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웨일, 나는 정말 너를 구원할 수 있는가

더 웨일, 나는 정말 너를 구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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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웨일, 나는 정말 너를 구원할 수 있는가

뉴니커
@user_u2oeivdv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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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구할 수 있을까? 아니면, 구원은 오직 스스로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구원은 정말 필요한 것인가?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의 영화 <더 웨일>은 이 거대한 질문을 작은 방 안, 무너지는 한 인간의 육체와 숨결 사이에 배치한다. 신을 믿는 사람, 인간을 믿는 사람,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사람. 이 영화는 구원과 동시에 구원의 부재를 다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리는 포기하지 않고 부서진 삶 속에서 '순간'을 포착하려고 한다.

 

구원의 주체: 신의 의도 vs 인간의 무의도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뉴라이프 소속의 토마스는 신에게 의존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으며, 찰리를 구원하려 집착한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신이 부여한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반면, 찰리는 일관되게 '솔직함'을 강조한다. 찰리에게 솔직함은 구원의 도구이자 본질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솔직함이 타인을 구원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솔직함으로 타인을 구원하라고 조언하지도 않는다. 인간적 구원은 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인간 스스로, 그리고 인간 사이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모비딕 속 고래가 에이험 선장의 의도를 끝내 알지 못한 것처럼, 세상은 서로의 집착이나 의도와 상관없이 계속 움직인다.

 

찰리: 솔직함에 대한 집착

찰리에게 솔직함은 양면적이다.

사랑을 솔직하게 선택함으로써 가족을 상처 입혔고, 고통을 솔직히 받아들이다 자기 자신을 파괴했다. 그럼에도 찰리는 "Write fucking HONESTLY!"를 외치며 끝까지 솔직함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는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구분할 줄 안다. '솔직했기 때문에' 파괴된 것이 아니라, '살아있기 위해' 싸웠기 때문에 부서졌다. 찰리는 자신의 비극을 원망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는 그의 신념은, 솔직함이 곧 생존이었음을 의미한다.

 

엘리: 찰리의 희망

엘리는 가식을 거부한다. 세상을 미워하고, 냉소하며, 왜곡된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나 적어도 괜찮은 척은 하지 않는다. 찰리는 그녀가 자신만을 미워하더라도, 세상과 연결되기를 바란다.

찰리는 엘리의 7학년 때 쓴 짧은 에세이를 '솔직함'의 본질로 보고, 죽는 순간 그것을 듣고 싶어 한다. 결국, 엘리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엘리로 인해 찰리는 구원된다.

 

구원을 말하지만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

출처: 보그코리아

토마스는 타인을 구원하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자신의 구원 욕망을 투사한다. 엘리는 단호하게 말한다. "신을 믿으라는 말로는 누구도 구원할 수 없어."

토마스는 찰리의 사랑과 고통을 자기식으로 해석하고 재단한다. 그 과정에서 찰리는 거의 처음으로 분노를 드러낸다. 아이러니하게도, 토마스는 종교가 아닌 엘리를 통해 가족과 화해할 기회를 얻었지만, 본질적으로 변화하지 않은 채 찰리를 더 강하게 몰아부친다.

구원은 타인의 간절함이나 의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리즈: 죽음을 견디는 또 다른 방식

출처: 보그코리아

리즈는 찰리의 연인이었던 남자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오빠를 잃은 뒤 찰리를 간호하며, 찰리의 신체 기능을 대신한다. 덕분에 찰리는 생존하지만, 그 생존은 감각 없는 연명에 가깝다. 찰리는 과거 기억 속, 바닷가, 가족과의 시간,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한 순간에서만 감각을 느낀다.

리즈는 매일같이 찰리와 함께 죽음을 견디며 동시에 오빠의 죽음을 떠올렸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리즈도 찰리의 해방을 목격할 수 있었다면, 삶과 죽음이 단순히 선악으로 나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텐데, 아쉬웠다.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구원은 거창한 신의 이름으로 오지 않는다. 솔직하게 살아내려는 작은 몸짓 속에서 시작된다.

바닷가에서 고래는 에이험의 복수를 알지 못한 채 힘껏 몸을 던지고, 찰리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육체를 들어 올린다.

찰리는 누군가에게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신도, 타인의 노력도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숨 쉬게 하는 단 한 편의 솔직함을 찾아냈다. 구원은 때로 다른 사람을 통해 오지만, 타인의 의도를 넘어선 자리에서 다가온다.

우리는 지금도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누군가를 살리고, 누군가로부터 살아난다. 찰리와 엘리처럼.

 

(커버이미지: kstar.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