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소와 키르시, 잘못된 만남은 아닐까요?
아래 글은 2026년 10월 21일에 발행된 뉴스레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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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클 3문장 요약
1. 키르시는 다이소에 깜짝 입점하여 1천~3천 원대 상품으로 인기를 끌고 있지만, 당장의 흥행만으로 브랜드에도 좋은 선택이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2. 저렴한 상품만으로도 체리 로고를 갖는 만족을 얻을 수 있다면 기존 상품 구매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고, 로고를 무분별하게 확장하면 브랜드의 매력도 약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따라서 이번 협업을 장기적인 성과로 이어가려면 다이소 상품과 기존 상품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고객이 키르시의 다른 상품에도 제값을 지불할 이유를 만들어야 할 겁니다.
이번에도 품절 대란입니다
체리 로고로 10~20대 사이에서 이름을 알린 패션 브랜드 키르시(KIRSH)가 다이소에 들어왔습니다. 평소 수만 원대 잡화를 팔던 브랜드의 상품을 다이소에서는 불과 1천~3천 원대에 살 수 있게 된 건데요. 출시 직후 일부 상품이 품절될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다이소에서 이런 장면을 보는 건 이제 낯설지 않습니다. 화장품에 이어 건강기능식품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죠. 이미 이름이 알려진 브랜드나 믿을 만한 제조사가 다이소 전용 상품을 저렴하게 내놓으면, 파격적인 가격에 끌린 소비자가 몰리고 곧이어 품절 소식이 이어지는 식입니다.
다이소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입니다. 화제가 되는 브랜드가 매장을 찾을 새로운 이유를 만들어주고, 이를 사러 온 고객이 다른 상품까지 함께 구매하면 추가 매출도 기대할 수 있으니까요. 다만 브랜드 입장에서는 많이 팔린다고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습니다. 낮은 판매 가격에 맞춰 상품을 공급하다 보면, 판매량에 비해 손에 남는 이익은 크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브랜드가 얻는 건 무엇일까요?
화장품에서는 비교적 답이 명확했습니다. 다이소에서 저렴하게 제품을 써본 고객이 만족하면 이후 더 큰 용량이나 높은 가격대의 제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할 수 있거든요. VT코스메틱의 리들샷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요. 건강기능식품 역시 다이소 상품과 기존 상품의 함량이나 구성이 다르고, 고객이 그 차이를 필요로 한다면 비슷한 흐름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이소는 수많은 사람이 부담 없이 제품을 써보는 곳이 됩니다. 처음부터 큰돈을 쓰기는 망설여졌던 고객도 저렴하게 제품을 경험한 뒤, 그 브랜드의 다른 상품까지 찾아보게 만드는 거죠.
그런데 키르시는 조금 다릅니다. 고객에게는 제품의 기능뿐 아니라 브랜드의 로고와 이미지 자체가 중요한 구매 이유일 수 있거든요. 3천 원짜리 상품만으로도 ‘키르시를 가졌다’는 만족을 충분히 얻는다면, 더 비싼 기존 상품까지 살 필요는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키르시는 다른 가능성을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키르시를 운영하는 하이라이트브랜즈 입장에서는 체리 로고 자체로 다양한 상품을 만들 가능성을 시험해 보려는 것일 수 있죠.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문구나 생활용품을 찾듯, 체리 로고가 있어서 구매하는 상품을 늘려가는 겁니다. 흔히 말하는 지식재산, 즉 IP를 활용한 사업 확장입니다.
다만 이 대목에서는 과거 라이선스 브랜드의 기억이 스멀스멀 납니다. 이름이 알려진 패션 브랜드가 다른 업체에 이름이나 로고를 사용할 권리를 주고, 그 대가를 받으며 사업을 넓힌 사례는 많았습니다. 이런 방식을 ‘라이선스 사업’이라고 하는데요. 문제는 확장 자체보다 어디까지, 어떤 방식으로 확장하느냐였습니다. 브랜드 이름이 붙은 상품을 어디서나 저렴하게 살 수 있게 되면, 특별하거나 갖고 싶은 브랜드라는 느낌은 약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장 상품은 많이 팔려도 브랜드 이름이 가진 힘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는 거죠.
키르시 역시 체리 로고를 다양한 상품으로 넓혀갈 때 이 점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로고가 붙은 상품을 계속 찾으려면, 그 로고에 끌릴 이유가 있어야 하니까요. 캐릭터만의 성격이나 이야기를 쌓아가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텐데요. 현재 키르시의 체리 로고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매력을 쌓아왔다기보다, 패션 브랜드로서 쌓아온 이미지에 기대는 측면이 큽니다.
그래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키르시라는 브랜드가 계속 매력적으로 느껴져야 체리 로고가 붙은 다른 상품도 갖고 싶어질 수 있겠죠. 반대로 원래 브랜드의 매력이 약해진다면 로고만 따로 떼어내 여러 상품에 붙이는 데도 한계가 생길 수 있습니다. 브랜드를 더 단단히 키워가야 할 키르시 입장에서 이번 시도를 신중하게 바라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명확한 다음 단계가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번 다이소 협업 때문에 사람들이 키르시를 덜 좋아하게 될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키르시를 잘 몰랐던 어린 고객에게 브랜드를 알리고, 체리 로고를 좋아하는 사람을 늘리는 계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 기회를 살리려면 다이소에서 무엇을 얻고, 이후 고객이 무엇을 하게 만들 것인지가 명확해야 합니다. 이름과 로고를 알리는 데 성공했다면, 고객이 키르시의 다른 상품에도 관심을 갖고 제값을 지불할 이유까지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그러려면 다이소 상품과 기존 상품의 차이부터 분명해야 합니다. 특히 기능보다 갖고 싶은 마음을 파는 브랜드라면, 더 비싼 상품에는 그만큼의 디자인과 품질, 특별함이 있다고 느끼게 해야 하죠. 이 차이가 보이지 않으면 다이소에서 얻은 인기가 오히려 브랜드 전체를 저렴하게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유니클로와 디자이너의 협업은 힌트를 줍니다. 크리스토프 르메르와 사라 린 트란이 이끌어온 ‘유니클로 U’는 디자이너의 감각을 접할 수 있게 하면서도 별도의 이름으로 기존 브랜드와 구분합니다. 대중에게 다가가면서도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브랜드와는 다른 상품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거죠. 두 디자이너는 올해 가을·겨울 컬렉션을 끝으로 물러나지만, 유니클로와 르메르를 구분하면서도 오랫동안 함께해 왔다는 점은 참고할 만합니다.
키르시가 그동안 쌓아온 브랜드의 매력이 다이소에서도 통한다는 건 박수 보낼 만한 일입니다. 이제 중요한 건 그 흥행을 어디로 이어가느냐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체리 로고를 갖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키르시를 계속 갖고 싶은 브랜드로 남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