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휴가엔 나른하게 사랑 소설을, <광인> & <다 하지 못한 말>
작성자 이중생활자
이번 여름휴가엔 나른하게 사랑 소설을, <광인> & <다 하지 못한 말>
안녕, 나는 이중생활자 이용은이다. 평일 오전 9시부터는 방송국에서 시사 콘텐츠를 만들고 저녁 6시 땡하면 뉴스를 뺀 다른 모든 콘텐츠를 본다. 지난주엔 짧은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특별한 걸 하지는 않았고 나른한 기분으로 늘어져서 사랑 소설이나 읽었다.
실은, 올봄부터 벼르던 여름휴가 계획이었다. 평소에도 책을 읽을 수는 있지만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소중한 주말에 의무감을 갖고 뭐라도 읽는 것과는 다른 방식의 독서 휴식(?)이 필요하기도 하니까. 왜 대통령도 매년 여름휴가지에서 읽는 독서 목록을 공개하고 그러지 않는가. 올해 여름, 내 휴가 로망은 늦잠 자고 일어나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책 좀 보다가 간단하게 점심 먹고 다시 책 읽고 스르르 낮잠에 들었다가 읽던 책 덮어두고 저녁엔 동네 산책을 하는 거였다. 그리고 그 책은 반드시 정통 사랑 소설이어야 했다.
<광인>
저자 이혁진/ 2023.11.24.발행/ 680페이지
40대 남녀의 삼각관계. 사회적으로 성공한 싱글남성 해원은 또래지만 자신과 다른 이상을 갖고 살아가는 플루트 교습소 선생님 준연과 우정을 나눈다. 준연의 어릴 때 친구이자 위스키 양조장을 운영하는 하진을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사랑이라는 감정과 돈이라는 권력이 세 사람 사이에 끼어들면서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
장장 680페이지. 여름휴가 3박 4일 중 이 책을 읽는데 3박을 할애했을 정도로 두꺼운 책이었다. 그래서 더욱 여름휴가 때 끼고 읽기에 적합한 책이었다. 소설가 이혁진은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2022) 덕분에 알게 됐다. 원작 소설 <사랑의 이해>(2019)를 썼는데 책은 아직 못 읽었고 드라마를 재밌게 봤다. 이혁진 작가가 또다시 내놓은 미친 사랑 소설이라고 하니, 읽을 수밖에.
소설 <광인>에서도 이혁진 작가의 특기가 발휘된다. 세속적 조건이 관계에 영향을 미쳐서 형성되는 권력관계와 이에 따른 미묘한 심리 변화. 드라마 <사랑의 이해>에서는 은행을 배경으로 결혼 적령기 남녀관계와 갈등을 그렸다. <광인>에서는 등장인물 연령대가 40대로 높아졌고 남녀관계뿐 아니라 남자들 사이 우정과 경쟁도 중요 갈등 라인이다. 40대, 젊을 때 선택에 따라 사회적 격차가 확연하게 나는 시기. 그래서 모든 판단 기준에 세속적 조건이 끼어들고 감정만으로 사랑이 안 되는 나이. 소설 초반부에 해원이 플루트 선생님 준연에게 사심 없는 우정을 느끼는 부분이나 자신과는 너무 다른 하진에게 오랜만에 순수한 열정으로 사랑을 느끼는 부분 묘사가 좋았다. 동시에 사심 없는 우정임을 증명(?)하려고 준연에게 되레 철저히 예의를 지키는 부분과, 하진에게 고백 성공 시/실패 시 준연과의 관계는 어찌할 것인지 끊임없이 가늠하는 부분은 리얼해서 좋았다. 생각은 해도 우리가 입 밖에 내지 않는 속마음을 정확한 어휘로 묘사한 소설. 그걸 알면서 읽으니 증폭되는 쾌감.
<광인>에는 준연의 플루트, 하진의 기타 연주 등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예술적 이상(理想)과 그런 음악을 제대로 감상한다는 게 어떤 건지에 대한 고민이 나온다. 또 물질적 여유가 있으면 더욱 풍부하게 즐길 수 있는 위스키에 대한 매혹적이고 디테일한 묘사가 많이 나와서 간접경험을 극대화한다. 다만, 세 사람의 갈등과 관계 변화가 더 이상 내면의 소용돌이가 아닌 밖으로 표출되고 범죄가 발생하는 중반 이후부터 마지막까지 장르 변화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소설이 급격하게 내달리는 부분은 호불호가 있을 수 있겠다.
이혁진 작가의 다음 사랑 소설을 기다린다.
<다 하지 못한 말>
저자 임경선/ 2024.3.20.발행/ 216페이지
광화문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싱글 여성 ‘나’, 우연히 마주친 남자에게 반한다. 기적 같은 우연이 겹쳐서 연하의 피아니스트와 드라마 같은 연애를 시작하지만 그에게 곧 그 말을 듣고 만다. “당분간 떨어져 있자.” 이 말은 말 그대로 ‘시간을 갖자’는 말인가, ‘헤어지자’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인가. 이별을 받아들이면서 너에게 마지막까지 하고 싶었던 말을 이렇게 남긴다.
현실을 회피하고픈 휴가 마지막 날 저녁, 두세 시간 만에 후루룩 읽었다. 이번 소설 화자는 여자라서 <광인>하고 여러모로 밸런스도 맞았다. 역시 연애와 결혼 등 남녀관계를 다룬 텍스트에서 자기만의 문체와 장점을 갖고 있는 작가 임경선. 그녀의 소설 <나의 남자>와 산문 <평범한 결혼생활>을 좋아한다.
이 연애소설을 다 읽은 감상은, 평범하다-였다. 이미 소설 초반부에 등장하는 핵심적인 대사 “당분간 떨어져 있자.” 평범한 여자 주인공이 곱씹고 해체하고 매달리는 말. 실은 현실에서도 흔한 이별의 말. 그런데 보편적인 연애 이야기라서 더 공감하며 읽을 수 있다. 흔해빠진 연애 스토리어도 내가 하면 절절한 연애소설이 되듯이. 작가는 첫 페이지와 작가의 말에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이 글을 쓰게 만든다’고 했다. 그래서 이 소설의 형식은 여자 주인공이 연애했던 남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일기 또는 편지처럼 쓰는 글이다. 이별 후에 헤어진 연인 보라고 그에게만 ‘공개’로 해놓고 SNS에 올리는 찌질글(?)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누구나 한번쯤 이런 연애 경험이 있다.
임경선 작가는 인물 묘사를 섬세하게 한다. 옷차림, 취향, 분위기, 처음 만난 공간 등.
“연회색 면바지와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하얀 피부에 앞머리가 조금 길다 싶은 당신은 벤치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어. … 그때 목소리를 처음 들었어. 살짝 쇳소리가 나는 차분한 저음이었어.”
이 소설 속에서 나쁜 남자 역할(?)을 맡은 남자 주인공마저도 여자 주인공이 그를 처음 본 순간을 이렇게 묘사해 버리면, 독자 역시 같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신은 자기애적이고, 유약하고, 무신경하고, 이기적인 남자야.”
임경선 작가의 다음 연애 또는 사랑 소설을 기다린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 때는 ‘셰익스피어 휴가’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 공직자들에게 한 달씩 유급휴가를 주면서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고 독후감을 내게 하는 것.
내 여름휴가는 끝나버렸고 아직 못 읽은 사랑 소설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