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른이 없다? 청년들이 말하는 어른의 부재
작성자 테이블토크
사회변화를 향한 레퍼런스
⛓️💥 어른이 없다? 청년들이 말하는 어른의 부재



‘어른 없음’은 무엇의 부재일까
나는 최근 청년의 고립에 대해 인류학 석사 논문을 썼다. 연구 과정에서 만난 ‘고립 청년’들은 각기 다른 삶의 맥락 속에서 실패·좌절·폭력·배제 같은 경험을 겪어왔고, 무엇보다 그러한 경험을 대부분 혼자 감당해 온 경우가 많았다. 고립은 이처럼 힘든 순간들이 축적되면서 나타난 증상이었지만, 절망의 순간에 함께 버텨줄 신뢰의 관계가 없는 이들이 더욱 쉽게 고립에 놓였다. 그래서 고립은 (새삼 당연하지만) 관계의 부재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어른 없는 사회’라는 주제로 청년의 시선을 나눠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나는 “요즘 세상에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차원을 넘어, 어떤 청년들의 삶에서는 정말로 기댈 수 있는 관계 자체가 얼마나 부족할 수 있는지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은 청년들이 ‘어른’에 대해 느끼는 여러 지표에서 출발하지만, 그 표면 아래 놓인 이야기를 따라가며 청년들이 체감하는 관계적 공백, 그리고 그 관계가 지속되기 어려운 사회 구조의 문제를 함께 질문하고자 한다.
(*이 글은 내가 10월 17일, 교보교육재단에서 주최한 2025 교육 심포지엄 「 어른 없는 사회: 불안의 시대, 어른다움의 길을 묻다」에서 발표한 ‘청년들이 바라보는 어른의 표상’ 내용을 재구성한 글이다. 아래 설문조사 또한 교보교육재단과 함께 진행했다.)

데이터가 보여준 것들
‘어른 없는 사회’라는 주제로 이야기한다고 했을 때, 주변 친구들의 반응은 예상을 빗나갔다.
친구들은 내 삶에 어른이 있냐없냐보다 어른이 뭐냐는 질문부터 던졌다. 내 친구들이 대부분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임을 감안해야겠지만, 이 반응에는 ‘어른’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낯섦과 거리두기, 그리고 무감각이 겹쳐져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청년들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을까? 지금의 청년 세대는 ‘어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아니 바라보고는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을 조금 더 보편적인 층위에서 탐색하기 위해 교보교육재단과 함께 전국 19세~39세 청년 40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기에는 조사가 간단했지만, 들여다볼 만한 중요한 결과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결과는 청년들이 생각하는 ‘어른다움’의 핵심 가치였다. ‘어른다운 어른’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을 묻자, 전체 응답자의 약 3분의2가 ‘책임감’을 1순위로 꼽았다. 이것만 보면 ‘좋은 어른=책임지는 사람’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세부적으로 답변을 나누어보면 성별에 따라 양상이 조금 달라졌다. 남성은 책임감·능력·지위를, 여성은 경험·지혜·돌봄·배려를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게 평가했다. 다시 말해 ‘어른다움’이라는 단어에는 이미 성별에 따라 다른 기대와 역할이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청년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실제로 이런 ‘어른’을 얼마나 경험하고 있을까. “지난 한 달 동안 소통한 사람 중에서 ‘어른’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었는가”를 물었을 때, 무려 34.8%가 “전혀 없었다”고 답했다. 그러니까 청년 세 명 중 한 명은 지난 한 달간 가족, 직장, 학교, 동네 등 어느 관계망에서도 단 한 명의 어른도 떠올리지 못했다는 뜻이다.

