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에서 온 철광: 대북제재가 비료 공장과 농민들에게 미치는 영향
작성자 ehwa
대북제재가 주민들에게 미치는 영향
함흥에서 온 철광: 대북제재가 비료 공장과 농민들에게 미치는 영향

장사를 하거나, 흥남비료연합소에서 근무하는 함흥 주민들
철광은 함흥에서 왔다. 함흥은 남한에서 ‘함흥냉면'으로 유명한 지역이지만 함흥에 함흥냉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함흥에는 북한의 최대 비료 공장인 흥남비료연합소가 있어서 함흥의 주민들은 주로 장사를 하거나, 흥남비료연합소에서 근무를 했다. 철광의 표현에 따르면 ‘세 집 중 두 집은 흥남비료연합소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또한 함흥은 공식 시장이 11개나 있을 정도로 시장을 중심으로 생산, 유통, 소비가 활성화된 도시다. 소련 붕괴 이후 배급이 끊기고, 대규모 식량난을 겪으며 생긴 비공식 시장이 2002년 7.1조치 이후 공식화되었다. 대표적인 시장은 삼일시장, 금사시장, 사포시장 등이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소규모로 장사를 하는 이들도 있고, 도매로 크게 장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시장에서 판매되는 물품은 주로 중국산과 한국산 제품들이었다. 북한의 자국산 제품 또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품질이 개선되어, 나중에는 중국산보다 자국산 제품을 선호하는 주민이 많았다고 철광은 기억했다.

제재 이후 물가 상승으로 삶이 어려워진 주민들
철광은 고향에서 장사를 했기 때문에 당시 대북제재가 물가에 미친 영향을 기억하고 있었다. 북한에 있을 땐 인식하지 못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때 목격하고 경험했던 것들이 제재의 영향 때문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철광이 기억하는 시점은 2016년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제재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한 후 이듬해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면서 제재 수위가 더 높아졌을 때이다. 당시 북한 정권은 장거리 탄도 미사일을 발사했고, 국제사회에서는 전쟁에 대한 우려가 일었다. 여러 미디어에서는 김정은 정권의 미사일 도발에 집중했지만, 북한 내에 주민들이 겪는 상황은 좀처럼 조명되지 않았다.
“2017-2018년 사이에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전쟁이 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람들이 쌀을 사재기하면서 물가가 치솟았죠. 그러면서 다른 물건들도 덩달아 가격이 올랐어요. 물가가 많이 오르자 장사하는 사람들은 모두 손해를 봤어요. 물가가 오르니까 사람들이 지갑을 열지 않잖아요. 야채 장사하는 사람도 물건을 많이 못 팔고, 특히 생필품을 팔지 않는 상인들은 더 큰 손해를 봤어요. 하루에 50% 이상 매출이 떨어지기도 했죠.”
철광은 물가가 오르면 쌀 가격이 특히 영향을 받는다고 하며, “쌀은 주민들의 주식이에요. 물가가 한 번 뛰면 그 다음에 안정이 되더라도 가격이 예전만큼 내려가지는 않아요. 결국 서민들의 삶은 더 팍팍해질 뿐이에요”라고 말했다.

