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빨간약을 먹는다는 것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빨간약을 먹는다는 것

작성자 기미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빨간약을 먹는다는 것

기미서
기미서
@user_45hnf39pt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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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30대에 접어들면 체감되는 변화는 체력을 가장 많이 언급하곤 한다.

하지만 내게 가장 피부에 와닿게 체감되는 것은 주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간의 세월이다. 20대에는 눈에 보이지 않은 그 세월들이 30대에 들어와서 그렇게 많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때론 이를 몰랐을 지난 세월이 그립기도 하다.

엄마의 주름은 깊어져 가고, 할머니는 계속 말라만 간다. 아버지는 이가 빠지고 있다.

내 침대 옆을 보면 나와 동갑인 엄마와 아빠, 나보다 10살이 많은 할머니를 볼 수 있다. 영화 포스터 못지않게 아름답고, 힘이 넘쳐난다. 이 순간을 담은 그 시절 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그 열정 넘치는 눈빛으로 어떤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고 있었을지 너무 궁금했다. 이 사진들을 보고 있을 때면 그들의 젊은 순간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하기도 하지만 때론 내 젊음이 밉기도, 죄책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그들의 젊음을 장작으로 내 젊음의 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이 사진들의 공통점은 버려진, 그리고 버려질 것이었다는 점이다.

어느 날은 할머니 앨범을 함께 봤던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단체 사진 속 맨 뒷줄에 똘망한 눈으로 사진기를 바라보는 소녀였던 시절부터 내가 알던 할머니의 순간까지 다채롭게 채워져 있었다. 할머니는 이 앨범을 버리려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당신의 생애를 어떻게 버릴 수 있냐고 극구 뜯어 말렸다. 그리고 내 눈에 가장 아름다웠던 사진 2장을 골라 선물해 달라고 했다. 어쩌면 구출한 것이지.

또 다른 어느 날 우연히 휴지통에서 발견한 사진 꾸러미에는 엄마 아빠의 청춘들로 가득했다. 한 순간도 놓치기 아쉬워서 천장이 넘는 사진을 일일이 다 눈에 담았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 엄마의 사진, 가장 열정 넘치는 아빠의 사진을 몇 장 골라 몰래 챙겨 왔다는 사실은 아직도 그들은 모르고 있다.

언제부터 그들의 한 순간들은 이제 사치가 되어 버렸을까. 그에 비해 내 어릴 적 사진은 식탁에 엄마의 화장대에, 그리고 할머니 화장대 옆에 고이 모셔져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더 미어지게 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연민일까 무엇일까.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이 감정을 견뎌내기에는 아직 어린 듯하다. 엄마의 주름이, 할머니의 앙상함이 더 잘 보일 때면, 아버지의 어눌한 발음이 더 잘 들릴 때면 칼바람에 맞는 듯, 쌀가마를 이는 듯 조금 고통스럽다. 실제로 칼바람을 맞거나 쌀가마를 이는 것이 더 낫겠다 싶다. 칼바람은 피할 수 있고, 쌀가마는 내려놓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머릿속에 상기되는 그들의 모습은 피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장점도 있다. 피할 수 없는 만큼 가족이 자주 떠오르고, 그럴 때면 그들의 안부를 물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피로한 일상에 지쳐 내 몸하나 가누기 힘들 순간에도 이제는 그들이 떠오른다. 그들의 일상을 물어볼 수 있는 순간들이 더 많아졌고, 간접적으로 그들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순간들이 더 많아졌다. 혹여나 내가 바쁘지 않을까 연락하기를 주저하는 그들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은 내가 느끼는 고통과 함께 찾아온 축복인 것 같다.


또한 하루라도 빨리 계몽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들의 빈자리 속에서 이런 감정을 느꼈더라면 아마 지금보다 더 고통스럽고 후회 속에 살았으리라. 사실 이를 몰랐을 시절을 그리워하기보다 더 빨리 알았다면, 더 빨리 빨간약을 먹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한다. 그렇지만 후회하면 어쩌겠나.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현재와 미래는 충분히 바꿀 수 있다.

"아이폰 아무리 좋은 걸로 사드려 봤자 전화 한 통 더 드리는 게 중요한 삶"

어떤 이의 가사처럼 멋진 소녀, 소년의 자랑스러운 아들, 딸로서 전화 한 통 더, 하루라도 더 찾아뵙는 삶을 살아가자.

이 글이 당신에게 빨간약이 되었음 한다.

🔮오늘의 행운 메시지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