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체> 후기 - 소통의 불완전함이 만드는 비극
최근 <군체>라는 영화를 봤다.
오랜만에 나온 좀비물이라 기대가 컸지만, 지루한 전개와 허무한 결말 때문에 아쉬움이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던진 ‘소통의 불완전함이 만드는 비극’이라는 주제는 꽤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남겼다.
우리는 공동체 속에서 살아간다. 정보를 교류하고, 유대를 쌓고, 연대하며 강력한 사회를 만들어 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해석의 오류를 범한다.
발신자는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지만, 수신자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각자의 경험과 관점으로 해석한 뒤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이러한 현상을 가장 단순하게 보여주는 예가 바로 ‘고요 속의 외침’이다.
첫 번째 사람은 정답을 정확하게 전달하려 하지만, 상대는 제대로 듣지 못한 채 자신의 추측을 덧붙인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최초의 메시지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변질된다. '금일휴업'이라는 최초의 정답은 '수업'이라는 엉뚱한 답으로 왜곡되는 것이다. 현실의 소통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화자가 자신의 의도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을 수 있다. 하지만 정보를 운반하는 사람으로 오해를 만드는 것에 대부분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넘겨 짚은 것은 아닌지? 그로 인해 잘못된 정보가 확산되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우리의 판단을 재고하는 시간을 정말 가지고 있는 것일까?
<군체>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서영철(구교환)의 아버지는 어떤 스캔들에 휘말린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서영철은 이 비극의 원인을 ‘소통의 오류’에서 찾는다. 그는 오해와 왜곡이 발생하지 않는 존재, 즉 서로의 생각을 완벽하게 공유하는 좀비를 만들어내고, 결국 아버지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 권세정(전지현)에게 복수하기 위해 테러를 감행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 스캔들이 오해로 만들어진 정보 왜곡인지, 혹은 진짜 스캔들로 인한 사건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이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서영철은 객관적인 사실을 판단하지 않고,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감정적 정보에 파묻혀 또다른 소통의 오류를 만들어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서영철이 객관적 사실보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감정에 매몰되어 있었다면, 그는 소통의 오류를 없애겠다며 또 다른 소통의 오류를 만들어낸 셈이 된다. 반대로 아버지가 실제로 왜곡된 정보의 희생자였다면 그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사회가 과연 정답일까?
서로의 생각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공유된다면 오해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개인의 독립성, 선택의 자유 또한 역시 사라진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주관적인 생각을 한다. 누군가의 외모를 보고 평가할 수도 있고, 이유 없이 호감이나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만약 이러한 생각들까지 모두 공개된다면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끊임없이 판단하고 감시하게 될 것이다.결국 오해를 없애기 위한 정보 공유는 정보 공유가 아니라 감시 체계에 가까워진다.
여기서 공리주의적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첫째, 서로를 철저히 감시함으로써 오해를 최소화한 사회.
둘째, 오해와 왜곡의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개인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사회.
과연 어느 쪽이 더 큰 행복을 만들어낼까? 나는 후자가 더 많은 행복을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의 독립성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나만의 공간, 혼자만의 시간이 중요해지는 이유도 이와 같다. 하지만 이 독립성은 온전한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누군가를 넘겨짚어 판단하지 않아야 하고, 누군가를 악의적으로 왜곡해 깍아 내리지 말아야 한다.
어떤 것을 넘겨 짚어 판단하는 것을 토드로즈는 <집단착각>이라고 규정했다.
한가지 사례로 '신장 이식'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최초로 신장을 거부한 사람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 뒤의 사람들은 그 이유를 확인하기보다 ‘앞사람들이 거부했으니 뭔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결국 여러 명이 같은 선택을 반복하지만, 실제로는 신장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왜?“라는 질문을 던졌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 보다 넘겨 짚고, 다수의 결정에 본인의 선택을 편승시켜 선택의 고뇌에서 무거운 짐을 덜어내기를 원하는 듯하다. 앞선 사례를 소개했듯,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현명한 선택을 할 기회를 내팽겨쳐 버릴 수도, 그리고 누군가의 가치를 왜곡할 수 있을 것이다.
돌고 돌아 영화 <군체>가 던지는 메시지도 결국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통의 불완전함을 해결하는 방법은 모든 것을 공유하는 극단적인 통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넘겨짚지 않고 질문해야 한다. 사실을 확인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도 우리의 오해 속에서 절규할 것이다.
항상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살아가야 한다.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