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세상은 만화가 될걸: <동경일일>과 <룩 백>

언젠가 세상은 만화가 될걸: <동경일일>과 <룩 백>

작성자 이중생활자

언젠가 세상은 만화가 될걸: <동경일일>과 <룩 백>

이중생활자
이중생활자
@user_hpvfnqggea
읽음 650
이 뉴니커를 응원하고 싶다면?
앱에서 응원 카드 보내기

안녕, 나는 이중생활자 이용은이다. 평일 오전 9시부터는 방송국에서 시사 콘텐츠를 만들고 저녁 6시 땡하면 뉴스를 뺀 다른 모든 콘텐츠를 본다. 이번 주말에는 빗소리를 들으며 만화책을 쌓아두고 읽었다. 주로 섭취하는 콘텐츠 메뉴가 영화와 책인지라 만화계는 아직 못 먹어본 콘텐츠가 훨씬 많다. 잘 모를 땐 베스트 메뉴를 고르면 실패할 확률이 줄어드는 법, 최근 SNS에서 자주 눈에 띄는 만화 단행본 2종을 냅다 구입부터 했다. 공교롭게도 두 만화 모두 [만화에 관한 만화]였다.

<동경일일 東京日日>

1~3권 완결. 1권 2023년 11월-3권 2024년 6월 초판 발행. 마츠모토 타이요 작품.

30년 일한 출판사를 떠나 자신만의 만화잡지를 출판하려고 만화가들을 한 명씩 만나서 원고 청탁을 하는 중년의 만화 편집자 이야기.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지만 <동경일일>을 보게 하는 계기나 <동경일일>을 읽는 동안 내용 이해를 돕는 가이드로는 부족하다. 대신 ‘동경(東京; 도쿄)에서 만화가들의 하루하루(日日)’를 뜻하는 서정적인 제목과 마치 시집 같은 표지 그림이 이 만화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만화는 거센 비바람에 우산이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일본 도쿄의 여름, 장마철이 주된 배경이다. 이 만화의 가장 큰 매력은 시·공간 배경 묘사에 있다. 8화씩 3권, 총 24화로 구성돼 있는데 각 화의 시작은 에피소드의 배경이 되는 건물 등을 풀샷으로 보여주고 마지막은 도쿄 거리를 부감으로 바라보는 장면으로 맺는다. 말풍선이나 묘사 등 텍스트는 하나도 없이 풍경화처럼 그린 도시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하나의 에피소드를 쭉 따라온 후 짙은 여운이 남는다. 도쿄 신주쿠 밤거리를 찍은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의 오프닝 시퀀스가 떠오른다고 할까. 또한 각 화 안에서도 큰 공간에 인물이 작게 서있는 장면, 공간 속 인물의 뒷모습, 공간만 묘사된 장면에 겹쳐지는 대화 텍스트 등으로 인물들의 정서를 전달한다. 만화적 특징보다는 영상화 직전 콘티에 가까운 연출이 더 돋보인다고 느꼈다.

덧) 우산이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첫 장면은 이후에도 여러 번 나오는데 비교해서 보는 재미가 있다.

언뜻 보면 주인공은 중년의 만화 편집자 시오자와다. 그런데 시오자와가 종종 만나는 중년의 만화가 초사쿠가 더 많이 등장하는 것 같기도 하고. 드디어 전성기를 맞았는데 그전보다 더 방황하는 젊은 만화가 아오키 비중도 상당하다. 그러니까, 이 만화에는 주인공이 없다. 내가 어떤 캐릭터에 감정이입하고 어떤 말이 내게 제일 와닿는지가 중요할 뿐. 나는 3권에 나오는 만화가 츠치노코의 말이 가장 인상 깊었다. 젊은 만화가 아오키의 기세에 의기소침해진 중년 만화가 초사쿠에게 하는 말. “팔리는 작가는 그런 생각을 하는군요. 저는 누가 봐도 사회부적응자라서. 좋아하는 만화를 하루종일 그릴 수 있고, 그걸 좋아해 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그것만으로도 제겐 기적이에요. 고마운 마음뿐이라 그 외의 것들은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는 것 같아요…”

어떤 걸 좋아하게 되면, 잘하고 싶고 남과 비교하게 되고 이는 곧 고통이 된다. 그저 좋아했던 마음은 어느새 희미해진다. 잠깐 등장했지만 ‘그 외의 것들’은 생각하지 않고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나아가는 츠치노코의 태도를 본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동경일일>에는 지금 만화를 그리고 있거나 한때 만화를 그렸던 사람들이 나온다. 현업에 있으면서도 고통스러워하고 만화계를 떠났으면서도 그리워한다. 어쨌든, 만화만이 내 세상인 사람들. 무엇보다 1987년에 데뷔해서 38년 차 만화가인 마츠모토 타이요가 여전히 [만화에 관한 만화]를 내놓는 걸 보며, 내게 만화 같은 대상은 무엇인지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룩 백 Look Back>

1권 완결. 2022년 3월 초판 발행. <체인소 맨> 후지모토 타츠키 작품.

