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여우숲 편지 中 일부 발췌)

'정의'란..(여우숲 편지 中 일부 발췌)

작성자 블라디

평범한 사람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들

'정의'란..(여우숲 편지 中 일부 발췌)

블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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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_tulr0bdt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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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에서 여우숲 숲학교 ‘오래된 미래‘를 운영하고 <숲에서 온 편지>를 쓴 김용규 교장의 <여우숲편지>의 편지 일부들을 짜깁기한 글입니다.(문제발생시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지금은 받아보지 않지만, 10여년 전에 받아 본 <여우숲편지>의 하나를 기록에 남겨두었는데, 문득 다시 눈에 띄어 읽어 보았습니다. 1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정의란 무엇인가란 문제와 함께 기득권 세력들의 부정의는 ​변치 않고 벌어지고 있네요.

편지의 저자(김용규 교장)가 그 때의 상황을 보며 기술한 글인데, 현실을 잘 파악해서 편안하면서도 쉬이 읽히도록 써 주었습니다. 지금의 상황에도 너무나 잘 맞는 글인듯 합니다. ‘정의’에 대해 얘기하며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하게 비판하는 글 기술이 참 맘에 듭니다.. 길지만 한번 읽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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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사정을 살펴 모든 이의 행동이 이해될 만하므로 정의 따위는 없는 것이라가 아니라, 정의는 누군가가 겪을 수 있는 부당과 고통이 바로 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점, 법은 바로 그 지점을 헤아려 각 주체가 지키며 살아가야 할 최소한의 무엇을 정한 것으로 나는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정의는 도대체 어디서 싹트는 것일까요? 나는 크게 두 가지에서 그 씨앗을 찾습니다. 하나는 ‘부끄러움’이고 다른 하나는 ‘분노의 응집과 발휘’입니다. 먼저 ‘부끄러움’은 개인 정의의 출발 지점입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은 정의와 함께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사정과 욕망을 따라 살아갑니다. 하지만 다른 생명과 달리 우리가 인간인 것은 바로 우리가 스스로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여서 살다가 실수를 범할 수 있지만, 그 실수조차 스스로 부끄러워 버거워할 줄 알 때 그는 자신에게 조차 준엄해지는 사람이 됩니다. 대학 교수와 정치인, 또는 어떤 사회적 명망가들이 성희롱이나 추행, 부정의한 행동 등으로 피소되거나 추문에 휩싸였을 때 나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토로하고 반성하고 사죄한 사람의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집단과 사회의 측면에서 정의는 ‘분노의 응집과 발휘’ 속에 그 씨앗을 숨기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분노인가? 그것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과 그 행위에 대한 분노입니다.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의의 사례를 마주할 경우 대부분의 착하고 바른 소시민들의 생각은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나나 부끄러움을 알고 반성하면서 제대로 살면 되지, 나한테 직접 연관된 것도 아닌데 뭣 하러 나 밖의 일들에 노여움을 가져? 괜히 골치 아프고 잘못하면 욕이나 보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 부정의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는 자들은 그래서 그런 소시민들이 응집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각종 간계를 부립니다. 분노의 응집과 발휘의 징후가 포착되면 그들을 이간질하고, 그런 움직임을 이끄는 자들을 흠집내고, 떡고물을 던져주거나 겁박하고…, 그 간계들은 수없이 넘쳐납니다. 겁먹어 스스로 멀어지거나 오도된 진실에 눈이 멀어 응집의 구심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떨어져나가거나 피로감을 느끼며 만사가 귀찮다고 은신하거나….

 그래서 사회적 정의는 통절한 자각을 이룬 사람들이 많아져야 실현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자각한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누군가에게 행해지는 부정의를 모르는 척 방치해 두면 언젠가 그 부정의가 내게도 똑같이 행해질 수 있음을 자각한 사람들입니다. 광우병 파동 때 유모차를 끌고 나온 시위 참가자들이 많았던 이유를 나는 그것에서 찾습니다. 일반적으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길에 홀로 엎어진 아이를 외면하기 어렵습니다. 엄마들은 그 아이의 모습이 내 아이의 모습일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자각하는 것이지요. 아주 오래전 내가 군인이던 시절 나의 노모는 집 앞을 지나가다 쉬어가는 특수부대 군인들에게 음료를 나누고 간식을 나눠주시며 군대에 있는 나를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타자의 고통이 언젠가 나의 고통이 될 수 있다는 자각이 응집되고 그것이 발휘될 때 사회적 정의라는 등불에는 불이 켜질 수 있는 것이지요.