제한된 석유, 멈춘 비료 공장, 어려워진 공장 사람들
대북제재는 쌀 가격 상승뿐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주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대북제재는 석유 수입에 제한을 두는데, 석유는 농민들이 쓰는 화학 비료의 주요 원재료다. 석유 수입 제한으로 인해 비료 생산에 차질이 생겼고, 설상가상으로 2015년 북한에는 100년 만에 최대 가뭄이 찾아왔다. 가뭄으로 인해 수력발전소가 멈추자 전력이 부족해졌고, 공장은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다. 철광은 말했다.
“저희 함흥 시민의 약 60%가 북한 최대 비료 공장인 흥남비료연합소에서 일했어요. 하지만 대북제재로 인해 비료공장 설비를 교체하기 어려워 아마 공장 설비가 노후화 되었을 거예요. 비료를 생산하기 위한 원자재를 구하기도 어렵구요. 제가 있을 때도 공장이 돌아가기 어려워 월급을 제대로 못 받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먹고 살기 위해 원자재나 비료를 훔치는 경우도 있었죠.”
자력갱생을 주창하는 정권, 육체노동을 강요받는 농민,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대북제재
비료공장이 멈추자 당연히 그 피해는 농민에게까지 이어졌다. 대북제재가 농민에게 미친 영향을 이야기하기 앞서, 북한의 식량난과 농민들의 상황에 대해 먼저 짚고자 한다. 북한이 식량난을 겪게 된 시점은 소련의 붕괴 이후다.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들과 교류가 가능했던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는 곡물 생산량이 꾸준히 증가했다. 1970년대에는 400만 톤, 1980년대에는 500-600만 톤으로 증가했으며, 1993년에는 913만 톤을 달성하며 북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소련의 붕괴 이후에 합법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국가가 줄어들면서 곡물 생산량은 다시 감소했다. 그리고 북한 정권은 자력 갱생을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농민들은 ‘거름 전투', ‘모내기 전투’ 등 육체 노동을 강요받았다. 예를 들어, 2016년 지시된 ‘70일 전투’의 경우 70일 내에 농장원 1명 당 가루 인분 70kg씩을 생산해야 했다. 비료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직접 인분을 모아 거름을 만들어야 한다. 인분을 말려 비료 70kg를 만들기 위해선, 그의 10배인 700킬로그램 이상의 인분이 필요하다. 정권의 지시는 주민들이 비료를 만드는 ‘기계’가 되라는 것과 같았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거름 전투’에 참여해야 하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처벌을 받는다. 처벌을 피하기 위해 인분을 훔치는 경우도 많다. 700킬로그램의 인분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에, 압박에 못 이겨 흙이나 재에 물을 부어 꽁꽁 얼리는 방식으로 가짜 인분을 만든 후 정권에 바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거름북제재는 농민들의 육체노동을 더 심화시켰다. 석유 수입 제한으로 비료, 살충제 생산, 농업 기계 및 운송 수단 작동에 어려움이 생겼고, 2017년 추가 제재로 인해 기계 및 운송 수단의 수입이 완전히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자체적으로 농업 기계를 생산하고자 하지만, 원자재 수입이 어려워 질 좋은 농업 기계를 만드는 것은 역부족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농민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해도 곡물 수확량을 늘리기는 어렵다.
최빈국 북한, 식량 원조가 아닌 수출입이 자유로우면 해결되는 게 아닐까?
유니세프에서 발표한 “2023년 세계 식량 안보 및 영양 현황”에 따르면, 북한 주민의 영양 부족 인구 비율은 2004-2006년 기준 34.3%에서 2020-2022년 기준 45.5%로 약 10% 이상 증가했다. 코로나 이후 국경 봉쇄로 수입품이 크게 제한되었고, 만성적인 식량 부족이 더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북한 정권은 중국이나 러시아 등 식량 원조를 받을 수 있는 국가가 있는지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다. 대북 지원 단체와 국제 기구도 북한에 대한 식량 원조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식량 원조는 최악의 상황을 일시적으로 면하게 하는 방편일 뿐, 경제 인프라를 재건하는 수단이나 식량생산 재개에 필요한 생산 요소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대북제재와 국경봉쇄로 인해 농업에 필요한 원자재, 원유가 부족해진 북한 정권은 주민을 더욱 착취하고 있다. 주민들의 삶을 위해 필요한 변화가 무엇인지 재고가 필요한 때다.
[출처]
“북한, 75일 만에 탄도미사일 발사...文 '무모한 도발 강력 규탄'”, BBC Korea, 2017.11.29.
이석 외, 《대북제재의 영향력과 북한의 경제적 미래》(세종: 한국개발연구원, 2022), pp. 250-251.
[참고]
7.1 경제관리개선조치(이하 7.1 조치)란 북한이 2002년 7월 1일 발표한 가격 및 임금현실화, 공장·기업소의 경영자율성 확대, 근로자에 대한 물질적 인센티브 강화 등의 조치를 의미한다. 이 조치는 기존의 계획경제 틀 내에서 시장경제 기능을 일부 도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력갱생’은 본래 중국공산당의 중요 지도방침의 하나로, 1959년부터 계속된 3년간의 자연재해와 1960년대 소련의 지원이 중단되면서 중국 내에서 제기되었던 혁명적 슬로건이다. 북한 역시 1960년대 중소분쟁으로 중국과 소련의 원조가 삭감되어 5개년 계획(1957~1961)에 차질이 생기자, 주민의 노력 동원 일환으로 이 슬로건을 차용하였다. 이후 자력갱생은 자립적 민족경제건설의 원칙적 요구로 정식화되었으며, 경제 정책 수행의 기본자세와 태도로, 혁명적 기본노선의 원칙적 입장으로 강조되고 있다.” 통일교육원 북한지식사전, “자력갱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