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니가 아니어도 괜찮아: <하극상 야구소년>
작성자 이중생활자
오타니가 아니어도 괜찮아: <하극상 야구소년>
안녕, 나는 이중생활자 이용은이다. 평일 오전 9시부터는 방송국에서 시사 콘텐츠를 만들고 저녁 6시 땡하면 뉴스를 뺀 다른 모든 콘텐츠를 본다. 지난 8월 말, 한국과 일본을 뜨겁게 달군 소식이 있었다. 재일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의 고시엔 우승! 고시엔은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별칭으로 NHK에서 전 경기를 중계할 만큼 인기가 높다. 고시엔구장에 교토국제고의 한국어 교가가 울려 퍼지는 장면은 없던 청춘의 기억도 조작할 만큼 벅찬 감정을 느끼게 했고, 이 기분을 최대한 오래 끌고 싶어서 야구 콘텐츠를 찾아 헤맸다.
일본 TBS 드라마 <하극상 야구소년>. 2023년 방송. 10부작.
(*왓챠에서 시청 가능)
작은 어촌마을에 있는 에츠잔고등학교. 이곳 학생들에 대한 평판은 “답 없는 잔고”다. 야구부원은 딱 1명으로 그야말로 폐부 직전. 이곳에 야구를 열렬히 좋아하는 야마즈미 선생이 새로 부임하고 실력파 투수 쇼우가 입학한다. 과거에 야구를 했던 나구모 선생이 합류하며 “고시엔 출전”을 향해 달려가는 시골 고교 야구부 이야기.
이 드라마는 결말을 미리 알려주고 시작한다. <일본 최고의 하극상을 일으키기 822일 전> 이렇게 매회 디데이가 표시된다. 최종 시점은 2018년 여름 고시엔, 시작 시점은 2016년이다. 드라마 결말을 이미 아는데도 계속해서 보는 이유는 과정이 더 중요한 청춘 스포츠 드라마여서다. 잔고 오합지졸 야구부 아이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을지, 고비마다 어떤 기분을 느끼고, 어떻게 다시 일어설지, 결국 어떤 성취를 해낼지. 1승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3년에 걸쳐 성장하는 모습을 개연성 있게 차근차근 보여준다.
야구부원을 모으는 과정부터 하나의 스토리다. 야구를 너무 하고 싶지만 집안 형편이 어렵고 집도 멀어서 선뜻 입부를 못하는 네무로, 포수로서 천부적 재능을 지녔지만 혼자 야구부를 지킨 형이 바보 같다며 야구하기를 거부하는 소마, 내킬 때만 연습에 나오는 니레. 사실 이들의 결말 역시 알고 있다. [2018년 투수] [2018년 포수] [2018년 4번 타자] 자막으로 이들의 미래가 떠오른다. 하지만 막상 볼 때는 야구부 자체가 성립할 수 있을지 마음 졸이고 슬라이딩하다 코피가 터지거나 3루를 밟지 않고 홈인하는 걸 보며 헛웃음이 나온다. ‘아니, 이 상태로 진짜 가능하다고?’ 드라마에 더욱 몰입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보다 보면 최애 캐릭터가 생기기 마련. 나는 매회 최애 캐릭터를 바꾸다가 나중엔 한 명 꼽기를 포기했다. 야구명문 세이요고교에 불합격한 열등감에 시달리다가 점점 강해지는 쇼우, “제가 잔고를 고시엔에 데려갈 겁니다” 막 입학한 1학년이면서 거만할 정도로 자신 있는 나카세코. 야구부원 한 명 한 명 캐릭터가 다르고 각자 서사가 있다. <하극상 야구소년>은 모든 캐릭터가 성장캐니 빠져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드라마의 또 다른 주요 갈등은 나구모 선생의 비밀이다. 그가 계속 ‘선생’이라고 불려도 되는 것인지, 야구 감독으로서 자격이 있는 것인지. 나는 이 주제가 단순히 교원자격증 유무의 문제가 아니라 선생님의 역할과 진정한 리더십에 대해서 화두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힘든 어린 시절 나구모를 길러준 선생님의 존재, 야구선수 나구모가 실망했던 가몬 감독의 모습과 훗날의 이해, 나구모가 되고 싶었던 선생님의 모습 그리고 야구 감독으로서 역할 등 다양한 어른의 레이어가 나온다. 대개 청춘 스포츠 드라마는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청춘들에만 초점을 맞추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어른들의 성장도 빠짐없이 보여줘서 인상적이었다. 막무가내 지역 유지 이누즈카 할아버지뿐 아니라 잔고 야구부를 서포트하고 응원하면서 온 마을 어른들이 달라진 것이다.