시골에 사는 두 소녀가 있다. 한 명은 만화 그리기에 자신이 있고 다른 한 명은 등교거부 학생으로 집에서 만화만 그린다. 두 소녀가 만화로 이어져 친구로 지내는 이야기.

역시 내용을 단번에 짐작할 수 없는 제목과 표지를 꽉 채운 후드티 소녀 뒷모습이 호기심을 자극해 이 만화를 집어 들게 됐다. (진지하게, 요즘 만화 같지 않은 만화가 트렌드인 걸까.)

제목인 ‘룩 백(Look Back)’은 이 만화의 핵심 이미지이자 상징적인 주제다. 책상에 앉아 만화를 그리는 후지노의 뒷모습, 후지노와 쿄모토의 뒷모습, 다시 혼자가 된 후지노의 뒷모습 등 두 소녀의 관계 변화와 계절의 변화를 오로지 연속적인 뒷모습 컷으로 표현한다. 영화 <노팅힐>에서 휴 그랜트가 노팅힐 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걷는 동안 계절이 여러 번 바뀌던 신처럼, 이 만화에서는 대사 없는 뒷모습 하나의 컷으로 시간 변화와 인물의 정서를 보여주며 만화적 미학을 한 차원 끌어올린다.

뒷모습을 언급하는 후지노의 직접적인 대사가 있다. 언제나 자신의 뒤에서 만화 그리기 어시스턴트를 하던 쿄모토에게, “어~ 너도 내 뒷모습을 보면서 성장하도록 해~”. 그런데 후지노 관점에서도 만화를 읽은 독자는 안다. 실은 후지노가 쿄모토에게 영향받아서 계속 만화를 그렸다는 것을. 그러니까, 후지노도 쿄모토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룩 백’은 두 소녀의 성장 키워드다.

만화 첫 컷, 칠판을 유심히 보면 [Don’t]라고 쓰여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만화 마지막 컷, 바닥에 널려있는 책에는 [In Anger]라고 적혀있다. 이 만화의 제목 [Look Back]과 연결해서 읽으면 [Don’t Look Back In Anger(지난 일에 분노하지 말라)]가 된다. 둘 중 한 사람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일을 뒤로하고 남은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메시지가 읽힌다.

<동경일일>이 기성 만화가들의 만화에 대한 열정과 고민을 다뤘다면, <룩 백>은 만화를 매개로 한 사춘기 소녀들의 우정-질투-성장-이별-추억 등의 감정을 묘사한다. 학창시절 “사실 만화 그리는 걸 전혀 좋아하지 않는데” 친구와 함께하는 시간이 좋아서 나도 같이 좋아했던, 그런 기억들 말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오는 9월 국내 개봉 예정.

[에필로그]

창작자가 자신이 속한 업계를 소재로 콘텐츠를 내놓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영화감독이 영화에 관한 영화를 찍거나, 방송국에서 방송국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내놓거나, 이렇게 만화가가 만화에 대한 만화를 그리는 거. 자신이 속해있으니 할 말은 많지만 막상 콘텐츠로 내놓으려면 자기 연민을 피하기 어렵다. 그래서 소재가 떨어진 창작자들의 마지막 선택(?)이라고 할 만큼 금기시 돼왔다. 그럼에도 이렇게 <동경일일> <룩 백> 같이 만화가들이 그린, 만화에 대한 좋은 만화가 나오곤 한다.

또, 잘 만든 업계 콘텐츠(?)로

  • 드라마에 관한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2008)

  • 영화에 관한 영화 <힘내세요, 병헌씨>(2013)

  • 언론에 관한 드라마 <아르곤>(2017)

  • 드라마에 관한 드라마 <멜로가 체질>(2019)

  • 영화에 관한 영화 <거미집>(2023)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