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고 싶었던 너, 잃고 싶지 않았던 나: 은중과 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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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고 싶었던 너, 잃고 싶지 않았던 나: 은중과 상연
예쁘고, 하얗고, 공부도 잘하고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는 아이, 상연. 은중의 마음은 동경에서 시작됐다. 그건 그렇게 복잡한 감정이 아니었다. 부잣집에서 자라고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상연을 바라보며 은중은 자신이 가진 세상과 다른 풍경을 느꼈다. 그리고 처음 자기가 가난하다는 걸 알게되었다. 하지만 그건 모난 질투가 아닌 부드러운 부러움, 상대적 초라함이다. 그 감정에는 대상 자체에 대한 미움은 섞여 있지 않다.
은중은 자신이 상연의 자리를 빼앗고 싶지도, 대신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그 옆에서, 조금 닮은 친구가 되고 싶었을 뿐- 상연이 가진 것들은 은중의 것이 아니었고, 탐내지도 않았다. 은중에게 상연은 그저 좋은 친구였다.
부러움이 있었지만 그것이 자기 존재를 깎아내리지 않았고, 가난이 부끄러웠지만 그로 인해 가족을 미워하지는 않았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동경할 수 있다는 건, 마음이 단단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가끔은 상연이가 미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상연이라는 사람을 향한 미움이 아니라, 억울한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을 뿐, 미움이 오래 머물지 않았고, 남은 건 여전히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상연이는 처음부터 결핍을 안고 있었다. 세상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주지 않는 다는 감각,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간다는 감각 속에서 자라났다. 부모의 사랑도, 가족의 관심도,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의 마음까지- 상연이 은중에게 느낀 감정은 단순한 질투가 아니라 원래 내 것이었던 것을 되찾고 싶다는 복합적인 마음이었다. 상학 선배에 대한 감정도 마찬가지. 자신이 먼저 좋아했는데, 그 마음이 (또!) 은중에게로 향했으니, 그것 '또한' 빼앗겼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상연에게 복수는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자기회복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내 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감정이 쌓일수록 상연은 점점 자신을 파괴했다. 하지만 복수는 결코 회복을 주지 않고 상처의 무게만 더 크게 만들 뿐이다. 은중에게 복수가 성공한다 한들, 상연의 상처가 새로운 살로 차오를 리 없다. 상연이 찾던 건 자신의 결핍을 메워줄 무언가였는데, 타인을 통해 얻으려 하면 결국 또 다른 공허가 찾아올 수 밖에.
가족의 사랑도 주는 사람의 몫이지, 받는 사람의 소유가 아니다. 상연은 그걸 이해하지 못한 채, 사랑을 가질 수 있는 것, 가져야만 하는 것이라 믿었다. 어린 상연에게 그건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감정이었으나 그 감정의 자연스러운 전환의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렇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느낄 때마다 세상을 원망했고, 그 원망은 단단한 은중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 방식으로는 어떤 회복도 불가능했다. 사랑은 누구에게도 소유될 수 없고, 복수로는 채워지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상연이 진심으로 마주한 사람이 은중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은중은 상연을 향해 꾸밈없는 진심을 보였고,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하면서도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상연은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은중의 온기를 느끼고, 은중이가 사랑받는 게 당연하다는 걸 그 역시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왜 아닌가'를 마주해야 하니까.
그래서 밀어내고 괴롭힌다. 자기처럼 은중도 못되게 굴고 무너지길 바랐고, 그래서 은중을 미워하는 자신에게 이유를 부여하려 했다. 하지만 은중은 절대 '스스로가 못되지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단단한 은중을 볼 수록 상연은 숨이 막혔다.
동경은 타인을 향한, 결핍은 자신을 향한 마음이다. 은중은 상연을 통해 '반짝거리며 빛나는 타인'을 보고, 상연은 은중을 통해 '사랑받지 못하는 나'를 본다. 은중은 상연을 이해하려 했고, 상연은 자신을 마냥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은중을 두려워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잃은 것을 되찾으려 했지만,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걸 놓쳤다— 서로의 진심.
사람의 관계는 자주 이런 식으로 어긋난다. 닮고 싶어서 다가가고, 잃을까봐 밀어낸다. 방향이 다를 뿐, 둘 다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관계의 본질은 사랑의 방식이 어긋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상연은 결국 복수로도 자기 자신을 회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은중은 그 관계를 통해 배웠을 거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상대를 바꾸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일이라는 걸-
결국 사람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배우고, 결핍을 통해 자신을 마주한다. 동경은 타인을 닮아가려는 시도이고, 결핍은 자신을 되찾으려는 시도다. 두 사람의 감정이 엇갈렸던 건 슬픈 일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이 성장하는 방식이 담겨 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동경하고, 또 누군가에게 결핍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건 서로를 이해하고 싶은 증거가 아닐까. 다만 그 마음이 타인을 향할 때, 자신을 잃지 않기를- 진짜 회복은 언제나 타인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시작되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