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연적 혼자의 시대를 항해하는 법
작성자 테이블토크
사회변화를 향한 레퍼런스
⛵ 필연적 혼자의 시대를 항해하는 법



결혼하지 않는 2030세대
학생과 선생으로 대학에서 30년 가까이의 세월을 보냈다. 학부와 대학원생 대부분이 2030세대이니 청년의 라이프스타일이 변해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본 셈이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결혼에 대한 태도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졸업 후 얼마 지나 결혼 소식을 알려오는 제자들이 꽤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30대 후반을 훌쩍 넘기거나, 아예 비혼을 선언하는 제자들이 부쩍 늘었다.
이는 통계도 보여주는 현상이다. 2024년 통계청(현 국가데이터처)의 조사 결과를 보면, 현재 20대의 95.2%, 30대의 51.3%가 비혼으로 살고 있다. 평균 초혼 연령도 1990년 남성 27.8세, 여성 24.8세에서 2024년 남성 34세, 여성 32세로 6세 이상 높아졌다.
싱글의 삶에 대한 인식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2010년대 초에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세대라는 말이 유행했다. 결혼하고 싶지만 못한다는 ‘미혼’이 기본 정서값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비혼’이 더 통용되는 단어다. 노총각, 노처녀라는 표현은 사라진 지 오래이고, 그 자리를 자유로운 솔로라는 새로운 이미지가 채워가고 있다. 지금의 청년들은 ‘언젠가 결혼을 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보다 ‘앞으로 결혼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 속에 미래를 준비한다.



지도 없는 항해
그런데 안타깝게도 솔로들에게는 다음 시대를 항해할 때 필요한 지도가 없다. 기혼자의 삶에는 결혼, 출산, 양육, 자녀 독립과 같은 대략의 생애주기 매뉴얼이 있다. 지도가 있으니,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2030 비혼 청년들은 4050, 6070 비혼자들을 만나본 경험이 거의 없다. 롤모델도 없고 참고할 선례도 없으니 앞을 내다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지금의 조건이 계속될 것처럼 살아간다. 지도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솔로라이프의 공동의 서사를 만들고 싶었다. 지난 6년 간 Alone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성별, 연령, 직업, 소득이 다른 비혼 1인가구 109명을 만나며 혼자의 삶의 조각들을 수집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까지는 아니지만, 각자의 사연, 선택. 일상이 하나둘 모이자 거대한 서사적 지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실제 관측으로 완성된 세계지도는 상상으로 그린 지도와 상당히 다르듯이, 1인가구들을 직접 만나 완성된 지도는 익히 알려진 ‘무능한 싱글’이나 ‘화려한 솔로’라는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이기적이라는 오해
첫 번째 오해는 싱글들은 출산·양육처럼 가족의 책임을 떠맡기 싫어 결혼을 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시선이다. 물론 이들은 기혼자처럼 출산과 양육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비혼자들은 결혼을 하면서 새롭게 꾸린 핵가족이 없기 때문에 원가족에 더 헌신한다. 핵가족을 이루면 자녀 교육과 양육에 더 힘을 쏟게 되지만, 비혼자들은 직계비속에 대한 의무가 없어 원가족에게 상당한 노력과 관심을 기울인다.
널리 알려진 트렌드는 ‘조카바보’ 현상이다. 2016년 결혼정보회사 가연이 비혼 직장인 32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서 응답자의 46%가 자신이 조카바보라고 답했다. 이들은 키즈산업의 큰손이라고 불릴 만큼 조카를 위한 물심양면의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연구하면서 주목한 현상은 따로 있다. 바로 비혼 자녀들이 노쇠한 부모의 주된 돌봄자가 되는 경향이다. 한국보다 앞서 고령화와 탈가족화를 경험한 일본에서는 이미 흔한 광경이다. 일본 가족 연구를 해온 인류학자 지은숙 교수는 남녀 성별 분업이 여전한 일본에서도 최근 비혼자가 증가하면서 비혼 여성 외에 남성들도 부모를 부양하고 간병하는 역할을 전담하게 되는 모습을 관찰했다. 이는 문학 작품의 소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마쓰우라 신야의 논픽션 에세이 『엄마, 미안해』는 50대 독신남이 혼자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현상은 한국에서도 머지않아 본격화될 것이다. 실제 연구를 하며 만난 한국의 4050대 비혼들도 30대까지는 결혼하지 않은 자신이 부모의 걱정거리였지만, “부모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결혼 안 한 자식만큼 효녀·효자 노릇하는 자식은 없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이는 부모와 함께 사는 비혼자들에게도 적용된다. 우리 사회는 이들을 독립하지 못한 의존적 세대라는 뜻에서 ‘캥거루족’이라 불러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부모에게 의존한다고 여겨졌던 바로 그 자녀들이 이제는 부모가 가장 의지하는 존재가 되는 셈이다.

