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서서 바라보기

|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에세이와 칼럼부터 문화, 예술, 사회 비평까지 다양한 주제와 형식의 글을 쓰는 연구자이자 작가입니다. 주변부나 경계에 있는 존재들에 관심이 많고, 그 위치에서 중심을 재해석함으로써 변화를 도모하고 싶다는 목표를 가지고 작가 활동과 연구 활동을 하고 있어요. 보통 사회적 소수자 혹은 사회적 배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이를테면 장애인이나 만성질환자, 여성, 퀴어와 같이 사회적 배제의 대상이 되는 분들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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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장애인권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제가 수험생활을 하던 시기에 크론병 진단을 받았어요. 원래는 아마추어 배드민턴 선수를 할 만큼 건강했는데, 진단 이후 원래 생각했던 앞으로의 삶의 기획이나 진로가 많이 흔들렸죠. 대학 입학 이후, 장애인권 동아리에서 진행한 배리어프리 영화 상영회를 보러 갔어요. 그곳에서 청각이나 시각을 사용하지 않고도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고, 그 경험을 시작으로 장애인권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질병 경험에서 출발해 장애인권 활동을 했다고 할 때, 질병과 장애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가장 흔한 편견 중 하나예요. 장애를 질병으로 보거나 “장애를 앓는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질병과 장애를 구분하지 않는 편견인데, 당시에는 저도 그런 편견에서 출발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시작해 글도 쓰고, 학교 내 제도 개선을 위한 캠페인도 하고 또 시민연극에도 참여했죠.

난치의 상상력 : 대안적 관점의 제시

| 도서 <난치의 상상력>을 흥미롭게 봤습니다. ‘난치’와 ‘상상력’이 쉽게 결합할 수 있는 단어는 아닌 것 같은데, 이 두 가지를 연결한 이유가 궁금했어요.

상상력이란 지금 없는 무언가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제 관점에서 지금 없는 것은 ‘아픈 사람, 특히 앞으로 낫지 않을 아픈 사람이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었어요. 지금도 그런 세상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난치와 상상력을 결합했어요.

‘난치의 상상력’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어요. 첫째는 ‘난치 질환을 경험한 사람의 상상력’이라는 의미예요. 아픈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특별한 관점을 갖게 돼요. 예를 들어, 저는 크론병을 앓게 된 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접근성이나 포용성 같은 문제에 더 민감해졌고, 아픈 사람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하게 됐죠.‍

두 번째는 ‘치유되지 않는 상상력’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어떤 중요한 경험을 한 후에는 그 이전의 상태로 완전히 돌아갈 수 없잖아요. 제게는 질병이 그런 경험이었어요. 예를 들어, 저는 아직도 배드민턴 선수였을 때 높이 점프해서 스매시를 하던 느낌과 스텝을 몸이 기억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 몸의 기억이 실제로 실현될 수 없는,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됐죠.

제 상상력은 질병으로 인해 완전히 변화했어요. 이 변화는 ‘치유’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질병 이전의 저로 완전히 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이렇게 변화된 상상력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아요. 오히려 이 ‘치유되지 않는 상상력’을 그대로 간직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그려나가고 싶어요. 질병 경험이 남긴 흔적을 지우려 하지 않고, 그 경험과 함께 살아가는 상상력을 만들고 싶다는 의미에서 ‘난치의 상상력’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 책에서 특히 강조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이 책에서 가장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질병이나 장애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픈 사람이 낫기를 기대하고, 낫지 않으면 그것은 개인의 책임이나 실패로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아픈 사람이 ‘아픈 채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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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성 질환이나 크론병을 앓고 계신 분들의 책 후기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을까요?‍

아픈 사람들이 남겨주신 모든 후기가 소중해요. 공통적인 이야기가 많았는데, “아픈 게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거나, “나에게 필요했던 이야기가 여기 있었다”는 말씀이 많았어요. 위로를 받았다는 분들, 속이 시원하다는 분들도 있었고요.어떤 분들은 고통의 묘사가 너무 디테일해서 크론병 진단을 받은 직후에는 겁을 먹었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끝까지 읽으면 아픈 사람의 더 나은 삶을 위한 다양한 선택지가 가능하다는 것, 내 몸이 변하지 않더라도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발견했다고 해서 감사했습니다.

모든 여정을 함께하는 영세한 접근성

‍| 다양한 활동을 하셨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활동이 있을까요?

