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리지 않아도 괜찮은 혼란에 대하여: 애프터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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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지 않아도 괜찮은 혼란에 대하여: 애프터썬
영화 애프터썬을 보고 난 뒤, 어떤 특정한 감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여운이 오래도록 남았다. 영화를 볼 때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혼란스러웠지만, 극장을 나서는 순간부터 오히려 영화가 시작되는 것 같았다. 한동안 영화의 장면들이 머릿속에 불규칙하게 떠올랐고, 그 파편들을 따라가며 감독이 어른이 되어 겪는 혼란의 근원을 나도 함께 더듬는 기분이었다.
그 혼란은 단순히 현재의 문제나 관계의 어긋남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의 기억, 수영장 물속으로 잠수하는 장면처럼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그때'로부터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혼란은 아버지의 것을 물려 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흥미로운 건 그 감정들이 결코 부정적으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는 혼란을 해결하거나 정리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하나의 존재 상태로 받아들였다. 클럽의 조명 아래 가만히 서있는 화자처럼, 그저 '그래도 살아간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구성이 콜라주처럼 느껴졌다. 과거와 현재가 흩어져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결로 이어져 있달까. 아버지와의 기억, 관계의 단편, 성장의 순간, 성과 정체성에 대한 어렴풋한 깨달음들이 서로를 설명하지는 않지만 완전히 무관하지도 않은 방식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서사를 위한 근거가 아니라, 그저 함께 놓여 있음으로써 의미를 만들어내는 조각들이었다. 어쩌면 삶이란 본래 그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게 아닐까.
영화를 보고 나서 깨달았다. 내가 느껴왔던 어떤 감정들도 그런 콜라주와 닮아 있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는 불안,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 이해되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애정 같은 감정들. 그동안 나는 늘 이유를 찾아내서 말로 설명하고 싶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어디서 비롯된 건지, 어떻게 하면 사라질 수 있을지.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처음으로 그 감정들을 굳이 풀어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란을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그 혼란이 나라는 사람의 일부로 존재하도록 그냥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걸.
영화 속 아버지는 결국 떠났지만 그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부재가 딸의 현재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조각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상처이자 기억이고, 동시에 이해의 시작이다. 아버지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보다, 그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용서나 화해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느끼는 깊은 공명에 가까운 감정이 된다. 그 순간 화자는 아버지를 이해함과 동시에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해는 명확한 해답이 아니라, 자신 또한 그 혼란 속에 있음을 인정하는 형태로 다가온다.
그 지점이 가장 오래 남았다. 아버지의 혼란이 나의 혼란으로 이어지고, 그 혼란이 다시 하나의 생으로 이어지는 것- 부정도 긍정도 아닌 그냥 살아 있음 그 자체의 감정. 테라스에서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딸의 눈빛이 유독 오래 잊히지 않는다. 마치 현재의 딸이 그때의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직도 너를 이해하려는 중이야. 그리고 그건 어쩌면 평생 계속될지도 몰라.
그 장면을 떠올리면, 내 안의 콜라주들이 함께 깜빡인다. 선으로 이어지지 않는 기억들, 감정의 파편들,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이 여전히 흩어져 있지만, 그 모든 혼란이 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완벽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하는 나, 불안과 애정, 분노와 그리움이 동시에 자리한 나. 그것을 하나의 완성된 그림으로 만들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콜라주란 애초에 완벽한 형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조각들이 모여 그저 존재하는 상태니까.
어쩌면 삶도, 관계도, 감정도 그런 식으로 흩어진 채로 살아가는 것일지 모른다. 그것들은 선처럼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하지도 않다. 오히려 그 불완전한 연결 속에서 스스로를 더 깊이 들여다 보게 된다. 그래서 이제는 혼란을 결함이나 문제로 보지 않는다. 그것이 내 안의 어떤 오래된 기억과 맞닿아 있고 이해되지 않는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
영화가 남긴 건 위로나 교훈이 아니라, 혼란 속에서조차 우리가 서로를 닮아가고 있다는 묘하고 조용한 실감이다. 풀리지 않아도 괜찮은 혼란. 오히려 그 혼란 덕분에 나는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끼고, 그렇게 이어진 조각들 사이에서 나라는 존재를 조금씩 이해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