사회에 도움이 안 된다는 오해
두 번째 오해는 솔로들이 한국의 성장과 발전을 저해할 것이라는 비판이다. 그간 노동 집약적 산업으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세수의 주된 원천이 근로소득인 기존 흐름에서 보면, 출산을 통해 미래 노동력을 재생산하지 않는 솔로들은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존재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AI와 휴머노이드 로봇이 산업 현장에 대거 투입될 미래에도 저출생이 지금과 동일한 위협이 될지는 의문이다.
미래에 대한 예측을 접어두더라도, 현재 1인가구 직장인들은 후기 산업사회의 노동시장에 가장 최적화된 존재들이다. 산업구조와 가구유형의 관계를 짚어보면 이 점이 선명해진다. 농경사회에서는 함께 농사를 짓기 위해 대가족을 이루었고, 제조업 중심의 전기 산업사회에서는 공장이 있는 도시로 이동하기 편한 핵가족이 전형적 가구유형이었다. 그러나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금융, IT, 문화예술, 미디어 산업 같은 서비스업 중심의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계약직·파트타임·프리랜서·성과연봉제로 노동시장이 유연해졌다. 지방이든 해외로든, 밤이든 낮이든 자업무에 쉽게 투입되거나 해고해도 큰 부담이 없는 싱글이 유동하는 노동시장에 최적화된 가구유형으로 부상했다. 부모 세대가 불효자라서 대가족을 떠나 핵가족을 이룬 것이 아니듯, 청년 세대도 뼛속까지 개인적이라 핵가족을 떠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물론 현대사회의 개인화 현상은 부정할 수 없는 흐름이다. 그런데 겉보기에 문제시되는 개인주의 문화는 후기 산업사회의 핵심 동력이기도 하다. 농업사회의 주된 생산물인 ‘쌀’은 그 품종이 다양하지 않고, 농부의 개성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상품이다. 제조업 시대의 주요 상품인 ‘자동차’ 역시 소품종 대량생산으로 만들어진다. 조립라인에서 집단적으로 일하는 노동자에게는 근면함이 중요했지, 개인의 취향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콘텐츠를 소비하고 생산하는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개인의 정체성 자체가 주된 원료가 된다. 기능적으로 아무 문제없는 스마트폰도 유행이 지나면 교체해야 하고, 소비자 취향에 맞춰 다채로운 콘텐츠를 끊임없이 생산해야 한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는 개인의 개성이 핵심 자원이고, 금융과 IT업계에서는 개인의 성취가 곧 보상의 기준이다. 교육 시스템마저 어릴 때부터 적성, 흥미, 개성, 성향을 끊임없이 파악하고 진단하며, 그것을 직업과 연결시킨다. 자신의 취향이나 적성보다는 그저 생계를 위해 주어진 일을 했던 부모와 조부모 세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대를 산다.
이런 사회구조의 흐름 속에서 싱글라이프는 후기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필연적 귀결이 되었다. 현대인은 내일의 노동자를 재생산하는 대신, 에너지를 풀가동하여 오늘의 노동현장에 자신을 갈아 넣는 삶을 산다. 특히 싱글 직장인들은 학군을 따라 이동하기도 하는 기혼 직장인들과 달리 이른바 ‘직주근접’, 직장에서 가까운 오피스텔과 원룸에서 생활한다. 실제 통계청과 SK텔레콤의 712만 명의 통근자 빅데이터를 병합해 분석한 결과, 기혼자보다 비혼자가 직장에서 1km 더 가까운 곳에 살았다. 이들은 경제성장에 기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몸을 가볍게 해서 유연화된 노동시장에 맞추는 방식으로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생존경쟁? 생존이 아니라 경쟁이 문제!
