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 연하는 만나는 게 아니야”: 드라마 <졸업.>

“이래서 연하는 만나는 게 아니야”: 드라마 <졸업.>

작성자 이중생활자

“이래서 연하는 만나는 게 아니야”: 드라마 <졸업.>

이중생활자
이중생활자
@user_hpvfnqggea
읽음 2,024
이 뉴니커를 응원하고 싶다면?
앱에서 응원 카드 보내기

안녕, 나는 이중생활자 이용은이다. 평일 오전 9시부터는 방송국에서 시사 콘텐츠를 만들고 저녁 6시 땡하면 뉴스를 뺀 다른 모든 콘텐츠를 본다. 이번 주말에는 드라마 <졸업>을 드디어 다 봤다. 종영은 6월 30일이었는데 최종화를 보기까지 2주나 뜸을 들인 이유는 마음의 각오가 필요해서다. 그만큼 매회 밀도가 높은 드라마였다. 이로써 <졸업>은 [2024년 상반기 콘텐츠 결산(BY.나)]에서 드라마 부문 2위를 차지했다.

tvN에서 5월 11일부터 6월 30일까지 16부작으로 방송했다. <밀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의 안판석 감독 신작으로 제작 소식이 들리자마자 손꼽아 기다렸던 작품이다. 정려원(서혜진 역)·위하준(이준호 역) 주연, 서울 대치동 학원가를 중심으로 학원 강사들 세계와 두 사람의 로맨스를 그렸다. 이 드라마를 보고 안판석 작품론, 한국 사회에서 공교육과 사교육의 가치, 전반부 연극적 연출과 후반부 정치 드라마적 연출 등에 관해 말할 수도 있겠으나 내가 드라마를 보는 중간중간 직관적으로 털어놓은 감상은 ‘연하남과의 연애, 할 것인가?’였다. 이준호의 세 가지 핵심 대사를 뽑았다. 이 점 참고해서 감상기 읽어주시길. (*스포가 있을 수도 있지만 중요하지 않음)

“말로 하는 사례 같은 거 안 해요.

금은보화, 찬란한 명성, 무덤까지 가지고 갈 승리의 기억…

그런 거 제가 드릴게요.”

드라마 초반부, 3화에서 준호가 혜진에게 하는 대사다. 사교육계에서 크게 성공해 보겠다고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이제 막 대치동 학원가에 발을 들인 준호, 이미 스타강사인 혜진에 힘입어 학원 홍보 현수막에 같이 얼굴을 싣고 공동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야, 고맙다는 말이 먼저 나와야 되는 거 아니냐?”라는 혜진의 말에 대한 준호의 답이 위의 대사. 드라마에서 두 사람의 로맨스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너무나 로맨틱한 대사가 벌써 나와버렸다. 젊고 자신감 충만한 준호 캐릭터를 잘 보여주기도 하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본인 능력으로 스타강사가 된 혜진의 마음을 정확히 저격한 사랑의 언어기 때문. 성취욕이 강한 연상의 여성 캐릭터에게는 이런 대사가 귓가에 종소리를 울리게 하는 고백이다. 별도 따다 준다든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준다든지, 이런 사랑고백의 시대는 갔다.

위 대사는 귀가하는 차에서 이뤄지는데 각자의 집으로 간 후에도 시답지 않은 얘기를 문자로 주고받느라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두 사람 모습이 길게 이어진다. 본격적으로 로맨스를 시작하는 두 사람 모습을 안판석 감독은 이런 장면으로 연출한 것.

“백년해로”

드라마 후반부, 12화에서 준호가 혜진에게 하는 대사다. 준호는 일찌감치 혜진에게 고백했고 두 사람은 연인이 됐다. 그러니까 보통의 로맨스 드라마처럼 사귀네 마네가 핵심 갈등이 아니란 얘기. 사교육 강사로서 두 사람 가치관이 충돌한다. 대학 입시에 최적화된 수업을 제공해 스타강사가 된 혜진과 근본적으로 읽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준호. 지금까지 쌓아온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공격으로 느끼며 “너 이렇게 날 자극하고 모욕해서 얻는 게 뭐야?”라고 화내는 혜진의 말에 대한 준호의 답: “백년해로.” 그리고 이어지는 실소.

준호 딴에는 국어 강사인 혜진의 커리어를 고민하며 앞으로 미래를 함께하고 싶다는 또 한 번의 사랑고백이었겠지만, 혜진에게 감정이입하는 시청자 1인으로 나는 분노했다. 강남에서 나고 자라 대학이든 취업이든 원하는 건 모두 이뤘고 외모·인성·친구관계까지 빠지는 거 하나 없는 젊은 남자의 자신감. 사교육계에 들어와서 아직 보여준 거 하나 없으면서 의견만 강한 주제넘음. 로맨스 초반에 직진하는 연하남 캐릭터는 매력적이지만 곧 나이브함이 되어 양날의 검으로 돌아온다. 이래서 연하는 만나는 게 아니야. 나는 12화까지 보고, 혜진과 준호는 결국 헤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백년해로. 표현의 생경함과 맥락의 의외성 측면에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날 추앙해요.”만큼 센세이셔널한 대사인 것은 인정, 긍정적 의미로.

“달라는 거 다 줄게요.

근데 뭐가 됐건 내 뒷바라지 받으면서 해요.”

마지막 16화, 준호가 혜진에게 말한다. 폭풍은 지나갔다. 자극적인 사제 스캔들도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던 학원 경영 위기도. 그러나 혜진은 학원을 떠나기로 한다. 대학 학비를 벌려고 처음 학원가에 발을 들였는데 까맣게 잊고 지금까지 미뤄둔 자신의 공부를 다시 하려고.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어. 끝날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근데 내가 그때 뭔가 이뤄내면, 그땐 니가 나한테 줘. 빛나는 졸업장.” 혜진의 대사에 대한 준호의 답. 최종적인 사랑고백.

이 드라마는 준호의 성장 서사다. 사랑하는 방식의 성장. 드라마 내내 ‘연하남과의 연애, 할 것인가?’ 저울질하며(대체 왜?) 보던 나도 준호를 보며 배웠다. 사그라들지 않는 사랑의 기세와 사랑하기에 성찰하고 변할 줄 아는 용기. 강남에 빌딩을 세우겠다고 처음 학원가에 발을 들였는데 이제는 서혜진 뒷바라지가 목표가 된 사랑의 노예. 드라마 속에서 좋은 선생과 좋은 리더를 논하듯 사랑의 근본도 같다. 사람과 헌신. 연하남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덧1) 도입부에서 말했듯 이 드라마를 보고 안판석 작품론, 한국 사회에서 공교육과 사교육의 가치, 전반부 연극적 연출과 후반부 정치 드라마적 연출, 그리고 날고 기는 조연들의 연기 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다. 좋은 드라마는 끊임없이 얘기하게 한다.

덧2) 대치동 학원가 소재라고 해서 tvN 드라마 <일타스캔들>(2023)이 곧장 떠올랐으나 완전히 다르다. <일타스캔들>은 남자 주인공 최치열 직업과 학부모와 로맨스라는 갈등 장치로 대치동 학원가 소재를 활용하는 정도, <졸업>은 어두운 부분까지 현실적으로 그리고 사교육과 공교육의 긴장관계를 중요하게 다룬다.

덧3) 사랑의 감정과 표현, 관계 변화를 드라마를 통해 좀 더 디테일하게 보고 싶다면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2022)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