“심각한 문제로 고민에 빠졌을 때 의논할 수 있는 어른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응답자의 56%가 ‘몇 명 이상 있다’고 답했지만, 나머지 44%는 ‘거의 없다’ 혹은 ‘전혀 없다’고 응답했다. 위기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없는 사람이 전체의 4할이 넘는 셈이다. 여기에서도 성별 차이가 드러났다. 고민을 의논할 있는 어른이 누구냐는 질문에 남성일수록 부모·직장 상사·학교 선배 등 공적인 관계를 먼저 떠올릴 확률이 높았고, 친구·상담사·목사와 같은 비공식적인 돌봄 관계들을 언급한 건 모두 여성이었다. 이는 공적 관계나 제도적 관계에 대한 신뢰가 여성에게 특히 취약하게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응답자들이 단지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어른’의 존재를 더이상 체감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어린 시절, 기댈 수 있는 어른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무려 41.5%가 ‘거의 없었다’ 또는 ‘전혀 없었다’고 답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어려서부터 기댈 만한 어른과의 안전한 관계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지난 한 달간 기댈 수 있는 어른이 없었다는 비율이 비슷하게 44%인 점을 감안하면, 일부 청년들에게는 성장 과정 전반을 통틀어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이 거의 부재한 시간이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어른’이라는 존재는 필요하다”를 물어본 5점 척도 문항의 평균이 4.13점으로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청년들은 어른을 충분히 경험해보지 못했어도, 혹은 지금도 없다고 느끼더라도, 어른이라는 존재 자체의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원하는 어른이 될 수 있다”라는 문항으로 넘어가면 평균이 3.65점으로 크게 떨어졌다. 다시 말해 청년들은 어른은 필요하지만, 자신이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여성은 그 이유로 어른이 될만한 ‘사회·경제적 여건이 안될 것 같다’를 꼽은 비율이 85%나 되었다(남성은 56%). 데이터를 종합해보면 30대 여성은 세대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어른의 부재’를 말하고 있는 집단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신뢰할 만한 어른을 만나기 어려웠고, 앞으로 스스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확신 역시 낮았다. 즉 생애 전반에서 ‘어른’이라는 관계가 희박하게 이어져 온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30대 여성인 내 친구들이 “어른은 누구를 말하는 건데?”라고 되물었던 반응이 조사 결과와 겹쳐 보이기도 했다.

정리하면, 데이터는 다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결과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청년들은 왜 ‘책임감’을 어른다움의 핵심으로 상상하는가? 30대 여성은 왜 유독 어른의 부재를 두드러지게 경험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점점 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을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내가 지난 1~2년 동안 연구를 통해 만나온 청년들의 이야기 속에서 조금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¹.

청년들의 서사와 어른 없는 ‘사회’
① 좋은 어른을 만나본 적이 없다
어린 시절 기댈 수 있는 어른이 없었다고 답한 비율이 41.%였음을 떠올려보자. 실제로 내가 만난 많은 청년들도 학창 시절 겪은 어려움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유년시절 학교 폭력, 따돌림, 빈곤, 가정 불화 등을 경험한 경우가 많았지만, 그 고통을 들어주거나 개입해준 어른은 거의 없었다. 부모도, 학교 선생님도 관심을 갖지 않거나,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고통을 더 키우는 존재로 기억되기도 했다.
학교 폭력을 겪었던 은지(가명)는 “제 일생 동안 좋은 어른은 없었어요”라고 말했을 때, 이 말의 무게는 단순히 주변에 ‘꼰대’밖에 없었다는 푸념이 아니다. 그건 가장 힘들고 취약했던 순간에 기댈 사람이 없었다는 말, 그리고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방치된 채 유년시절을 혼자 건너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말이다.