동물행동학자 최재천 교수는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세태를 환경이 척박할 때 번식을 멈추는 동물들의 본능에 빗대어 설명한다. 그런데 조금 더 넓게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전쟁이나 정치적 분쟁, 경제적 빈곤처럼 생존 자체가 정말로 위태로운 사회에서는 1인가구 비율이 현저히 낮다. 혼자서 아무리 노력해도 무엇인가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오히려 가족이나 지역 공동체를 이루며 산다.
반대로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후기 자본주의 국가들― 유럽, 북미, 일본, 한국―들에서 1인가구 비율이 40%를 넘나든다. 우리나라도 지금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어렵고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을 때 오히려 혼자 사는 사람들의 비율이 낮았다. 1970년대 1인가구는 전체 가구의 3%대에 불과했다.

한국사회는 흔히 '생존경쟁'이 치열한 사회라고 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문제는 생존이 아니라 경쟁이다. 우리는 이미 생존이 보장된 사회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무한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무한경쟁 속에서 사람들은 “세상은 믿을 게 못 되니 나만 믿겠다”라고 말한다. 적지 않은 싱글들 역시 결국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 하고, 책임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혼자 살 수 있는 조건 또한 사회가 만들어주는 것이다. 자기계발을 하며 지새우던 밤, 방을 밝혀준 전기도, 읽었던 책도, 앉았던 책상도 내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아무리 자기계발을 할 의지와 능력이 있어도 전기, 책, 책상이 없어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존재한다. ‘나의 노력’이라 여기는 모든 성취의 순간에, 수많은 타인의 노동이 겹겹이 나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러니 나의 노력은 결코 나만의 노력이 아니다.
인간은 사회라는 토대가 허용하는 만큼만 홀로 살아갈 수 있다. 사회 시스템이 불안정한 나라에서는 “혼자 잘 살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어올 틈도 없다. 개인의 의지, 노력, 능력만으로 삶을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만 믿겠다”라는 태도는 개인의 강인함에서 나온 신념이 아니라, 그 믿음을 가능하게 해주는 세상이 존재할 때만 성립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현실인가.

싱글라이프의 생애전환기, 4050세대
6년간의 인터뷰를 하면서 싱글라이프의 분기점도 파악할 수 있었다. 바로 40대 중후반부터다. 스탠퍼드 의대 유전학자 마이클 스나이더 교수 연구팀이 2024년 《Nature Aging》에 발표한 연구가 흥미롭다. 인간의 노화가 완전히 점진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40대 중반과 60세 전후에 면역 조절, 심혈관 기능, 피부와 근육, 알코올과 카페인 대사와 같이 신체적 변화가 집중해서 발생하는 두 번의 파동(waves)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달라지는 것은 신체만이 아니다. 40대 중후반이 되면 결혼한 친구들과의 사이도 소원해진다. 그들은 자녀 교육과 가계에 집중하느라 여유가 없다. 원가족에도 변화가 생긴다. 유일한 가족인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제자매도 본인의 핵가족에 집중하면서 자연스레 멀어진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진 오늘날 중년 직장인의 입지는 더없이 불안정하다. 가족과 일터라는 두 개의 중심축이 모두 흔들리는 상황을 맞는다. 집과 직장을 오가는 것이 삶의 전부였던 이들에게, 그 두 축이 동시에 흔들리는 경험은 거의 난파에 가깝다.
이때 1인가구가 경험하는 감정은 외로움이다. 2025년 국가데이터처 통계에 따르면, 비혼자(48.9%)가 기혼자(38.2%)보다 평소 외로움을 느낄 확률이 10%p 높다. 문제는 이러한 외로움이 누적되면서 발생하는 정신건강의 악화다. 미국의 공중보건위생국장을 지낸 비벡 머시는 외로움은 하루 담배 15개비를 피는 것만큼 건강에 해롭다고 말한다. 실제로 혼자 사는 사람들은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기혼자보다 2배 이상, 자살생각이나 시도를 할 확률은 4배 이상 높다.