연세대 장애인권 동아리 ‘게르니카’에서 활동하며 배리어프리 맵을 만드는 작업을 했어요. 처음에는 휠체어 진입 가능 여부만 표시했는데, 점차 세분화되었죠.

나중에는 아예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어요. 턱이 있는지, 있다면 높이는 얼마인지, 도움이 있으면 진입 가능한지 등을 체크했죠. 보통 휠체어 타는 학생들은 활동을 보조하는 친구들과 함께 다니니, 도움에 따라 진입 여부가 달라졌거든요. 또 시각장애 친구들을 고려하여 조명의 밝기는 어떤지, 뒤풀이를 하는 식당의 메뉴판 글씨 크기는 괜찮은지 이런 자잘하지만 필요한 것들을 데이터로 만들었어요. 이 밖에도 실내에서는 청각장애 학생을 위해 공간의 소리가 얼마나 울리는지 확인하고, 고기를 먹지 않는 친구들을 위해 비건식 가능 여부도 배리어프리 맵 안에 넣도록 했어요.

배리어프리 맵을 만들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건 ‘전체 여정’안에서 접근성을 고려했다는 점이에요. 보통 학교에서 동아리나 학회 행사를 하면 공식 행사 이후의 일정이 있잖아요. 뒤풀이 장소까지 가는 길 전체의 접근성을 고려해서 전체의 과정을 모두가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정보를 축적했어요. 행사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장애가 있더라도 혹은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더라도 모두가 뒤풀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한 거죠.

| 해오신 활동과 비슷하게 장애 접근성을 고려한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이 많아지고 있어요. 접근성을 공부하신 연구자로서 제안할 방향성이 있을까요?‍

이런 활동들이 다양해지는 건 매우 긍정적이지만, 몇 가지 개선할 것들이 있어요. 우선 접근성 관련 데이터베이스를 만들 때 기준이 다양해 통합이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만든 자료를 카카오맵 혹은 네이버지도 같은 대중적 플랫폼에 적용하기 어렵죠. 다루는 정보에 대한 표준화가 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플랫폼에서 접근성 정보 표준화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봐요.

아울러 제시하고 싶은 중요한 개념은 ‘영세한 접근성’입니다. 우리는 흔히들 ‘배리어프리’라고 했을 때, 휠체어가 진입하는 완벽한 진입로, 턱이 없는 입구를 떠올리잖아요. 하지만 이렇게 완벽하고 매끈한 접근성은 스타필드, 더현대 같은 대기업 시설에서나 가능해요. 사실 우리는 그런 곳만 가고 싶은 게 아니잖아요. 휠체어를 탄 사람들도 성수동의 팝업스토어에 가고 싶고, 연남동에 핫한 카페도 가고 싶으니까요. 완벽한 접근성은 자본력이 있는 곳만 제공할 수 있어요. 오히려 약간의 불편함이나 실수가 있더라도, 그런 ‘덜컹거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장애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장애인이 자신의 장애를 유독 더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함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작은 상가들도 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더불어 강조하고 싶은 점은 접근성이 단순히 ‘있다/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들어갈 수 있냐, 없냐”라는 이분법적 관점이었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잖아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휠체어 사용자가 갈 수 있는 카페, 갈 수 없는 카페 이렇게 나뉘는 게 아니라 활동보조인의 도움이 있으면 갈 수 있는 카페로 정의할 수도 있죠. 문화예술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접근성은 미세한 부분에서 계속 조율해야 하는 문제고, 매뉴얼화하기 어려운 맥락적 요소가 많습니다. 물리적 접근성, 정보 접근성, 미적 체험에 대한 접근성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난치 질환을 가진 사람이 느끼는 고통이나 불편함을 개인이 극복해야 할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어요. 이는 ‘질병권’이라는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질병을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으로 인정하고, 아픈 채로도 사회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감각 간의 대화, 새로운 접근성을 위한 실천

| 배리어프리라는 말 대신 접근성이나 감각 번역이라는 표현을 제안해 주셨는데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배리어프리가 지금은 다양한 영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원래는 건축용어로 시작했어요. ‘장벽을 없앤다’는 의미에 초점이 맞춰져 있죠. 그런데 저는 이 표현이 앞서 말한 ‘매끈한 접근성’이라는 느낌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배리어프리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활동 중 일부는 너무 그럴듯하고 완벽한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현실의 접근성은 전혀 그럴듯하지 않고 여전히 참담한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휠체어를 타는 친구와 지하철에서 플랫폼 사이 간격 때문에 위험했던 경험이 있는데, 이런 현실과 배리어프리 캠페인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고 느꼈어요.

