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지적 허영심
작성자 해류
유익한 지적허영심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지적 허영심
조나단 글래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가 어느새 16만 관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독립, 예술 영화로는 이례적인 성적이며 해당 영화에 쏟아진 대중들의 관심과 찬사는 씨네필들을 비롯한 영화계에서만 한정되어 있지 않고 마치 이 달의 권장 영화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현상을 우스갯소리로 ‘이 달의 지적 허영심’이라고 부르곤 한다.
스노비즘snobism은 고상한 척하는 허영심을 의미하는 용어로 지식에 대해 갖는 허영은 인터넷에서 지적 허영심이라는 말로 곧잘 표현되고는 한다. 정보가 실제로 갖고 있는 의미와 대중성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고 타인에게 과시하고 가르치려드는 태도를 뜻하며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가 스노비즘으로 인해 비판받은 바 있다. 다른 예시를 들자면 지금 내가 글을 읽는 독자와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관람한 관객들에게 가르치듯이 글을 적고 있는 현재도 스노비즘 행위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번 달의 지적 허영심’은 비단 영화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는다. 어떤 달에는 전시, 어떤 달에는 책, 어떤 달에는 공연이 되기도 하며 광고, SNS 및 입소문을 통해 문화, 예술 분야에서 다양한 소비자층을 끌어모은다. 그렇다면 좋은 예술 작품이 대중의 관심을 끄는 건 당연한 현상 아닌가? 물론 당연한 현상이 맞다. 하지만 필자가 이러한 현상을 지적 허영심과 연관 지어 언급하게 된 이유는 이러한 문화 소비가 대부분 겉핥기로만 종결되기 때문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관람한 다수의 관객과 홍보사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관람하고 이렇게 말한다. ‘무섭고 섬뜩하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악의 평범성, 영화의 예술성에 대해 감상을 남긴다. 그러나 과연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단지 예술적인 공포영화일까? 조나단 글래이저 감독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로 96회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하면서 가자 지구에서 벌어진 이스라엘의 폭격과 그 희생자에 대해 언급하며, ‘모두가 비인간화의 희생자’라는 소감문을 남겼다. 이러한 감독의 소감문을 알게 된 뒤에 어떠한 감상이 들었는가?
흔히 문화와 예술 향유에 대해 우리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곤 한다. 그런데 지적 허영심에 좇아 이루어지는, 단편적인 소비에만 그치고 마는 관람을 마음의 양식을 제대로 섭취했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하지만 지적 허영심을 원동력으로 하는 문화 소비는 분명한 장점 또한 존재한다. 단기적으로는 문화 예술 산업에 다수의 소비층을 끌어들일 수 있다. 소비자는 평소 경험하지 않았던 문화를 접하면서 새로운 경험과 관점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장기적으로는 문화 예술 산업이 확장하고 발전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특히,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같은 독립 예술 영화의 흥행은 문화 예술 산업 전반에서 관객들이 앞으로 소비할 수 있을 작품의 질을 올려주는 데에 큰 기여가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달의 지적 허영심’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허영심과 호기심, 흥미를 먹고 성장해야 하는 문화 예술 산업에서 지적 허영심 소비는 산업을 먹여 살리는 힘이나 다름이 없다. 필요한 것은 경각심이다. 나는 나의 소비를 얼마나 꼭꼭 씹어 삼키고 있을지 한 번 더 곱씹어 보고 소비하는 태도를. 혹은, 내가 한 소비에서 한 걸음 더 고민하고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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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지적 허영심이 허영심으로만 끝나지 않도록 뭔가 하나 더 생각하고 알면 좋을 이야기. 같이 생각해보고 싶은 주제에 대해서 작성해볼 예정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