 먼저 숲을 예로 보겠습니다. 숲에도 수구(守舊)의 질서가 있습니다. 소나무들로만 가득 들어찬 숲은 소나무들이 기득을 가진 공간입니다. 소나무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 적극적인 방어전략을 구사합니다. 그 대표적인 전략의 하나가 생리적 타감작용(他感作用, allelopathy)입니다. 솔잎이 그 역할을 합니다. 소나무들은 솔잎을 발 아래로 떨궈 숲의 바닥(林床)을 덮습니다. 솔잎이 덮인 숲 바닥에 날아오거나 옮겨진 씨앗은 솔잎이 분비하는 화학적 물질에 의해 발아(發芽)가 억제됩니다. 소나무가 다른 식물의 발아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바닥에 떨어진 솔잎이 그 켜와 두께를 더해가면서 어느 순간 솔잎이 깊은 쪽부터 썩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또한 동물을 비롯한 어떤 외부적 간섭이나 작용이 발생하여 솔잎 투성이였던 바닥의 일부가 흙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때 그 자리에 옮겨지거나 날아온 씨앗이 발아의 기회를 얻습니다. 그 씨앗이 신갈나무라고 예를 들어보면 신갈나무는 소나무의 틈바구니에서 모자라는 빛을 극복하면서 힘겹게 자신의 하늘을 열어냅니다. 어느 순간부터 봄이 오면 꽃을 피우고 가을이 되면 자연적으로, 혹은 어치나 다람쥐같은 동물과 연대하여 도토리 열매를 퍼트려 나갑니다. 마침내 소나무들로 채워졌던 숲에 드디어 새로운 참나무들이 제 하늘을 열게 됩니다. 소나무는 빛을 잃으면 죽는 성질이 있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지만 마침내 소나무의 시대는 청산되고 서서히 숲의 바닥을 지배하는 타감 물질들이 새로운 생명들의 성과와 낙엽들로 대체됩니다. 임상(林床)은 점점 풍성해집니다. 임상이 풍부하게 바뀌면 숲은 순차적으로 더 다양한 생명들로 채워집니다. 풍부한 양분의 조건을 선호하는 더 많고 다양한 활엽수들과 풀들의 시대가 도래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회도 이러한 이치를 따라 변화하며 풍요로워지는 역사를 이루어왔습니다. 노예제와 봉건의 시대의 낡고 부조리한 질서가 그렇게 무너졌고 새로운 시스템이 들어섰습니다. 따라서 우리 사회 역시 먼저 부정의의 온상을 털어내고 새로운 온상을 만들어야 정의의 기반이 마련될 것입니다. 시스템을 바꾸고 그 시스템의 중요 영역을 맡을 사람들을 가능한 송두리째 바꿔야 합니다. 가능한 송두리째 여야 하는 이유는 사과가 썩어가는 것을 상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썩은 부위가 도려내지지 않고 남아 있으면 다음날에 다시 어느 부분에서 또 썩어 들어가기 때문이지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을 몰아낸 자리를 새로 맡아낼 사람들은 최소한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 타인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들, 타인의 노여움을 경청할 줄 아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유능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만인의 열망이 자유롭게 발현되고 이루어질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나가는 것입니다. 임상을 바꿔내는 것이지요. 정의롭고 유능한 사람들이 정의가 실현되는 작은 증거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자주 느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봉건의 임상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임상을 이룬 사람들은 다시는 봉건의 체제로 회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듯, 우리의 경우 80년 중반의 뜨거운 변화를 이루어내고 경험한 사람들은 이제 유신 이전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취의 경험이 중요합니다. 소나무의 숲을 돌파하고 들어간 나무들이 하늘을 열어내는 성취를 이뤄야 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새로운 숲을 이룰 각자가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각자가 주인으로 만나 이루어내는 세상을 열 때 정의는 더욱 넓고 깊어질 것입니다. 주인이 되어 자기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삶을 부당하게 지배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내 주인 자리를 누군가가 빼앗는 것을 참을 수 없듯, 누군가의 주인된 삶의 자리를 빼앗는 것 역시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에 몸서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 통절한 반성과 자각이 응집되고 터져 나와 마침내 빽빽하고 조밀한 소나무의 하늘 곳곳을 열어내야 하는 지점에 당신과 내가 서있습니다. 당신과 내가 손을 잡고 저 어두운 임상으로 들어설 시간인 것입니다. 당신과 내가 주인임을 선언하며 일어서야 하는 시간 말입니다.

🔮오늘의 행운 메시지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