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이 없음을 견딜 수 없는: 케빈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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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이 없음을 견딜 수 없는: 케빈에 대하여
어떤 집은 시간이 지나도 조용해지지 않는다. 이미 끝난 사건들도, 지나간 말들도, 사라졌다고 생각한 감정들도 어딘가에서 계속 남은 소리를 낸다. 에바의 동네도 에바에게 그랬다. 페인트 냄새와 축축한 공기,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표정들. 매일같이 그녀를 바라보는 얼굴들. 이 모든 것들이 조용한 소리로 그녀를 시끄럽게 둘러쌌다.
사람들이 그녀를 미워하는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해서 그녀는 그냥 받아들인다, '제가 잘못해서 그런거에요'라고 말하며. 항변 같은 건 오래전에 잃었고, 그걸 되찾는 방법도 모르는 사람이라 그냥 조용히 걷고, 운전하고, 일을 찾고, 그렇게 하루를 살아간다.
에바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었다. 선택한 것도, 피한 것도 아닌 채로 여기까지 밀려온 사람처럼. 임신도, 육아도, 결혼도 그녀가 ‘해야겠다’고 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일들이었는데, 적극적으로 '하지 않겠다'고도 하지 않는다. 삶이 어느 날 그녀의 앞에 놓였고 그녀는 그걸 치우지 않고 그냥 둔 채로 그 사이를 지나다녔다.
그녀와 함께 케빈이 있다- 이해할 수도, 붙잡을 수도,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었던 존재. 아이가 되는 방법도, 사람이 되는 방법도, 사랑을 받는 방법도 모두 빗나간 채로 태어난 아이. 자꾸 뱉어내고, 계산하고, 작은 옷을 입으며 엄마를 가장 괴롭게 하는 방법을 태생적으로 알고 있는 아이-
케빈은 자신이 왜 그러는지 알고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으로 집 안을 움직였다. 그의 어떤 말들, 어떤 침묵들, 어떤 표정들이 에바를 조금씩 잠식해 들어왔다. 그것들이 그의 감정인지, 그녀에 대한 공격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케빈의 공격은 언제나 적중했고, 에바는 매번 그 이유를 곱씹었다.
케빈이 몸에 맞는 셔츠를 입은 어느날, 모든 것이 완전히 무너졌다. 집도 동네도 더이상 가족을 품지 못하게 된 날, 동네는 이유를 찾으려 했고 찾을 수 없는 이유를 가장 가까운 에바에게 분노의 형태로 던졌다.
그녀는 무너지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런 방식으로 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죽음으로 빠질 만큼 단단하지도 않았고, 도망갈 만큼 유연하지도 않아서- 그냥 남았다. 남아서, 다시 방을 만들었다. 지워지지 않는 페인트를 손톱으로 긁어내고, 덮고, 남겨진 냄새를 억지로 중화시키고, 벽과 벽 사이 빈 공간을 채우며 하루를 넘겼다.
케빈은 마지막에 말했다. “그땐 이유를 알았던 것 같아. 근데 지금은 모르겠어.” 그 말이 오래 남는다. 어쩌면 본인이 전능하다고 착각했던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그 착각이 서서히 무너지게 된걸까.
하지만 에바에게 그 말은 그저 또 하나의 파편처럼만 들렸다. 이유가 있든 없든 그녀의 삶은 이미 파편들로 구성돼 있다. 그 파편 조각의 자리를 찾으려는 듯 에바는 케빈을 꼭 안는다. 따뜻할 것도, 차가울 것도 없는 건조한 순간- 파편은 또다시 떠다니겠지.
자꾸만 누군가를 향해 뾰족해지는 동네 사람들, 잘못은 공유하지 않으면서 고통만 밀어놓는 골목들. 살인자의 엄마를 미워하면서 사실은 그 미움을 통해 겨우 견디는 사람들. 그런 감정들이 서로 부딪히고 흩어지는 곳.
그래도 에바는 오늘도 그 동네를 지난다. 아무렇지 않은 척도 아니고, 완전히 지친 모습도 아니고, 그저 살아 있는 사람으로.
삶은 그런 식으로 계속된다. 파편 위에 서 있어도, 붉은 벽 앞에서도, 누군가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는 이름을 동시에 붙인 채로도 어떻게든 지나간다.
그리고 에바는 그 지나가는 방식 그대로 조용히, 천천히, 아주 인간적으로 살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