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베이비 레인디어>
작성자 이중생활자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베이비 레인디어>
안녕, 나는 이중생활자 이용은이다. 평일 오전 9시부터는 방송국에서 시사 콘텐츠를 만들고 저녁 6시 땡하면 뉴스를 뺀 다른 모든 콘텐츠를 본다. 사람들을 만나면 늘 공식 질문을 한다. “요즘 뭐 보고 있어?” “최근에 가장 재밌게 본 게 뭐야?” “왜 재밌었어?” 그렇게 지난 금요일 밤 술자리에서 넷플릭스 시리즈 <베이비 레인디어>를 수확했다. 2024년 4월 11일 공개. 7부작. 영국 드라마.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의 모습은 무심한 태도다. 말 걸고 싶은 사람 앞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는 사람을 보고, 무심한 척을 한다. 그래놓고는 마음속으로 연연하며 내 자신이 싫다고 생각한다. 원하는 것 앞에서 무심하길 그만두고 다이브 하지 않으면 계속 불만족스럽게 살 텐데, 나는 이 무심의 벽을 깰 수 있을까.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내 모습을 평생 어르고 달래며 나아갈 수 있을까. 이렇게 된 거, 나를 망치고 있는 내 모습에 이름이라도 붙여줘야겠다. 마치 친구처럼.
드라마 <베이비 레인디어>도 이것에 관한 이야기다.
어느 날 도니가 일하는 펍에 마사가 온다. 뚱뚱하고 웃음소리가 시끄럽고 자신이 사회 유력인사와 친하다고 허풍을 떠는 마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눈에 불쌍한 여자임을 알아본 도니는 그녀에게 무료로 차 한 잔을 내어준다. 그리고 시작된다. 도니에 대한 마사의 스토킹이. 하루에도 수십 통씩 메일을 보내는 마사. 그녀는 도니를 이렇게 부른다. “아기 순록(baby reindeer)”.
마사의 스토킹으로 도니의 삶은 무너져간다. 펍에서 아르바이트 생활, 코미디언 지망생으로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 서는 일, 데이트를 시작한 상대와 애정관계가 망가지고 고향에 있는 부모님 안부도 위협받는다. 하지만 도니가 경찰서에 간 건 스토킹이 시작된 지 6개월도 지난 시점, 경찰이 묻는다. “왜 여태 신고 안 하셨어요?” 도니는 신고해 놓고 막상 중요한 이야기는 안 하기도 한다. 마사의 집착이 심해지고 도니가 괴로워하면서 도니의 어두운 과거도 함께 떠오른다. 과거에 있었던 일로 도니는 자기혐오에 빠져있던 상태, 그런 자신을 맹목적이고 멋지게 봐주는 사람이 마사였던 것이다. 마사에게 벗어날 듯 벗어나지 못하던 도니가 마사를 이해하게 된 순간, 마사가 음성 메시지를 통해 말한다. 왜 도니를 “베이비 레인디어”라고 불렀는지.
스토커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이 드라마는 인간의 내면을 깊숙하게 파고든다. 누구나 갖고 있는 어두운 면,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결핍과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의 모습 등. 도니는 마사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통해서 지금까지 회피하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다. 마사는 도니가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거라고 여기고 집착한다. 그렇다고 둘이 서로의 구원자가 될 수는 없다. 각자의 심연을 마주하기 위한 도구일 뿐. 그리고 내내 불편한 기분으로 두 사람을 보던 관객 또는 시청자 역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가볍게 보기 시작했는데 당황스러울 정도로 어둡고 무거운 드라마였다. <베이비 레인디어>는 도니 역을 맡은 리처드 개드가 자신의 실제 경험담을 바탕으로 각본을 쓰고 연출과 제작도 했다. 원작은 연극이고 이번에 넷플릭스 시리즈로 각색했다. 쉽지 않은 주제뿐 아니라 여자 스토커, 트랜스 여성, 남성 성폭력 피해자 등 이야기를 이루는 여러 소재 역시 가볍지 않아서, ‘영국은 이런 소재와 주제로도 드라마를 만드는구나.’하고 적잖이 놀랐다. 그렇다고 중간에 보는 걸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몰아치듯 봤다. 어떤 콘텐츠는 보는 이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고 비일상적인 감정을 끄집어낸다.
영국이 존경하고 전 세계에 잘 알려진 정치가 윈스턴 처칠.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총리로 리더십을 발휘했고 노벨문학상도 탄 위대한 인물이지만 평생 알코올중독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는 자신의 우울증을 ‘검은 개(black dog)’라고 불렀다. 이 드라마를 보며 처칠의 검은 개가 떠올랐다.
나의 가장 어두운 면, 그럼에도 평생 함께해야 할 그것, 나의 검은 개 또는 베이비 레인디어는 무엇인가. 일단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그다음을 알 수 있는 법이다. 망가질지 스스로를 구원할지.
덧) 마사가 도니를 스토킹하면서 끊임없이 보내는 메일이 텍스트 메시지로 표현되는데, 마사 캐릭터를 보여주려고 부러 영어 스펠링을 틀리고 한국어 번역 역시 오타가 난무하는 연출 방식이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