② 롤모델이 없다
여성, 특히 30대 여성에게서 ‘어른의 부재’가 두드러진다는 결과는 사실 당사자로서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회사를 다닐 때 또래 여성들과 자주 나눴던 말은 “여성 롤모델이 없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일단 회사 안에는 오래 일한 여성 선배 자체가 너무 적었다. 간혹 높은 자리에 오른 선배가 있더라도, 우리 눈에는 그 과정이 지나치게 고되고 희생적이거나,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에 자신을 맞추며 버틴 결과로 보였다. 그래서 사회초년생 시절 같은 팀의 여성 동료들과 함께 “진짜 대단한데… 저렇게 되고 싶진 않아”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2030 여성의 일 경험과 감정 상태를 다룬 김현미 교수의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회사에서 살아 남은 여성’이 더 이상 후배 여성들의 롤모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 직장인들은 단지 ‘신뢰할 만한 어른’이 없을 뿐 아니라, ‘닮고 싶은 어른’조차 찾기 어려운 환경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내가 걸어가고 싶은 미래를 그릴 수 없을 때, ‘어른’의 상은 그만큼 더 멀어진다.
③ 어른들이 세상을 이상하게 가르쳤다
민성(가명)은 휴대폰 GPS 기록이 1년 동안 집 외의 좌표를 거의 남기지 않을 정도로, 1년 가까이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한 은둔 경험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운동과 아르바이트를 조금씩 시작했고, 그의 성실함을 알아본 사람들이 하나둘 기회를 건네면서 지금은 여러 일터를 오가며 활발하게 지내고 있다. 공부를 꽤 잘하던 민성은 부모님의 의지에 따라 공학 대학원에 가려고 했지만, 의외로 공사 현장, 마트, 행사장 등에서 몸을 쓰며 하는 일이 자신에게 잘 맞는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학교’라는 세계를 벗어나 다양한 환경 속의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자신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세계관이 크게 흔들렸다고 말해주었다.
부모를 포함한 주변 어른들은 ‘좋은 대학 → 대기업 → 안정적인 삶’이라는 경로에서 벗어나면 인생이 망할 거라는 메시지를 의도하든 아니든 반복해왔다. 그런데 직접 일터와 사람들을 경험해보니 그 경로 밖에도 다양한 삶이 존재했고, 경로를 이탈해도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고, 민성이 힘을 주어 말했다. 민성의 이야기는 어른들이 청년에게 제시해온 삶에 대한 상상력이 얼마나 협소한지를 보여준다.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면 큰일이 날 것처럼 말하며, 다른 삶의 가능성은 애초에 고려할 수 없게 만드는 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민성은 내가 만난 취약한 청년들 중에서도 아주 특수한 경우였다. 정상 궤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민성처럼 바깥으로 나와 새로운 경험을 해보거나 누군가의 지지를 통해 재도약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그 궤도가 나랑 잘 안 맞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민성처럼 용기를 내거나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며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궤도를 벗어나면 망한다고 가르치던 어른들의 목소리가 이제는 은둔을 하고 있는 스스로 안에서 내면화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청년들에게 어른이 없다는 건 그냥 주변 어른들을 탓하면 되는 문제일까? ‘어른 없는 사회’에서 나는 ‘사회’에 방점을 찍어보고 싶다. 예컨대 노동시장에서 20대 비정규직의 비율은 매년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². 어차피 몇 개월 일하다가 떠나게 되어버리는 자리에서, 청년들은 당연히 나보다 ‘어른’인 선배와의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한다. 이는 비단 일터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회 곳곳에서 청년들은 ‘어른’을 신뢰하기 어려운 현실을 경험한다. 전세사기 피해자의 75%가 청년이다³. 운 좋게 사기를 피했더라도, 서울의 청년들은 평균 1.4년마다 이사를 반복한다⁴. 한 지역에서 오래 머무르며 관계를 누적하는 경험 자체가 어려운 구조다. 여성 롤모델의 부재 역시 통계로 확인된다. 대기업 임원 10명 중 여성은 1명도 되지 않는다⁵. 이 장면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좋은 어른은 커녕 그냥 어른과도 관계를 맺고 쌓아갈 수 있는 시간, 조건, 토대가 취약하다는 것이다.