물론 모든 1인가구가 외로움을 타는 것은 아니다. 가족과 함께 살아도 외롭다고 반박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혼자라고 느끼는 것(feel lonely)과 물리적으로 혼자인 것(be alone)은 다른 수준의 문제다. 위의 연구들이 위험하게 보는 외로움은 단순한 감정적 상태가 아닌 사회적 연결(social connection)이 없는 신체적 외로움이다. 혼자 사는 삶에 만족하는 사람도 물리적으로 홀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홀로인 상황은 아프거나 쓰러졌을 때 도움을 줄 가까운 타자가 없는 것과 같이, 그 자체로 실질적 위험을 안고 있다.

삶의 지평을 확장하기
내가 이 연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러니 어서 빨리 가족을 이루라”는 것이 아니다. 가족을 이루고 싶어도 여러 여건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다면, 가족 형성을 수월하게 할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결혼과 출산을 정책으로 강제할 수는 없다. 아무리 국가가 효부상이나 효자상을 준다고 해서 도시로 나가려던 자녀들이 나이 든 부모를 봉양하며 농촌에 남지 않았던 것처럼, 결혼을 원치 않는 청년 세대를 결혼·출산장려정책으로 핵가족에 묶어 놓긴 어렵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방안은 집-직장에 갇혀 있는 삶의 지평을 넓히는 노력들이다. 우선 제1의 장소인 가정을 넓혀야 한다. 한국에서는 ‘결혼하지 않는다’는 곧 ‘혼자 산다’는 말과 동일어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비혼이라고 해서 반드시 혼자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유럽이나 북미처럼 이미 개인화가 오래된 사회에서는 친구들이 함께 모여 사는 하우스메이트 문화가 일상화되어 있다. 미국 시트콤 「프렌즈」에서 모니카와 레이첼이, 챈들러와 조이가 함께 살던 것처럼 말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방영된 드라마 「멜로가 체질」도 남자친구의 사별로 어려움을 겪는 친구를 위해 다른 친구들이 함께 살며 일상의 위로를 주는 내용이었다. 한국에서도 드라마를 넘어서 비혼이 곧 고립이 되지 않도록 ‘비친족 가구’를 위한 지원과 시스템이 필요하다.

둘째, 제2의 장소인 일터의 안정성이다. 실제로 인터뷰를 하면서 만난 1인가구 중에 가장 취약했던 집단은 고시원에서 일용직을 하며 사는 중년 남성, 원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아 멀리 떨어져 사는 프리랜서 청년이었다. 이들은 돈도, 친구도, 생활역량도 축적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직장이 안정되면 시간을 계획할 수 있고, 직장 동료와도 교류할 수 있으며, 재테크나 가계에 대한 전망도 세울 수 있다. 안정된 일터는 단순히 소득의 문제가 아니라 삶 전체의 구조를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이다.
셋째, 이 두 고유한 장소가 부실할 경우, ‘제3의 장소’가 필요하다.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는 집(제1의 장소)과 일터(제2의 장소) 외에, 사람들이 역할과 위계에서 벗어나 ‘그냥 나’로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제3의 장소라고 불렀다. 동네 카페와 미용실, 마을 도서관, 공원과 마을회관 같은 곳이다. 제3의 장소는 개인의 노력으로 만들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국가, 지역사회, 시민단체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독일의 다세대하우스(Mehrgenerationenhaus)가 좋은 사례다. 남녀노소 여러 세대가 모여 자원봉사와 공동활동을 하며 지역사회의 유대감을 키우는 사랑방 같은 곳으로, 전국 약 550곳이 연방정부의 체계적 지원을 받고 있다. 영국은 외로움 장관을 임명하고 지역 동호회와 모임을 늘리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삶의 의미를 찾아가기
그러나 모든 사람이 삶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함께 살만한 친한 친구를 만나는 일, 오래도록 몸담을 수 있는 직장을 갖는 일은 노력한다고 누구나 얻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안 그래도 번아웃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제3의 장소에 참여하라는 처방은 또 다른 부담으로 느껴질 수 있다. 특히 내향적인 사람들에게는 다소 버거운 과제일 수 있다.
이들에게 할 수 있는 내향적 대안은, 바로 삶에서 의미를 만들어 가라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경험을 바탕으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썼다. 그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을 살게 하는 힘은 행복도, 권력도, 돈도 아닌 “의미를 향한 의지(the will to meaning)”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존재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만이 고통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몸으로 체득했다. 프랭클의 통찰은 수용소 밖의 일상에도 적용된다. 혼자 사는 삶에서도, 자신의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발견한 사람은 고독을 견딜 수 있다.
