질러진 것을 그 자체로 무덤덤하게 나누어 마시며, 그렇게 이 영화는 해결이 아닌 받아들임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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