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한 공포영화는 없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작성자 이중생활자
이보다 더한 공포영화는 없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안녕, 나는 이중생활자 이용은이다. 평일 오전 9시부터는 방송국에서 시사 콘텐츠를 만들고 저녁 6시 땡하면 뉴스를 뺀 다른 모든 콘텐츠를 본다. 얼마 전 동료에게 콘텐츠 추천을 받았다. 같은 일을 하는 동료여도 콘텐츠 취향은 워낙 달라서, “아 그래?”하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마침 영화관에서 특별 상영 중인 걸 발견했다. 이쯤 되면 보라는 계시. 팔짱을 끼고 보기 시작했다가 나중엔 깔깔거리느라 정신을 못 차렸다. 너무 웃어서인지, 나도 겪은 일이 생각나서인지 모를 한줄기 눈물과 함께. 2017년 개봉. 일본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カメラを止めるな!>
대학교 때 다큐멘터리를 찍은 적 있다.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바탕으로 구보 씨가 하루 동안 걷는 1930년대 경성 거리를, 2010년대 서울에서 다시 걷는 로드 다큐였다. 나름 첫 장편 다큐. 문제는 다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덤벼들었다는 점이다. ‘다큐멘터리=리얼’이라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 한번 카메라를 켜면 그날 일정이 끝날 때까지 카메라를 끄지 않았다. 모든 시간, 우리가 가는 모든 장소를 찍었다. 촬영 중단은 곧 인위적인 개입이자 편집이므로 다큐의 리얼함이 훼손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행히 그때의 무식한(?) 경험을 곧이곧대로 얘기하지 않아서 방송국에 무사히 입사할 수 있었다. 현업에 있는 지금, 다큐를 비롯한 모든 콘텐츠는 어디서, 누구를, 왜, 찍을 것인지 연출자의 계획과 명확한 그림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안다. 계획한 대로 골라찍는다고 리얼하지 않은 게 아니고, 무엇보다 다큐의 핵심이 리얼함이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카메라를 멈추지 않아서 갖게 된 수백 시간 분량의 촬영본을 일일이 보고 편집하느라 몇 날 며칠 밤을 새웠던 PD 지망생 시절이었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제목처럼 카메라 한 대로 촬영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끊김 없이 진행되는 영화다. 내용은 좀비 영화.

좀비 드라마 촬영 현장을 카메라 한 대가 따라가며 보여준다. 이런 형식을 전문용어로 원샷 원테이크 핸드헬드(카메라를 삼각대에 장착하지 않고 손으로 들고 찍는 것) 기법이라고 한다. 촬영 방식은 특이하다고 해줄 수 있으나 이때만 해도 팔짱을 끼고 보면서 잔뜩 혹평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풀샷과 클로즈업 등 카메라 앵글과 편집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인데 왜 원테이크 핸드헬드로만 가는지, 배우가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면 어쩌자는 것인지(보통 시청자나 관객이 카메라를 통해 배우를 보더라도 촬영할 때 배우는 카메라가 없다고 생각하고 연기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화면을 보여주려고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과 그의 시선을 대체 누구라고 이해해야 할지. 이런 종류의 영화는 실험적인 형식을 해봤다는 점에서 찍는 사람만 재밌을 뿐이고, 학생 영화의 패착을 고스란히 따라가고 있다며 비속어를 내뱉기 직전이었다. 그렇게 황당하게 영화가 끝나나 싶었는데,
드디어 컷이 바뀌고 정상적인 편집이 이뤄진 화면으로 전환되자 진짜 영화가 시작된다. 황당한 좀비 드라마를 찍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나온다. 게다가 생방송으로! 앞서 나온 좀비 드라마가 한 번 더 반복되는데, 이번엔 한 대의 카메라 뒤까지 보이는 메이킹 필름 형식이다. 원샷-원테이크-핸드헬드-생방송-좀비 드라마.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기획을 무조건 해내야 하는 상황. 이 영화는 카메라를 멈추지 않고 분투하며 결국 만들어내는 사람들 이야기다.
