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인정은 필요 없다는 가스라이팅
최근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를 봤다.
드라마의 골자는 아래와 같다.
무 쓸모에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한다.
그 쓸모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 인정으로 본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살아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싶어 한다.
장 폴 사르트르는 말했다.
“인간은 본래 의미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살아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의미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
문명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하염없이 휘둘리다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래 태어날 때부터 의미가 있는 것 마냥,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 유래없는 지배의 역사를 이뤄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 마냥 우리의 가치를 부풀려 생각하곤 한다.
조금 더 넓은 차원에서 바라보면 인간의 존재에는 본래 정해진 의미가 없다.
인간이, 지구가, 태양이, 그리고 이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는 애초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종교적 관점을 제외한다면 인간이 지구에 태어난 이유를 설명할 방법도 없다. 창조주가 있다면, 우연히 친구와 술 마시다가 시작된 만약에 게임으로, 혹은 동전 던지기 게임으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본인의 가치를 의미를 정의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고귀하다고 믿었던 가치가 사실은 주어지지 않았음을 깨닫고, 다시 0에서부터 의미를 만들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감정워치’라는 기계를 통해 자신도 알지 못했던 감정을 확인한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불안을 느끼는지, 자신이라는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외부의 도움을 받아 이해하려 한다.
물론 감정을 기계가 정의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하지만 완전히 틀린 방법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늘 책과 영상,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이해해 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감정만이 아니다. 본인의 감정도 무엇인지 잘 모르는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가치 또한 스스로 규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타인을 깎아내리며 스스로를 높이고, 누군가는 버림받은 기억에 갇혀 자신의 존재를 초라하게 만든다.
그런 사람들이 만나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고, 위로받는다.
자신의 무가치함이 아닌 내가 몰랐던 나의 빛을 서로가 발견해 준다.
내가 살아있다고 존재한다고 목청껏 외쳤던 그 부름에 서로가 답변하듯 본인이 보지 못한 자신만의 빛을 찾아 서로에게 보여줌으로 나라는 인물의 무가치함의 끝에서 진실을 꺼내어 보여준다.
어떤 현자는 외부수단에 맡기지 말고 본인의 내면을 깊이 탐구해서 스스로의 가치를 찾아가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스스로의 가치를 아무리 정의한다한들 인간과 인간이 피부를 맞대고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의 인정을 받지 않고 스스로 정신 승리하기에는 어려운 환경인 것 같다.
애초에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은 '타인의 인정'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성장해 왔다.
타인의 인정이 없었다면, 신뢰 또한 없었고, 신뢰가 없었다면 공동체를 조직할 리더 또한 없었다. 리더는 인정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조직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흡수하며 거대한 문명을 이룩한다. 애초에 이런 기본 알고리즘을 통해 축적된 우리의 본성을 어떻게 얄팍한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다들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누군가에게 칭찬 한번 듣고 싶고 인정받으며 내 존재를 실감하고 싶다.
하지만 많은 미디어에서는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스스로를 인정하는 삶을 살라고 전파한다. 머리로는 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을, 그게 타인에 대한 의존성을 키우고, 나의 독립성을 떨어트리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 자신을 계속 가스라이팅 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속으로는 누군가가 인정해 주길 그로 인해 내가 가진 가치를 누군가가 알아봐 주길 내심 기대했던 것을 숨기고 살아왔었다는 것을 이 드라마를 정주행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이 마음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나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고, 사회라는 공동체는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고 가치를 알아봐 주고, 본인의 존재 이유를 채워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드라마 속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모든 스토리는 나는 존재한다는 아우성.
'이렇게 아프게 존재해. 이렇게 슬프게 존재해. 이렇게 우울하게 존재해. 이렇게 웃기게 존재해.'
기껏해야 백 년 백 년이면 다 사라지는데, 사라지는 것이 진정 존재했던 것일까. 그런 의문을 잠재우기 위해 정신없이 스토리를 써대지. 살아 있는 한 스토리를 써야 한다면 이왕이면 웃기게 난 그렇게 못살았지만 넌 웃기게."
이 대사처럼 우리는 다 사라질 것이다.
내가 만지고 있는 이 살가죽도, 언젠가 모래가 되어 이 땅이 아니라 저 멀리 이탈리아에 있는 소도시에 흩날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라질 것을 단정하고 우리의 가치에 무쓸모라는 도장을 낙인찍기에는 우연히 살기 좋은 행성, 살기 좋은 나라, 살기 좋은 시대에 떨어진 이 기회가 살짝 아까울 것 같다.
나는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다시 정의 내리는 이 과정을 타인을 통해서 정의하고 싶은 인간의 본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럼 되려 이런 말을 할 수도 있겠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아야만 내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면 고립된 사람은 어떻게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밖으로 나와라. 자신을 표현해라. 아님 황동만처럼 산꼭대기에 올라가 자신의 이름을 크게 한번 불러보아라. 행동하지 않으면 결과는 없다. 사과가 떨어지기만을 기도한다면 사과를 따먹는 누군가로 인해 평생 맛보지도 못할 것이다. 나 또한 사실 인정받기 위해 이런 시답지 않은 글을 기고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부끄럽지 않다.
그리고 누군가의 인정을 바라기 위해서는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사랑으로 바라보고, 그 사람이 보고 있지 못한 진실의 빛을 꺼내어 보여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
박해영이라는 작가도 우리에게 던지는 말이 이런 것 아니었을까.
"충분히 빛나고 있는 자신의 가치를 초라하게 만들지 마세요. 스스로 충분한 빛을 내고 있는 한 사람으로 존재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 빛나는 존재를 숨기지 말고 마음껏 드러내세요. 보여주세요. 한 번뿐인 인생 아름답게 살아야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