“더 멀리 나아가고 싶어.”
“미래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앞으로 나아가야죠.”
“너희들이 가고 싶은 곳까지 데려갈게.”
“정말 즐거웠어요. 그러니까 끝나는 건 싫어요.”
첫 화를 보자마자 내 솔직한 감상은 “쓸데없이 매 컷이 예술이네”였다. 어찌나 공들여서 찍었는지 모든 화면이 아름답다. 경기 장면에서 슬로우 효과를 적절하게 넣어서 긴장감을 높이는 등 강약 조절을 잘한다. 다만, 경기 외 장면에서도 슬로우 효과가 과용된 건 아쉬웠다. 스포츠 영화나 드라마 특유의 파이팅 넘치는 주제곡이 너무 자주 나오지 않은 것도 좋았다. 음악으로 고조시키지 않아도, 드라마 속 인물들의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흔히 야구를 인생에 비유하곤 한다. 아직 공감보다는 식상함이 앞선다. 청춘은 미화되기 쉽고 자신의 청년 시절에 비춰서 청춘 스포츠 콘텐츠를 감상하는 것도 별로다. 청춘을 회상하기에 나는 아직 너무 젊고, 내 학창시절에 저런 야구 드라마 같은 일은 없었다. (평범한 사람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다만, “이기고 싶어” “분해” “더 잘하고 싶어” “승리하고 싶어” 돌려 말하는 법 없이 자기감정에 솔직한 스포츠 드라마 속 청춘을 보는 건 다른 얘기다. 유불리를 따질 생각도 못하고 꼼수도 부리지 않고 순수하게 무언가에 몰입하는 이들을 보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그게 가능한 건 그때뿐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청춘 스포츠물은 건강하고 담백하다.
염원하던 고시엔 출전을 이뤄낸 잔고 야구부. 고시엔구장에 입성해서도 파죽지세로 승리의 행진을 이어갔을까? 그 결과는 드라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몇 년 뒤 다시 떠들썩하게 모인 이들의 면면을 보면 야구를 계속하는 사람은 사회인 야구부에서 활동하는 네무로뿐이다. 야구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던 쇼우는 자신에게 더 맞는 일을 찾는다. 야구부 코치로, 앞으로는 선생으로. 고시엔 출전을 이끌었던 주장 츠바키야는 시청 문화스포츠진흥과에서 일한다. 나구모 감독은 초등학생 야구교실로 정신없다. 이게 이 드라마의 진짜 결말이다. 오타니 같은 스타 야구선수가 되지 않아도, 야구에 인생을 걸지 않아도, 단 한 번의 잊을 수 없는 여름 고시엔의 기억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 결말마저 참 마음에 들었다. 실제로 일본 고교 야구선수들은 평생 한 번 밟을까 말까 한 고시엔구장의 흙을 고향으로 가져가서 추억하는 것이 전통이라고 한다. 2018년 특별한 여름을 보낸 잔고 야구부원들도 아마 그랬겠지. 드라마를 보는 동안 나도 분명히 그들과 함께 그해 여름에 있었다.
8월은 갔고 올해 고시엔도 끝이 났다. 이제는 진짜로 여름과 청춘을 뜨겁게 달궜던 벅찬 기분을 보내줄 때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