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사이클론 알프레드에서 살아남기

ep1. 사이클론 알프레드에서 살아남기

작성자 Koi

호주, 오늘도 괜찮아!

ep1. 사이클론 알프레드에서 살아남기

Koi
Koi
@soyk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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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생활 2년 반 차, 엄청난 강적을 만났다. 바로, 강아지 이름 같기도 한 ‘알프레드’라는 태풍이다. CAT 2급 태풍이라 토네이도가 동반되거나 집이 날아갈 정도의 위력은 아니었지만,(특히 2003년의 ‘매미’가 SSHS 4등급 슈퍼태풍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1974년 브리즈번을 강타했던 최악의 태풍 이후 약 50년 만에 찾아온 태풍이라 도시 전체가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처음엔 나도 잘 몰랐는데, 학교에 가니 사람들이 다들 태풍 준비는 했냐고 물어봤다. 한국에서 매년 여름 늘 겪던 태풍이라 이번에도 잘 지나가겠지 싶어 평소처럼 마트에 들렀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간 마트에서 물과 건조식품 매대가 텅텅 비어 있었다.정말이지, 이게 포스트 아포칼립스인가 싶을 정도로… 그제야 이번엔 좀 심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하게 탄산수와 500ml짜리 작은 생수 몇 개를 사고, 유통기한이 넉넉한 빵, 통조림, 에너지바 등을 챙기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 확인해보니, 정부 지침이 이미 발표되어 있었다. 침수 가능 지역은 모두 대피하라는 내용이었다. 뉴스에서는 ‘대피 경고가 내려졌음에도 대피하지 않을 경우, 구조가 어려울 수 있다’는 경고를 반복해서 전했다. 또한 단수가 예상되므로 식수는 1인당 10L, 단전에 대비해 헤드라이트나 손전등, 통신 장애에 대비해 라디오를 준비하라는 공문도 함께 발표되었다 브리즈번은 주요 도심(CBD)을 제외하면 여전히 많은 동네가 지상 전선(나무 전봇대)에 의존하고 있어, 정전 가능성이 매우 높고, 또 정전이 잦다. 한 마디로, 정전때문에 온 동네가 난리법석인 게, 이상하지 않다는 거다.

우리 가족도 급하게 리빙박스와 양동이를 사서 물을 받아두기 시작했다. 식수로 쓸 10L는 며칠을 돌아다닌 끝에 다행히 구비했고, 그때부터는 점점 조여오는 불안감과 싸워야 했다. 태풍 첫날, 해안가 지역과 사우스포트 쪽에서 정전 피해가 속출했고, 다음 날부터는 그 피해 지역이 클리브랜드를 지나 점점 북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정전 피해 가구 수는 계속 늘어나 무려 35만 가구에 달했다. 뉴스에서는 부러진 나무가 집을 덮친 사진, 침식돼버린 골드코스트 해변의 휑한 모습이 나왔다.

비가 잠깐 잦아들었나 싶을 때쯤, 마트를 다시 가봤지만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신선식품은 물론, 모든 매대가 텅 비어 있었다. 정말,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뉴스를 보니 사람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아침부터 마트 앞에서 오픈런을 했다. 내 생애 그렇게 붐빈 마트 주차장은 처음 봤다. 비가 그쳤다 싶던 하늘은 다시 구멍이 난 듯 비를 퍼부었고,거센 바람에 집 앞 나무가 양옆으로 큰절하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천장에서 물이 새기 시작했다. 퍼붓는 비의 양을 견디지 못했는지, 떡볶이 배달 용기 정도 되는 용량의 박스를 가져다 놓아도 삽시간에 금방 차올랐다. 바람으로 인해 문을 열 수 없었고, 도로 상황이 전혀 파악되지 않아 차를 끌고 어디 나갈 수도 없는 며칠이었다. 우리는 그저 뉴스를 보며, 모든 것이 안전해질 때까지 습기로 가득 차 꿉꿉한 집 안에서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 사이클론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자리는 생각보다 더 처참했다. 골드코스트의 아름다운 해변은 사라졌고, 학교 선생님들 중에도 집이 침수되거나 피해를 입은 경우가 많았다.정전 피해를 입은 가구들 중 많은 이들이 지연된 복구로 인해 5일 이상 전기 없이 지내야 했다.

다행히 우리 집은 고도가 높은 편이라 침수 걱정은 덜했고, 운 좋게도 정전 피해도 없었다.양동이에 가득 담긴 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애를 먹고 있지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이번 사이클론이 언론의 과장이었다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그 과장이 있었기에 그나마 대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장대비가 멎고, 2주 만에 본 파아란 하늘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음식, 물, 전기…평범하던 모든 것들이 고맙게 느껴졌던 사이클론 알프레드였다.

거센 바람도, 끝없는 비도 지나가고… 드디어 파란 하늘이 보인다. 지날 것 같지 않던 태풍도 다 지나간다.

호주, 오늘도 괜찮아!


배경 사진 출처: https://www.abc.net.au/news/2025-03-06/breakdown-expect-tropical-cyclone-alfred/105014154