내가 만난 한 인터뷰 참여자가 한 말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는 힘겨운 세상에서도 인간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을 ‘소셜 아이덴티티’, 이른바 사회적 존재감에서 찾았다. 그가 생을 마무리할 때 얻고자 하는 것도 바로 사회적 존재 인정이었다. 보통 가족이 있으면 임종할 때 ‘당신 좋은 남편이었어.’ ‘좋은 엄마였어’, ‘그동안 수고했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가족이 없는 싱글들에게는 이런 애도의 과정이 부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동안 애썼다”라는 위로와 함께 “네가 우리의 구성원이어서 기뻤어, 함께 해주어서 고마웠어”라는 작별인사를 사회로부터 받고 싶어 했다.
내향적인 싱글이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모습의 단초를 영화 「스틸 라이프(Still Life)」의 존 메이에게서 본다. 런던 구청 공무원인 존 메이는 본인도 혼자 살면서, 고독사한 무연고자들의 장례를 치러주는 일을 한다. 그의 삶은 정물화(still life)처럼 고요하다. 심지어 그 또한 교통사고로 홀로 죽음을 맞는다. 그를 찾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정성껏 공영장례를 치러주었던 수많은 무연고자의 영혼들이 그의 무덤에 모여 함께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모습이 나온다. 평생 외롭게 살았지만, 그의 삶에는 숭고함과 존엄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삶은 스크린 밖에도 존재한다. 며칠 전, 독신으로 살다 간 56세 故 윤인수 씨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되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평생 카센터 기술자와 페인트공을 전전했던 그는 작은 원룸 한 칸에서 혼자 살았다. 그러다 2024년 위암 4기 판정을 받았고, 1년 넘게 투병하다 2025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인수 씨는 생전에 누나에게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을 사회에 꼭 환원해 달라고 여러 차례 당부했다고 한다. 2026년 2월 유족들은 그 뜻을 받들어 그가 남긴 전 재산을 충북대학교병원에 기부했다.
504,610,291원.
만원, 백만 원 단위로 딱 떨어지지 않는 기부금의 마지막 단위까지 천천히 바라보며 긴 애도를 표했다. 이 숫자에는 혼자 노동하며 하루하루 버텨온 한 사람의 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화려한 인생을 살진 못했지만, 자신의 전부를 세상에 남기는 방식으로 삶에 묵직한 마침표를 찍었다.
인간은 타인에게 기여하면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때가 많다. 혼자의 시대에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나누며 살아갈지 고민할 때이다. 삶과 죽음은 개인이 경험하는 것이지만, 결코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인생이 사회와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받는지 자각해야 한다. 이 세상을 ‘만인이 만인을 향해 투쟁하는 정글’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자연의 정글이 아니다. 인류가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사회시스템이다. 집과 일터를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주는 것, 제3의 장소인 공동체를 형성해 집과 일터 사이의 빈 공간을 채우는 것. 그리고 삶과 죽음의 의미를 찾도록 나눔의 네트워크를 펼치는 것. 이 모든 것이 혼자의 시대를 항해하는 데 필요한 지도의 조각들이다. 지도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그려가야 하는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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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浦晋也. (2018). 엄마, 미안해: 내 멋대로 살던 나. 엄마를 돌.보.다. (이정환 역). Kmac.
Frankl, V. (2025).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시형 역). 청아출판사.
Murthy, V. H. (2020). 우리는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 외로움은 삶을 무너뜨리는 질병 (이주영 역). 한국경제신문.
Oldenburg, R. (2019). 제3의 장소 (김보영 역). 풀빛.
Shen, X., Wang, C., Zhou, X., Zhou, W., Hornburg, D., Wu, S., & Snyder, M. P. (2024). Nonlinear dynamics of multi-omics profiles during human aging. Nature Aging, 4(11), 1619-1634. https://doi.org/10.1038/s43587-024-00692-2
글 | 김수영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사회적 배제와 위험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것이 특정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구조적 조건의 산물임을 드러내는 연구에 집중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Alone 프로젝트를 통해 개인화 시대의 1인가구 생활 양식을 연구했습니다. 현재 미래사회정책 연구그룹 ToSoPo(Tomorrow's Social Policy) Network를 이끌고 있습니다.
https://sites.google.com/view/tosopo/home | bethany@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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