덧) 좀비 드라마 최초 기획자는 난리 블루스 생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TV 대신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데...이 또한 블랙코미디?
영상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이 영화에서 비슷하게 재밌는 지점이 있었다. 캐스팅은 끝났고, 완성된 시나리오가 준비돼있고, 동선 등을 미리 맞춰봤어도 언제나 변수는 있는 법. 심지어 원샷 원테이크 생방송이니 돌발 상황이 발생해도 중간에 끊을 수 없다. 그때그때 상황에 대처하면서 드라마는 계속된다. 제작진은 진땀을 빼지만 시청자는 크게 이상한 걸 못 느끼고 좀비 드라마는 무사히 끝이 난다. 실은 모든 콘텐츠가 이렇게 만들어진다. 완벽하게 기획을 해도 순조롭게 촬영 허가가 나는 일은 거의 없다. 딱 맞는 사람을 기대하며 촬영했는데 막상 한 컷도 못쓰거나, 거절당하고 당하다가 2순위로 생각한 사람을 섭외했더니 결과물이 더 좋아지는 경우. 운 좋게 좋은 촬영 기회를 얻기도 한다. 이렇게 우연이 겹치고 겹쳐서 한 편의 콘텐츠가 만들어지고 변수 역시 콘텐츠의 미학이 된다.
영화 속에서 흥미로운 논쟁도 있었다. 작품 vs 방송의 대립. 방송 시작도 전에 돌발 상황이 발생하자 주연을 맡은 남자 배우가 방송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드라마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남을 ‘작품’이므로. 감독은 그럴 순 없다며 시간 맞춰 ‘방송’을 내보내야 한다고 설득한다. 완성도에 방점을 두는 표현이 ‘작품’이라면, 성에 차지 않더라도 시청자와 약속을 지켜 제 시간에 방영하는 게 ‘방송’이다. 어느 게 더 중요하다고 함부로 말할 순 없다. 다만, 나는 작품과 방송이 배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해진 방송시간과 분량이라는 제약 속에서 때로는 타협하고 겹치는 우연을 동력 삼아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다른 모양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 그 모양이 더 예쁠지 아닐지는 완성해 봐야 알 수 있다. 애초에 싼값에 빠르고 적당한 퀄리티의 콘텐츠를 만들 줄 알아서 좀비 드라마 연출을 맡게 된 감독은 만드는 동안 많은 걸 포기하고 바꾸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이건 내 작품이기도 해.” 그리고 끝내 자신이 원하는 엔딩 장면만큼은 내보낸다.
‘원샷 원테이크 핸드헬드 생방송 좀비 드라마’ 감독 입장에서 이보다 더한 공포영화는 없다. 그리 대단치 않은 이 좀비 드라마-영화 만드는 사람들 모습이 마지막에 한 번 더 반복된다. (또?) 그들을 보면서 콘텐츠 취향이 다른 동료가 내게 이 영화를 추천한 이유를 알았다. 오랜만에 PD 지망생 시절을 떠올리며, 내가 계속해서 이 일을 잘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감독이나 방송일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끼리 공유하는 반짝임과 마침내 해냈을 때의 희열을 느낄 수 있다. 기꺼이 이 공포영화의 러닝타임이 끝나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감독이란 직업은 어떻습니까. 감독이 절대로 못 해서는 안 되는 게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봉준호)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감독은 결국 그것 하나로 버티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이미지를 완성해서 스크린에 투사하기까지의 과정이 사실 너무 힘들고 가시밭길이잖습니까. 캐스팅, 장소 섭외, 촬영 등 모든 것이 다 그렇죠. 그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결국 내가 찍고 싶은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에요. ‘이거 하나는 반드시 찍어야 돼’라는 생각 하나로 버티는 거죠.
-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그 영화의 비밀>
덧) 이후에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스핀오프: 할리우드 대작전>(2019)이 만들어진 바 있다.
덧) 리메이크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프랑스에서도>(2022)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