또한 접근성이나 감각 번역이 더 넓은 의제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인, 장애인, 젠더 등의 문제를 개별적으로 다루면 좁은 특수 영역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접근성’이라는 단어 안에서 함께 다루면 특정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인프라 문제로 볼 수 있거든요. 예컨대 노인을 위한 접근성 개선이라고 하면 지금은 노인이 아닌 사람들의 관심도 이끌어 낼 수 있잖아요. 우리는 모두 노인이 될 테니까요. 단어에 대한 고민이 사회 전체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되는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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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감각 번역’은 어떤 개념인지 자세히 소개해주세요.‍‍

‘감각 번역’은 문화예술 접근성의 맥락에서 출발한 개념이에요. 시·청각 장애인의 문화예술 접근성에 대한 논문을 보고 생각했어요. 공연예술 접근성을 물리적 접근성, 정보 접근성, 미적 체험에 대한 접근성으로 나누었는데, 저는 특히 미적 체험의 접근성, 즉 비장애인과 동등한 예술적 경험을 할 수 있게 하는 부분에 주목했어요. 감각 번역은 시각적 경험을 청각적으로 동등하게 전달하거나, 반대로 청각적 경험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담은 용어입니다.

| 감각 번역이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 사례를 통해 알 수 있을까요?

영화나 공연의 화면 해설을 예로 들 수 있어요. 인터뷰를 하고 있는 지금 이 테이블 사진을 찍어 올린다면 “테이블에 커피 한 잔이 있다”라고 쓸 수 있겠죠. 하지만 “회색 벽이 둘러싼 회의실 안에 검은색 테이블이 있고, 일회용 컵에 담긴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있다”라고도 쓸 수 있겠죠. 앞에 쓴 문장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 되는 셈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작품을 처음 기획할 때부터 접근성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영화는 완성 후에 접근성 작업을 하는데, 이렇게 하면 화면 해설할 시간이 부족할 때가 많아요. 화면에 많은 정보가 있는데 충분히 해설하기 전에 빨리 지나가면 제대로 설명할 수 없거든요. 작품 제작과 동시에 접근성을 고려해야 더 좋은 감각 번역이 가능합니다.

| 감각 번역과 접근성에 대한 고민이 작품 기획부터 함께한다면, 작품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겠네요.‍

감각 번역은 작품의 존재론적 질문과 연결됩니다. “어디까지가 작품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되죠. 예를 들어 접근성 담당자가 화면해설에 대해 피드백을 했는데 연출자가 거부한다면, 이는 작품이 훼손된다는 판단 때문일 텐데요. 이 지점에서 어디까지가 작품이고 어느 지점부터를 훼손으로 볼 것인가라는 문제가 드러납니다.

저는 접근성이 행사의 날짜, 장소와 함께 같은 층위에서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보통은 행사의 개요를 먼저 결정한 다음에 속기사를 섭외하는 식으로 접근성을 후순위에 두잖아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행사에 날짜와 장소가 필요하듯, 접근성도 개요 단계에서 함께 고려되어야 하죠. 접근성은 작품이나 행사의 부가적 요소가 아니라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접근성 요소가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아니면 작품과 별개의 덧붙임으로 취급되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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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감각 번역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싶으신가요?‍‍

감각 번역 개념을 더 구체화하고 정교하게 이론화하면서, 실무적인 경험도 더 많이 쌓고 싶어요. 비슷한 시도를 하는 사례들을 아카이빙하고, 접근성에 대한 비평도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문학이나 영화는 평론가들이 작품에 대해 비평을 하잖아요. 저도 영화나 연극을 보면서 접근성에 대한 비평의 장을 만들고 싶어요. “이 작품의 화면 해설은 충분한가?”라는 비평적 질문을 통해 더 나은 접근성을 모색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감각 번역은 작품의 기획, 연출의 범위, 업무 배분과 조율, 예산의 배분까지 모든 것이 연결된 것이므로 혼자 할 수는 없는 일이거든요. 작품에 참여하는 여러 사람들이 함께 고민해야 하는 일인 거죠.  특정 한 명의 담당자가 필요한 것이 아닌, 모두가 함께 접근성을 고민해야 하는 ‘집합적인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다양한 측면에서 감각 번역의 가능성을 더 탐구하고 싶습니다.

글 | 윤성원

새로운 감각과 상상력이 필요한 분들께 안희제 님이 추천하는 콘텐츠를 소개해요.
“모두가 함께 고민할 때, 상상력은 더 커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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