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 부작용
작성자 기미서
소유 부작용

최근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얼마나 자본주의이라는 체제 아래 무위도식 하고 있었는지 자각하게 되었다.
일상에 지칠 때면 이상하게도 꼭 ‘무언가 갖고 싶은 것’이 생겼다. 그래서 고민고민 하다가 가지고 싶은 것을 구매했을 때 그 잠깐의 순간에서 승리감과 만족감에 취해 일상에 지치는 감정을 잠시 잊곤 했다. 하지만 그 만족감은 3일을 견디지 못했다. 돌아보면 참 가성비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해소 방법이다.
나는 따로 취미 생활이 없었기 때문에 유일한 해소법이어서 이런 악순환을 경험하고도 어떻게 대처할 수 없음이 참 답답했다. 그러던 중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이런 행동은 단순한 소비 습관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만들어진 ‘소유의 강박’이었고, 그것이 나 스스로 만든 아집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글은 그런 깨달음 속에서 ‘소유’에 대한 나의 생각과, 결국 나는 어떻게 ‘존재’ 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치관을 정리한 독후감이다.
간략한 목차를 소개하고 시작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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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하는 것은 불안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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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하는 것은 아집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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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라는 집착에서 벗어난 존재의 의미
소유하는 것은 불안을 만든다.
우리는 소유하고, 소유를 통해 자아를 표출하고, 소유하는 원리를 통해 나를 상품화한다.
어떤 차를 타는지, 어떤 회사에 종사하는지, 존경하는 인물의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등을 통해 한 사람의 이미지가 형성되고 이는 곧 상품화되어 경쟁의 우위를 점칠 수 있는 전략으로 사용된다. 이 원리에 대해 아무런 저항감 없이 살아가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것은 나의 불안함의 원천이 이 소유로 인한 상품화에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소유하는 것은 필히 두려움을 생산한다.
비싼 외제차가 인기가 많은 이유도 그 매개체를 통해 자신을 상징화하기 쉽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이라는 자아는 이런 매개체들을 소유함으로써 상징화되고, 이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더 비싸고, 값어치 있는 것들을 소유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이 소유물들은 재산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린다. 집의 도어락을 설치하는 이유도 은행에 돈을 맡기는 이유도 이 두려움 때문이다. 결국 이 두려움이 불안을 생산하게되고, 이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한다. 이 일련의 악순환은 스노우볼처럼 해소는 커녕 불안을 더 부풀리게 만들어 우리 삶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
내가 느낀 가성비 없는 3일 해소법 또한 이 원인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지쳤다는 핑계를 대고 자신을 상징화하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 싶었고, 이를 소유함과 동시에 상실감에 대한 불안이 피어올랐던 것이다. 근데 이것은 단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자원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 조금 더 충격이었다.
더 나아가 소유하는 것은 아집을 만든다.
지식도, 신념도, 가치관도 마찬가지다.
암기식 교육처럼 외부에서 주어진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자기 소유의 생각’처럼 굳어진다. 그렇게 형성된 가치관은 더 이상 수정되지 않고, 스스로를 방어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가치관은 곧 ‘자신을 상징화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바꾸려 하면, 강한 저항과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개념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떠올랐던 것은 나의 청소년기였다. 한국의 암기식 교육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인 세대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특히 한국의 교육법이 얼마나 고리타분한 것인지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이 때문에 직장에서 만나볼 수 있는 사회초년생부터 고위인사까지 열려있는 생각을 가진 사람보다 먼저 방어기제를 펼쳐 자신의 생각을 일방향적으로 관철시키려는 사람이 더 많이 보이는 것이 아닐까.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부작용은 알았고, 그래서 어떻게 살라고?!
프롬은 소유적 실존주의보다 존재적 실존주의를 지향한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소유하는 것은 두려움, 아집 그리고 불안을 생산한다.
다시 말해 '소유 > 일시적 만족 > 소유한 것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 불안 > 다시 소유'라는 악순환이 삶을 지치게, 싫증 나게 만들고, 결국 공허함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이에 프롬은 존재적 삶이라는 방향을 제안한다. 그럼 도대체 존재한다는 이 추상적인 개념을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 '능동적 활동에서 얻는 경험을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생산적 활동성'을 의미하는 것 같다. 사랑을 체험하고, 기쁨을 체험하고, 어떤 진리를 발견하는 것에 대한 체험을 통해 삶을 풍족하게 성인으로서 더 성장할 수 있게 하는 모든 행위를 존재한다라고 일컫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존재한다'는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인상 깊은 구절이 2가지 있다.
가령 소유라는 집착에 잘 벗어나지 못하고 잘 즐기지 못하는 단적인 모습은 콘서트 현장만 봐도 알 수 있다. 다들 아티스트가 보여주는 비전을 즐기지 못하고 소유하려고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그 작은 프레임 안에서 아티스트를 포커싱 하진 못할까 촬영 감독이라도 된 듯 정교하게 짐볼질한다. 이렇듯 다들 소유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고 체험의 순간을 즐기지 못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저 소유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고, 스쳐가는 순간을 함께 느끼는 순간은 적었던 것 같다.
또한 집착에서 벗어난 자유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자유롭다는 개념이 국소적이었다는 깨달음을 줬다. 내게 자유로움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누군가의 방해를 차단하는 행위에 불구했다면 프롬이 언급하는 자유는 삶이라는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찾고, 이를 능동적으로 이해하고 수행하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내가 생각한 자유는 결국 전반적 삶의 관점에서 볼 때 방임과 다를 바 없었다. 방임이 왜 잘못된 것일까 생각해 보면 삶의 혼란함과 관련이 깊지 않을까. 프롬이 말한 것과 같이 삶은 수 많은 선택지의 종합세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에 이로운 선택지도 있는 반면 삶의 해로운 선택지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성장하며 견문을 넓히는 것을 멈추면 우리는 해로운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게 되고 우리는 또 악순환의 굴레에 갇혀 삶의 공허함과 실증에 젖어버리지 않을까.
최근에는 이렇게 소유라는 집착을 떨쳐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존재한다는 의미에 가까운 체험과 경험의 의미를 곱씹어보고 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삶에 여유가 조금 생겼다. 그리고 경험의 중요성에 대해 인지하게 되니 나의 행위에 대한 능동성이 생겼다.
나는 효율을 중시한다. “이게 얼마나 의미 있을까?”, “이 시간 아깝지 않을까?” 같은 질문만 던지며 효율에만 집착하는 고민이 많았다. 결국 이런 고민들은 다채로운 경험을 제한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다양한 체험과 경험에 중심을 두고 이것저것 경험하려고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레고를 조립했다. 결과물의 레고 모습보다는 레고를 조립하는 행위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 레고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경험적 만족 때문에 이렇게 열광할까 궁금했다. 해서 고민보다 Go라고 그냥 해봤더니 그 짧은 시간 안에서도 어릴 적 레고 조립했던 꼬맹이와 마주했었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기믹을 표현한 레고 디자이너에 대한 존경, 인고의 시간 이후 느끼는 성취감 등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결론은 이 책을 통해서 내 불안의 원천을 인지하게 된 것만으로도 삶에 대한 자세를 고쳐 앉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아서 좋았고, 앞으로 삶의 태도에 많은 영향을 줄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한번 이 책을 가볍게 읽어보길 추천한다. (마지막 챕터는 너무 지루해서 대충 스키밍 하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