관계로서의 어른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어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당연히 아니다. 취약한 관계망을 뚫고 내 삶에 들어오는 ‘좋은 어른’은 그만큼 더 또렷한 존재감을 남긴다. 연주(가명)는 자신이 다니고 있는 청년 지원 기관의 선생님을 망설임 없이 ‘좋은 어른’이라 일컬었다. 어린 시절 왕따를 경험한 뒤 3년 이상 은둔을 했던 연주는 지원 기관에 오면서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 억지로 텐션을 끌어올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상태가 좋아졌다’는 신호로 받아드렸지만, 기관의 선생님은 연주가 불안과 긴장 속에서 애쓰고 있다는 걸 먼저 알아보았다.
선생님은 연주에게 남의 눈치를 보느라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네가 편한 방식으로 너를 지키며 살라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이는 연주를 오랫동안 세심히 관찰하고, 연주의 삶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이어야만 가능한 조언이다. (실제로 해당 기관은 참여자와 최소 3년을 함께하며, 프로그램 바깥의 삶의 영역까지 참여자 한 명 한 명을 돌보는 방식으로 청년들의 자립을 돕고 있다.) 그래서 연주에게 이 조언은 훈계가 아니라, 위태로울 때 균형을 잡아주는 진심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연주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자신만의 속도대로 프로그램에 임하기 시작했다.
연주의 이야기가 알려주는 것은, 좋은 어른이 결코 거창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든 정답을 제시하거나 삶의 방향을 통제하는 사람도 아니다. 한 사람의 삶에 성급히 개입하지도, 무책임하게 방치하지도 않으면서 필요한 순간에 책임 있게 머물러주는 사람—그런 관계가 청년들이 말하는 ‘좋은 어른’의 얼굴이다. 그래서 청년들은 어른이 필요없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청년들이 거부하는 것은 지나친 간섭이나 규범의 강요, 그리고 관계에 있어 무책임한 태도일 것이다. 이는 내가 만난 또 다른 청년 이영(가명)이 어른들에게 하고 싶은 말에 축약되어 있다: “우리한테 관심 갖지 마세요. 아 근데 관심 가져주세요.”
그래서 관건은 어른의 ‘자격’이 아니다. 누가 더 성숙한가, 누가 더 모범적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조건 속에서 서로에게 어른이 될 수 있는가가 중요해진다. 불안정한 노동과 주거, 미래가 보이지 않는 일터들은 어른으로서의 관계를 실천할 기반을 계속 약화시키고 있다. 어쩌면 어른이 되기 위한 덕목보다 중요한 것은 어른다운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여건일지 모른다. 누군가의 삶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시간과 제도, 관계의 토대를 다시 상상하는 지점에서 비로소 ‘어른 없음’을 넘어설 단서가 생길 수 있다. 청년에 대해 썼지만, 청년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¹ 김미소. (2025). ‘고립’을 통치하기: 고립 청년 지원 정책의 문화기술지.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석사학위논문.
일하는학교·듣는연구소. (2025). 일하는학교 고립청년지원사업 ‘괜찮은 하루’ 성과분석 보고서.
² 임성빈. (2024.10.27). 20대 비정규직 역대 최대… 청년 4명 중 1명은 '불안정 노동'.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7399)
³ 신지후. (2024.12.20). 전세사기 피해자 2만5000명 넘어섰다…40대 미만 청년이 74%. 한국일보.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122010090003627)
⁴ 기성훈. (2022.07.27). ‘고단한’ 서울 청년살이…월세 살며 1.4년마다 이사한다. 머니투데이. (https://www.mt.co.kr/estate/2022/07/27/2022072615260358085)
⁵ 김규리. (2025.04.30). 대기업 ‘여성 임직원’ 늘어도 ‘여성 임원’은 10명 중 1명도 안 돼. 더나은미래. (https://futurechosun.com/archives/122207)
글 | 김미소
‘조금 덜 힘들게 사는 방법’을 탐구하며 살아가고 싶은 연구자.
청년의 문제에 특히 관심을 가지고, 최근까지 인류학을 공부했다. 듣는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meesoh@findinglab.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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